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6화 (16/333)

16. 결과 발표

#16

“저기 있네. 새빨간 놈.”

로난이 손가락을 뻗어 인파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사람들에게 치여 가며 휘청이고 있는 아셀의 모습은 꼭 억새밭 사이에 피어난 튤립 같았다.

까치발을 든 채 두리번거리던 그가 로난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로난! 마르야!”

“저 새끼 시험 잘 봤나보다.”

“응. 누가 봐도.”

아셀의 표정은 머리 위로 드리워 있는 하늘만큼이나 화창했다. 실기시험을 마친 세 사람은 마르야가 아는 식당으로 이동했다. 제도에서도 명성이 드높은 닭요리 맛집이었다.

“에헤헤···.”

아셀은 밥을 먹는 내내 취한 듯 헤실거렸다. 조막만 한 입을 오물거리다가도 헤헤 웃는 것이 정말로 어디가 모자란 애 같았다. 보다 못한 로난이 입을 열었다.

“얼마나 대단한 걸 보여줬길래 그렇게 실실 쪼개? 염력으로 심사위원들 엉덩이라도 닦아 줬냐?”

“죽을래?”

마르야가 들고 있던 닭날개를 내팽개쳤다. 겨우 정신을 차린 아셀이 시험장에서 있던 일을 설명했다.

“이런 젠장, 통나무 서른 개를 천장까지 들어 올렸다고? 거기다가 빙빙 돌리기까지?”

“으응···.”

당일 시험을 보러 온 응시생 중 염력을 다루는 마법사는 아셀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심사위원들의 태도도 나름 호의적이었고, 실수하지 않고 기술을 시연할 수 있었다고 했다.

“너가 다 해 먹어라 아셀. 우리 집도 좀 여기로 옮겨 줘.”

이 새끼 진짜로 천재인가? 로난이 사람 머리만 한 닭다리를 뜯으며 감탄했다. 애새끼 하나 들어올리는데도 낑낑대던 걸 생각하면 정말 괄목할만한 발전이었다.

식사를 마친 일행은 곧바로 각자의 숙소로 흩어졌다. 필기시험이 코앞인 탓에 놀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침대에 엎드려서 복습하던 아셀이 질문했다.

“로난, 다시 한 번 안 봐도 돼?”

“이렇게···아니, 이 각도였나···음? 뭐라고?”

로난은 낮의 시험장에서 나비로제가 사용한 검술을 따라해 보고 있었다.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기술이라 그런지 흥미가 크게 일었다. 그의 공책은 빨아야 할 옷가지와 함께 방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열심히 한 건 아는데···혹시 문제가 어렵게 나올 수도 있잖아.”

필기는 실기에 비해 배점이 적었지만 결코 무시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로난이 코웃음 쳤다.

“얌마, 걱정도 팔자다. 아무거나 다 물어봐봐. 대답해줄 테니까.”

“으음···그러면···서부 도란다 지방의 주된 건축 양식이 뭐야?”

“아레스코.”

아셀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는 자신의 공책을 휙휙 넘겨 가며 몇 개의 질문을 던졌다.

“그, 그럼···대마법사 로르혼이 이룩해 놓은 삼대 경이는?”

“나선의 탑, 빛 속성 마법, 끓는 불.”

“불의 어머니라 불리는 환상종의 이름은?”

“레드 드래곤 나바르도제.”

로난은 아셀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는 이어진 열 개의 질문 중 여덟 개에 완벽하게 답변을 했다. 아셀은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대, 대단해 로난! 진짜로!”

“니미, 똥 싸는 시간까지 아껴 가면서 외웠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기반이 될 만한 상식이 없는 로난은 마르야가 빌려준 책을 통째로 외우다시피 했다. 답변하지 못한 두 개는 풀이가 필요한 마나 수식 문제였다.

그는 계산이 필요한 수학 문제는 아예 포기하고 전체를 암기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립했다.

등을 돌린 로난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나비로제가 보여줬던 오묘한 검로가 좁은 객실 내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다행이다···.”

아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공책을 덮었다. 솔직히 로난이 필기시험도 대비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건 아주 훌륭한 수준이 아닌가?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배낭에서 공책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마르야가 빌려준 책의 하권. 그러니까 나머지 절반의 정보가 요약된 공책이었다.

‘당연히 하권도 다 외웠겠지?’

아셀은 굳이 질문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상권의 내용을 완벽하게 외운 것으로 봐서 괜한 오지랖이 될 가능성이 컸다.

설마 알고 보니 상권만 공부했다~ 같은 일이 벌어질까. 질 나쁜 농담도 아니고.

사흘 뒤, 세 사람은 갈레리온 본관에서 동시에 필기시험을 치렀다. 필레온 아카데미의 합불 여부는 필기시험이 끝나는 당일 바로 발표되었다.

****

“거지 같은 인생.”

티 없이 맑은 밤이었다. 새하얀 보름달 아래로 펼쳐진 대광장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모두 아카데미 합격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온 응시생들이었다.

로난은 그 사이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퀭한 눈동자는 반쯤 맛이 가 있었다. 아셀이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지, 지금이라도 바렌 교수님한테 돌아가자. 추천장을 다시 달라고 하는 거야. 응?”

“차라리 똥구멍에 칼을 꽂고 수박을 썰고 말지.”

“그, 그때는 싹싹 빌어서라도 가져온다며?”

“난 농담도 못하냐?”

“그, 그럼 어떡해애···.”

아셀이 울먹거렸다. 죄책감이라는 거대한 뱀 한 마리가 심장을 조이는 것 같았다. 로난이 다시금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왜 너가 걱정을 하냐. 떨어져도 내가 떨어지는데.”

“내, 내 잘못이잖아···내가 그때 물어만 봤어도···.”

“됐어, 그때까지 몰랐으면 어차피 조져 먹었을 시험이야.”

설마는 결국 사람을 잡았다. 로난은 하권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어떻게든 기억과 상식에 의존해서 아득바득 적었지만, 문제의 절반가량을 날려 버리고 말았다.

“에이, 너무 걱정하지 마.”

뒤늦게 합류한 마르야가 그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전전긍긍하는 아셀과는 달리, 그녀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근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떨어지면 내년에 내 후배로 들어오면 되지. 어? 나쁘지 않은데?”

“덕담 고맙다.”

마르야가 키득거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로난이 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검을 맞대본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최상위권의 점수를 받아도 이상함이 없을 칼솜씨였다.

그때, 텅 빈 밤하늘을 향해 파란 불덩이 하나가 쏘아 올려졌다.

-퓌요오오오!

일정한 고도에 이른 불덩이는 그대로 폭발하며 거대한 독수리의 형상으로 변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마르야가 두 소년의 목을 끌어당기며 외쳤다.

“발표한다!”

“켁!”

목이 졸린 아셀이 마르야의 팔을 탁탁 쳤다. 그와 동시에 독수리가 날개를 펼쳤다. 대광장의 하늘을 둥글게 감싸는 날개에는 합격자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시력과 독해력을 강화해주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합격자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머지않아 인파 곳곳에서 환호성과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합격이다! 까악!”

“나, 나도!”

“아아아악! 안 돼!!”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난데없이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는 소녀도 있었고, 괴성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헤드스핀을 도는 멍청이도 있었다. 기뻐하는 사람보다는 슬퍼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마, 마르야···저기!”

문득 아셀이 오른 날개의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고개를 돌린 마르야가 돌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이 그곳에 적혀 있었다. 순위와 함께.

[무예과 / 마르야 카라벨: 실기 9위, 필기 9위(4)]

“아···.”

장학금도 받을 수 있는 성적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자신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여지껏 노력해온 나날이 눈앞을 스치는 탓에 한순간 시야가 흐려졌다.

“에이, 씨.”

소매로 눈가를 닦은 마르야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다시 명단을 살피던 그녀의 입에서 요란한 외침이 튀어나왔다.

“야! 저기 맨 위!”

아셀은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마르야는 그를 번쩍 들어 올려서 독수리의 왼편 날개를 보게 했다.

“왼쪽에서 열다섯 번째! 위에서 아래로 세 칸!”

“어···?”

땡그랑. 미끄러지듯 아셀의 손을 빠져나온 지팡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마법과 / 아셀: 실기 12위, 필기 1위(3)]

“내···내가 필기 1위···?”

“귀염둥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응?”

마르야는 그대로 아셀을 와락 끌어안았다. 겨우 한 달을 준비했다기에는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실기시험은 염력 마법사로서의 특혜를 받았다고 치더라도, 필기시험에서 1등을 했다는 것은 거의 만점을 맞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3)은 뭐야?”

“너랑 같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 세명 더 있다는 뜻이야. 한 명은 슐리펜일 거고, 다른 한 명도 누군지 대충 예상이 가네.”

마르야는 이번에 아칼루시아 가문의 양녀로 들어온 소녀를 언급했다.

세 가지 속성을 동시에 다루는 희대의 천재. 아마 마법과의 수석도 그녀일 것이라고 했다.

“이거 진짜 너희를 선배님이라 불러야겠는데.”

그때 옆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의 얼굴이 굳었다. 진작에 명단에서 시선을 뗀 로난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자, 잠깐만 로난. 이름···없어?”

“야, 장난치지 마.”

“내년에 입학하면 되지 뭘 그러냐.”

로난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허공을 가리켰다. 너네가 한 번 찾아보라는 뜻이었다.

염력으로 자신의 몸을 띄운 아셀이 다시 명단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어, 없어···정말로···.”

아셀의 목소리가 떨려오고 있었다. 마르야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로난의 팔을 콱 쥐었다.

“에이, 그럴 리가 없잖아. 있을 거야.”

“없다니까?”

“그런 말 하지 마.”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을 했지만, 호흡이 가빠져 오는 것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로난은 말없이 담뱃대에 가루를 더 털어 넣었다. 두 사람은 필사적이라 해도 좋을 태도로 명단을 살폈다.

“이건···이건 말도 안 돼···.”

로난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고 다시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뭐가 착오가 있는 걸 거야. 응?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마르야.”

“상식적으로 그렇잖아! 이게 말이 돼?!”

마르야가 로난의 양어깨를 붙잡으며 외쳤다. 젖어 있는 눈가를 본 로난이 쓰게 웃었다.

그때 또 다른 불덩이 하나가 하늘로 쏘아올려졌다.

-펑!

아까의 푸른 불과 대조되는 붉은색이었다. 이전의 것보다 훨씬 밝은 빛무리에 군중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건···?”

셋 중에서는 마르야만이 그 불꽃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글로리 피닉스. 수석과 차석의 이름만을 공지하는 영광의 새.

빠르게 비상하던 불덩이는 불사조의 형상이 되어 머리 바로 위의 하늘을 휘감았다.

-퓌요오오오오!

불사조가 날개를 펼쳤다. 한순간 해가 떴나 싶을 정도로 밝고 화려한 빛무리가 사방을 수놓았다.

수직으로 고개를 꺾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

아셀과 마르야는 그때까지도 로난의 이름을 찾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린 두 사람이 그대로 얼어 버렸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엉? 왜 그러냐?”

“로, 로난···. 저,저저저···저거···.”

“말을 해, 인마. 말을.”

아셀은 치매 걸린 앵무새처럼 말을 더듬었다. 마르야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답답해진 로난이 시선을 올렸다. 네 사람의 이름이 밤하늘 위에 떠올라 있었다.

[무예과 수석 / 슐리펜 시니반 데 그랑시아]

[마법과 수석 / 에르제베트 데 아칼루시아]

글씨는 제도 전역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큼직했다.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금색으로 빛나는 수석들의 이름이었다.

‘역시 무예과 수석은 슐리펜이구만. 그런데 에르제베트가 누구더라?’

어쨌든 수석들을 확인한 로난은 보다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차석들의 이름은 수석보다는 조금 검소한 은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무예과 차석 / 로난]

[마법과 차석 / 피온 샬피네]

로난의 입에 물려 있던 담뱃대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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