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겁쟁이 아셀(3)
#5
아카데미?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아셀은 하마터면 그렇게 대답할 뻔했다.
“그···로난, 내가 정말 당황스러워서 그러는데,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로난 전기 개정판의 첫 문장을 쓰는 중이지.”
“그게 뭔···.”
“내달 1일, 우리는 발론으로 갈 거야.”
“발론? 제도 발론 말하는 거야?”
“그래. 황립 필레온 아카데미가 거기 있잖아. 입학시험이 3일부터인걸 생각하면 조금 이르긴 한데. 적응 기간이니 뭐니 생각하면 그때 가는 게 맞아.”
로난의 목소리는 진중했다. 아셀은 그가 장난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제아무리 시골 촌놈이라 해도 필레온 아카데미의 위상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필레온이라고? 그 필레온 아카데미?
백탑(百塔)의 소도시, 대륙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모이는 곳. 거기가 어떤 곳인데 우리 같은 평민들이 들어간단 말인가?
하지만 로난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계획을 척척 진행하고 있었다.
“너희 부모님께도 말씀드렸으니까 그 부분은 안심해.”
“우, 우리 부모님하고 만났어? 언제?!”
아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로난은 누운 채로 손을 휘휘 저으며 그를 만류했다.
“앉아라. 침몰한다.”
“후···잠깐만···후우···.”
아셀은 심호흡하며 자리에 앉았다. 로난이 말을 이었다.
“엊그제 낮에. 좋아하시던데? 하나뿐인 자식이 필레온에 들어간다면 그만한 자랑거리가 어디 있겠느냐면서.”
“잠깐, 잠깐! 좋아! 로난. 네 말이 모두 사실이고, 진심이라 쳐!”
“진심 맞아.”
“그래! 너는 무예 쪽 재능이 어마어마하니까 어쩌면 입학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나는 왜? 내 능력은 보잘것없어. 너도 알잖아?!”
“아셀. 너는 지금 생활이 마음에 드냐?”
별안간 상체를 일으킨 로난이 아셀을 마주 보며 앉았다. 눈썹과 딱 붙은 눈동자는 맹금처럼 매서웠다.
아셀은 고개를 푹 숙였다. 빈말로도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었다. 따돌림이 두려워 양아치를 연기하던 나날이 눈앞을 스쳤다.
“······아니.”
“인생을 바꾸고 싶지 않아? 마법사의 자질은 아무나 타고나는게 아냐. ”
“하지만 나는···너처럼 강하지 못해. 비겁하고···소심하고···.”
“맞아, 병신이지. 그까짓 따돌림이 무서워서 애새끼나 괴롭히던 상병신. 왜 그때 너만 안 맞은 거 같냐? 좆나게 한심했거든. 때릴 가치도 안 느껴질 정도로.”
“그, 그런···.”
“근데, 그딴 건 다 사소한 일이야.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부분이고.”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로난은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눈앞의 소년은 자신과 닮아 있었다. 권태로움을 핑계 삼아 찬란한 재능을 낭비하던 철없고 어리석던 자신을. 아셀의 경우에는 권태가 아닌 나약함이었지만, 큰 궤는 같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재능을 낭비하면 나중에 틀림없이 후회할 거다. 내가 보증해.”
로난은 단지 염력 마법사의 필요성 탓에 아셀을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훗날 아셀이 자신과 같은 후회를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흐르듯 뿜어져 나온 연기가 강바람에 뒤섞여 사라졌다.
“뭐, 정 안 내키면 말해. 적당한 곳에 내려 줄 테니까.”
“······아냐.”
아셀이 고개를 들었다. 연갈색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결의에 찬 표정을 본 로난이 히죽 웃었다.
“나도 가고 싶어. 필레온.”
“잘 생각했어.”
“응,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려줘.”
“뭘 해야 하는지라···음···.”
아셀은 뭐든지 시켜만 달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난은 턱을 매만지며 그가 계획했던 작전을 복기했다. 그리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절도?”
****
뗏목은 새벽이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크고 작은 바위가 많아 몸을 숨기기에 좋은 장소였다. 두 소년은 큼지막한 바위 뒤편에다 뗏목을 묶은 뒤 하선했다.
“이제부터 목소리 낮춰. 잘 따라와.”
“응.”
둘은 강가를 벗어나 숲으로 들어갔다.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을씨년스러웠다. 얼마 걷지 않아 저 멀리서 붉은 빛무리가 아롱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게···네가 말했던···.”
“엉. 배낭은 잘 챙겼지?”
아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조심스레 불빛을 향해 다가갔고, 빛무리의 정체가 거대한 모닥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머지않아 눈앞에 펼쳐진 비현실적인 광경에, 아셀은 입술을 깨물며 비명을 참았다.
-커어어억! 푸가가각!
-피유우우우···!
귀와 코가 뾰족한 난쟁이 수십 마리가 모닥불을 중심으로 뻗어 있었다. 죽거나 다친 것은 아니었고,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로난이 불쾌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니미, 내가 아침에 싼 똥이 더 잘 생겼겠네.”
“저게···뭐야?”
얼핏 봐서는 ‘고블린’이라는 몬스터와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고블린과는 뭔가 달랐다.
덩치도 현저하게 컸고, 인상도 훨씬 더러웠다. 중요 부위만 달랑 가린 동족들과는 달리 방어구도 잘 갖춰 입었다.
결정적인 차이점은 피부의 색이었다. 보통 고블린 하면 떠오르는 녹색이 아닌, 황금처럼 누르스름한 색을 띠고 있었다.
“루나 고블린이야. 몬스터 주제에 저축을 하는 새끼들이지.”
로난이 말했다. 루나 고블린은 그가 방랑길에 알게 된 희귀종 고블린이었다. 까마귀처럼 반짝이는 물건을 모으고,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축제를 벌이는 습성이 있었다.
“이런 건 어떻게 찾았어?”
“다 방법이 있지.”
로난은 사흘 전, 행상인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빌어먹을. 또 상단이 습격당했어. 병사들은 뭘 하는지.’
‘또? 저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래. 이번이 벌써 세 번째야.’
‘산적 짓인가요?’
‘너 같은 꼬맹이가 알아서 뭐 하려고?’
‘영감님. 묻는 말에나 대답해요. 내가 급하지만 않았어도 댁 보따리를 태워 버렸을 거야. 이따위 담뱃대에 열 닢을 받아 처먹어?’
‘크흠..! 크흠흠! 거 녀석 성질머리하고는···.’
행상인은 자기가 아는 것을 전부 이야기했다. 습격은 밤에만 이루어졌고, 생존자는 없었다. 귀금속이나 병장기를 제외한 물건들은 일절 건드리지 않았다. 값나가는 향신료가 있었음에도.
‘그리고 이건 정말 귀한 정보인데···글쎄, 주위에 찍힌 발자국이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는군!’
정보를 취합한 로난은 그것이 루나 고블린의 소행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워낙 재빠르고 교활한 탓에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자가 아니면 추적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몬스터였다.
사람이 아홉 명이나 죽었음에도 범인을 색출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던 것이다. 그리고 로난은 그들을 추적할 수 있는 전문적인 지식이 있었다.
“실수하면 우린 다 죽는 거야 아셀. 저거 보이지?”
로난은 검지로 모닥불을 가리켰다. 주위에 각종 동물의 뼈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개중에는 사람의 뼈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근처에는 큼직한 제단이 세워져 있었다. 나뭇가지와 뼈를 엮어 만든 제단 위에는 여지껏 고블린들이 모아온 물건들이 죄다 올라가 있었다. 각종 병장기는 물론이요, 화려한 금붙이들도 제법 끼어 있었다.
축제를 즐긴 고블린들이 퍼질러 자는 동안 아셀이 염력으로 금품을 훔치는 것. 그것이 로난의 장대한 계획이었다. 아셀이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로, 로난···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돈을 벌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몇 개 있기는 하지.”
“그, 그럼 그걸로 가면 안 될까? 이건 진짜 아닌 거 같아.”
“그래. 둘 중 하나를 골라 봐. 첫 번째는 우리가 루나 고블린이 되는 거야. 야밤에 상인들을 습격해서 금품을 빼앗는 거지. 저항하면 배때기에 바람구멍도 서너 개 내 주고. 어때?”
“···두 번째는?”
“너를 창관에 팔아 버리는 거야. 예쁘장한 남자애를 좋아하는 변태들은 어디에나 있거든. 짧은 밤은 은화 10닢. 긴 밤은 30닢. 입으로 한 발 빼 주는 건 7닢. 등록금이 다 뭐냐? 한 달만 바짝 구르면 졸업 때까지 거뜬할걸?”
아셀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로난이 그와 어깨동무를 하며 쪼그려 앉았다.
“그러니까 인마, 잘 들어. 괜히 이런 생고생을 하는 게 아니야. 필레온이 어떤 곳이냐?”
“어, 어떤 곳이라니? 아카데미지?”
“그치. 아카데미. 그것도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도련님 아가씨들이 모이는 곳. 상식적으로 그 새끼들이 우리처럼 소똥 냄새 풀풀 풍기는 평민들을 친구로 받아줄 것 같아?”
“···아니.”
“우리가 인정받는 길은 실력 행사뿐이야. 그런데 불행히도 필레온은 귀한 집 자제 중에서도 인재들만 모이는 곳이지. 분명 코흘리개 시절부터 재능을 꾸준히 개화시켜 왔을 걸? 그런 놈들을 앞지르는 방법은 딱 하나야. 실전 경험.”
“실전 경험···!”
로난은 고개를 슬쩍 들어 제단을 바라보았다. 그들과 제단 사이에는 스무 마리가 넘는 루나 고블린이 뒹굴고 있었다.
“그래. 실전 경험. 도련님들이 넘어지면 이쁘장한 메이드 언니들이 약과 붕대를 들고 달려오지만, 우리는 좆같이 생긴 고블린들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온다고. 장담컨데, 이 경험 한 번이 도련님들의 십 년보다 의미 있을 거야. 뒈지지만 않는다면.”
천천히 몸을 일으킨 로난이 아셀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사나이가 돼라, 아셀.”
“으으···.”
아셀은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님버튼까지 헤엄쳐 가는 한이 있어도 뗏목에서 뛰어내렸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셀은 심호흡을 하며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덜덜 떨려오는 손으로 제단을 겨누었다. 나지막한 영창이 입술 사이로 새나왔다.
“인비저블 핸드.”
제단에 올려져 있던 단검 하나가 둥실둥실 떠올랐다.
****
“씨팔! 그거야 아셀! 할 수 있잖아!”
허공을 가로질러 다가온 목걸이가 자루 안으로 들어갔다. 로난은 양 주먹을 콱 쥐며 쾌재를 불렀다. 큼직한 사파이어가 박혀 있는 것이 금화 서른 개는 족히 받을 것 같았다.
“후욱···후우우···!”
“이 자루만 다 채우고 튀자. 고생했다.”
절도 행각을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났다. 밤은 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검푸르게 익어가고 있었다. 아셀은 지금까지 일곱 개 하고도 반 개의 자루를 채우는 데 성공했다.
“인비저블···핸드.”
그는 평소와는 격이 다른 집중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실전이 어쩌고 하던 로난의 지론은 옳았다.
물건을 하나라도 떨어뜨리는 순간 고블린의 밥이 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아셀의 염력은 눈부신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그를 반증하듯, 묵직한 메이스 두 개가 제단에서 떠올랐다. 머리 부분의 형태가 단조롭지 않고 화려한 것이 성기사들이 쓸 법한 물건이었다.
“오, 저것도 꽤 비싸겠는데?”
로난은 생전 느끼지 못한 종류의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나 자신이 강해지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동료가 강해지는 걸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셀은 징벌 부대의 얼간이들에게는 없던 영특함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사실 중간에 고블린들이 깨는 것을 상정하고 계획한 일인데, 아셀의 무시무시한 성장 속도 덕에 칼을 뽑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고블린 나부랭이들에게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지치기만 하고.’
어차피 앞으로도 고생은 실컷 할 텐데, 가끔은 편하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메이스는 순조롭게 다가오고 있었다. 무게가 무게인지라 조금씩 흔들리고는 있었지만, 원체 고도가 높아서 문제가 없었다.
그랬어야 할 터였다.
“게 섯거라! 이 닭대가리야!”
“젠장! 강으로 들어가기 전에 잡아!”
별안간 숲속에 힘찬 함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이 아닌 다른 이들의 목소리였다. 새들이 날아오르고, 잠에서 깬 루나 고블린들이 괴성을 지르며 일어났다.
-키에에엑!!
-캬오! 캬오!
“어? 어어어어!”
화들짝 놀란 아셀이 몸을 움츠렸다. 메이스를 붙들고 있던 마법이 풀렸다.
콰작! 곧장 지상으로 낙하한 메이스가 막 일어나던 고블린의 골통을 산산조각냈다. 시원하게 튀어 오른 피와 뇌수가 근처에 있던 고블린들의 얼굴을 적셨다.
-키, 키에엑?!
“안 돼!”
아셀은 머리를 쥐어 싸매며 로난을 돌아보았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칼자루를 쥐었다.
“그래 ,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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