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4화 (4/333)

4. 겁쟁이 아셀(2)

#4

“바, 방금···뭐였어?”

아셀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순간 마나의 흐름이 차단되며 마법이 풀렸다.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끈이 툭 끊기는 듯한 감각이었다.

“응? 방금 분명 마법이···.”

“나도 몰라.”

로난이 어깨를 으쓱였다. 잡아떼는 게 아니라 정말로 몰랐다.

그는 마나를 베어낼 수 있었다. 능력을 깨달은 것은 한창 징벌병으로 활동하던 무렵이었다. 당시에는 귀찮아질 것 같아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로난은 자신만이 아하유테에게 중상을 입힐 수 있던 것은 이 능력 덕이 아닐까 넌지시 예상하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또 다른 능력이 작용했을지도 모르지만.

‘이 능력에 관한 비밀을 푸는 것도 내게 주어진 과제 중 하나겠지.’

로난이 아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사흘 뒤 밤에 여기로 나와. 달이 뜰 즈음에.”

“응?”

“안 나오면 뭐···알지?”

로난은 그 말을 남기고는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아셀이 뭐라 뭐라 외쳤지만 무시했다. 제대로 정신이 박힌 놈이라면 나올 테니까.

“젠장,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했어.”

로난은 먼저 강가에 들러서 얼굴과 손에 묻은 피를 씻어냈다. 시장에서 새 옷을 사서 갈아입고, 길가에 피어 있는 수선화 몇 송이를 꺾었다.

이윽고 그는 마을 변두리에 세워진 작은 집 앞에 도착했다. 무성하게 자란 담쟁이넝쿨이 보기 좋게 외벽을 뒤덮고 있었다.

로난은 자기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전쟁터나 괴물 앞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 문 너머에 이릴이 있다. 열일곱에 집을 나온 이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끝내 거인들의 침공에 목숨을 잃은 그의 누이가.

“하···진정하자···.”

로난이 문고리를 잡아당기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냥 당기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문득 왼손에 들린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노랗고 하얀 수선화 열 송이가 보기 좋게 어우러져 있었다. 이릴이 좋아하는 꽃이었다.

갑자기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니미, 사랑 고백하는 숫총각도 아니고.

수선화을 버리고 오기 위해 돌아서려는 차였다.

“어머? 로난!”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막 소녀 태를 벗고 아가씨로 넘어가는 중인 굉장한 미인이었다.

“오늘은 빨리 들어왔네! 밥은 먹었니?”

“어? 어어···응···아니.”

해맑은 미소를 본 로난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깨까지 물결치는 머리칼은 별빛처럼 푸르스름한 은색을 띠었다. 봄볕 아래서도 그슬리지 않은 고운 피부는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설원을 연상케 했다.

“마침 잘 됐다. 막 스튜를 끓였거든.”

과연 이릴은 각종 얼룩이 묻은 앞치마를 둘러메고 있었다. 생글생글 웃던 그녀가 로난의 손에 들린 수선화를 보며 소리쳤다.

“앗! 그 꽃은?!”

”으,응···?”

“나 주려고 가져온 거야? 예쁘다!”

“아니···딱히 그건 아닌데···예쁘다니까 뭐···다행이네.”

로난은 수선화를 건네며 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맑고 큼직한 눈동자는 로난과 같은 노을 색을 띄었다.

꽃봉오리에 얼굴을 파묻으며 아이처럼 기뻐하던 그녀가, 별안간 로난을 와락 끌어안았다.

“까칠한 우리 동생이 웬일이래? 고마워!”

그 순간 형용 못할 감정이 로난의 가슴 속에 휘몰아쳤다. 누이는 자신이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 힘을 주는, 만인을 비추는 태양 같은 사람.

별안간 눈앞이 부옇게 변하는 바람에 그는 소매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에이, 씨.”

“어라? 눈에 뭐가 들어갔니? 누나가 봐 줄게, 이리 와 봐.”

“아냐, 그런 거 아냐.”

“그러지 말고 얼른 봐봐.”

머리 하나 정도의 키 차이가 나서 이릴이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로난은 배가 고프다는 핑계로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

“잘 먹었어. 맛있었어.”

“와아! 오늘 정말 무슨 날인가? 로난한테 맛있다는 소리를 다 듣네!”

로난은 숟가락을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나무로 만든 그릇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이릴이 끓인 투박한 감자 스튜는 회귀 전에 먹었던 어떤 진미보다 맛이 좋았다.

“누나. 내가 몇 살이지?”

“어? 음···그러니까···내가 올해로 열아홉이니까···로난은 열네 살이지? 갑자기 그건 왜?”

예상한 것보다 한 살이 더 어렸다. 그가 마을을 떠난 것이 열일곱이었으니 거인들의 강림까지는 대략 십 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아니, 그냥. 기억이 잘 안 나서.”

“뭐야!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지? 혹시 숲에서 버섯 같은 걸 잘못 먹었다던가···”

“아니야.”

이릴은 걱정스레 신음하며 로난과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난데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꽃을 꺾어온 것도 그렇고 오늘의 동생은 뭔가 이상했다. 매사에 까칠하고 숨 쉬는 것조차 귀찮아했던 아이인데.

“참, 누나.”

“웅?”

로난은 스튜를 한 국자 더 퍼 올리며 말했다. 이걸로 세 그릇째였다.

“나 아카데미 다니려고.”

“어?”

이릴은 벙찐 채 로난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워서 순간적으로 동생이 한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얘가 뭐라고 했더라? 또 양을 잃어버렸댔나? 아냐, 아카데미가 어쩌고 했는데···아카데미···아카데미···

그녀는 거의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뭐어어어? 아카데미에 다니겠다고?!”

“깜짝이야.”

“다시 말해봐 로난, 응? 아카데미에 다닐 거라고 말한 거야? 정말로? 정말? 정말?”

“응.”

“꺄아아악!”

이릴은 행복한 탄성을 내지르며 동생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평생 숙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초당 세 번꼴로 로난의 뺨에 키스가 퍼부어졌다.

“난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믿고 있었다구! 너는 재능이 있으니까 뭐든 잘할 거야!”

“고마워.”

“어느 쪽으로 갈 거야? 역시 기사 아카데미인가? 기사 로난! 멋지다! 아니면 의외로 일반적인 국립 아카데미? 지식인이 되는 것도 좋지! 물론 뭐가 됐던 누나는 네 편이야! 아, 내 정신 좀 봐!”

이릴은 로난이 네 번째 그릇을 비울 즈음에야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난데없이 벽난로 옆에 놓인 항아리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다시 빠져나온 이릴의 손에는 묵직한 자루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자! 받아 로난! 이제 다 네 거야!”

밀봉된 자루에서는 금속이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로난은 저 작은 자루 안에 누이가 지금껏 벌어온 돈 대부분이 담아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낑낑대며 식탁 위에 자루를 올려놓은 이릴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어서 열어 보라는 의미겠지.

하지만 로난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누나 써.”

“뭐어? 하지만 이건 네···.”

“등록금이지? 정말 고맙지만, 마음만 받을게. 내가 가려는 곳은 이걸로는 턱도 없어서.”

“어디를 생각하고 있길래 그래? 이래 봬도 꽤 많이 모았거든?”

뽀얀 볼이 귀엽게 부풀었다. 로난은 자루를 다시 항아리에 집어넣고는 입을 열었다.

“황립 필레온 아카데미.”

안 그래도 커다란 이릴의 눈이 더욱 커졌다.

****

[배움을 원한다면 필레온으로 가라.]

아데샨이 남긴 말이었다. 황립 필레온 아카데미. 속칭 필레온.

제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이 굴지의 교육 기관은 황궁 다음으로 위상이 높은 건물이었다. 대륙 전역에서 모집한 우수한 교수진과 황실의 막대한 자본은 단순히 명문 아카데미를 넘어 위인을 찍어내는 공장을 만들어 냈다.

심지어는 학업과는 일절 연이 없던 로난마저도 필레온을 졸업했다는 이력이 지닌 가치를 알고 있었다.

“확실히···필레온 출신 중에 쓸만한 놈이 많았지.”

기억을 반추하던 로난이 납득한 듯 읊조렸다. 대장군 아데샨과 검성 슐리펜, 심지어는 제국 최악의 범죄자라 불리는 겨울의 마녀 또한 필레온 출신이었다.

남은 시간은 십 년.

로난의 등에 지어진 사명을 생각한다면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얼떨결에 떠맡은 임무였지만, 외면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최후의 순간을 떠올렸다. 하늘을 찢으며 강림하는 수백의 거인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강해져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로난은 아데샨의 말마따나 필레온 아카데미에 입학하기로 마음먹었다. ‘얼마나’ 는 몰라도 ‘어떻게’ 강해지는지는 배울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침 아카데미를 다니는 것이 꿈이기도 했고.

“그나저나 그렇게 놀랄 일이었나.”

아직도 이릴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다. 황제가 될 것이라 선언했어도 그보다 놀라지는 않았으리라. 그녀는 로난의 앞날을 축복해 주기는 했지만, 필레온에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로난은 다시 만난 누이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회귀한 지 삼 일째 되는 날, 꼭두새벽부터 집에서 나와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등에는 어린아이도 들어갈 만한 배낭 두 개를 짊어진 채였다.

“오.”

머지않아 가벼운 로브 차림의 소년이 참나무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로난이 박수를 세 번 치자, 소년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제때 나왔구나 마셀. 솔직히 의외다.”

“아! 으응···그, 아셀이야.”

“사내새끼가 까다롭기는. 자, 내가 너를 왜 오라고 했을까?”

“어···음···내 능력에···관심이 있어서?”

“역시 마법사 나리라 그런지 머리는 좋구만. 자, 받아.”

“어? 어엇!”

로난은 배낭 하나를 벗어 아셀에게 던졌다. 부피가 커서 쫄았는데 생각보다 가벼웠다.

“이, 이게 뭐야?”

“꿈과 희망을 담을 주머니.”

아셀은 배낭을 슬쩍 끌러 보았다. 두껍고 얇은 자루 십여 개가 들어 있었다. 어디에 쓰려는 건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게···내 능력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

“일단 따라와. 뗏목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뗏목이라고?”

아셀은 배낭을 짊어진 채 로난을 뒤따랐다. 강가에는 정말로 못 보던 뗏목 하나가 밧줄에 묶여 있었다.

모양새가 영 추레한 것이 항해보다는 잠수에 특화된 것 같았다. 아셀은 눈에 불을 켜고 주위를 살폈지만, 뗏목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타.”

로난이 엄지로 뗏목을 가리키며 그리 말했을 때, 아셀은 정말 울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뗏목은 물살을 타고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만개한 보름달이 강물과 두 소년을 비추고 있었다. 아셀은 배낭 옆에 몸을 웅크린 채 잠잠한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낚싯대를 안 가져온 게 아쉽네. 여기 숭어로 구이를 해 먹으면 끝내주는데.”

로난이 입에서 새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는 가느다란 담뱃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으,응. 그러게.”

“말 좀 더듬지 마라. 내가 널 토막 쳐서 강에 던지기라도 할까봐?”

“아, 알았어. 안 더듬을게.”

“또 더듬네. 뒈지고 싶어?”

로난의 허리춤에는 한스의 칼이 걸려 있었다. 아셀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로난이 양치기용 작대기만으로 한스의 귀를 잘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안. 진짜 안 더듬을게.”

“그래 인마, 잘 할 수 있잖아. 어깨도 좀 펴고. 그렇게 매사에 주눅이 들어 있으니까 키가 안 크지.”

“응.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좋은 곳이지. 실전 감각도 기르고, 돈도 벌 수 있는 곳.”

아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돈? 무슨 돈?”

“등록금. 아, 내가 안 말했던가? 너 아카데미 가야 돼.”

“아카데미?”

“그래, 나랑 같이. 내 기억이 안 틀렸으면 이번 한탕에 첫 학기 등록금 정도는 거뜬히 벌 거다.”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