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제국의 샛별
#17
[무예과 차석 / 로난]
로난의 입에 물려 있던 담뱃대가 떨어졌다. 한순간 시간이 길게 늘어졌다.
광장의 소음이 잦아들고, 은빛으로 타오르는 글씨만이 남아 좁아진 시야의 한구석을 차지했다.
차석.
자신의 이름 앞에서 번쩍이는 글씨는 틀림없이 그렇게 적혀 있었다.
차석? 차석이 무슨 뜻이더라? 나쁜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과일 이름이었나?
그때 어디선가 아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 로난! 차, 차, 차석이야!”
“응?”
“위에서 두 번째라고! 네가 해냈어!”
맞아, 그런 뜻이었지.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로난이 고개를 내렸다.
거의 울면서 말하고 있는 아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한달음에 달려온 마르야가 로난의 목에 매달렸다.
“내가 될 거라고 했지? 응?”
마르야는 로난의 목을 끌어안은 채 놓아 주지 않았다. 로난은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자신의 이름 옆에 적혀 있는 조금 작은 글씨를 바라보았다.
[무예과 차석 / 로난: 실기 1위, 필기 5712위]
“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5712등이라니, 등수로 치기에도 아까운 숫자였다. 도대체 실기에 몇 점을 퍼줬길래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건지 궁금했다.
“사람 볼 줄 아는구만.”
하지만 아무래도 알 바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자신이 위에서 두 번째라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장학금을 비롯한 각종 특혜가 있을 터였다.
[무예과 수석 / 슐리펜 시니반 데 그랑시아: 실기 2위, 필기 1위(3)]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다면 실기에서 슐리펜의 엉덩이를 따 버렸다는 것 정도일까?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로난이 혀를 찼다.
‘이거 잘못하면 또 귀찮아지겠는데.’
슐리펜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그 특유의 호승심이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 자신의 위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못 견디는 인간상의 정점에 있는 작자였으니.
“뭐, 그럼···이제 갈까?”
로난이 친구들과 함께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불현듯 정체를 알 수 없는 오한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음···!”
서늘한 겨울바람이 온몸을 헤집고 지나가는 듯한, 불쾌하면서도 익숙한 감각이었다. 바람이 부는 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 했다.
“에이···설마···.”
침을 삼킨 로난이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머지않아 한 곳에 고정되었다.
웬 푸른 제복을 입은 소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로난은 눈을 질끈 감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아는 얼굴이었다. 십 미터가 넘는 거리였음에도 확연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소년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와···저 사람좀 봐. 얼굴이 무슨···어?!”
“제, 제국의 샛별이다.”
“만나뵈서 영광입니다!”
이윽고 소년이 로난 앞에 멈춰섰다. 셋 중에서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마르야였다. 소년의 얼굴을 올려본 그녀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슈, 슐리펜?!”
키는 크고 용모는 수려했다. 암청색을 띄는 머리카락은 심해처럼 짙었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확실히 앳되진 감이 있었지만 빙하에서 썰어낸 것 같은 차가운 인상은 변함이 없었다.
훗날 제국을 넘어 대륙 최강의 검사가 되는 소년이었다. 슐리펜이 낮게 읊조렸다.
“네가 로난이군.”
“응? 아닌데?”
로난이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피했다. 아셀과 마르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슐리펜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파였다.
“왜 거짓말을 하는 거지?”
“거짓말이라니 인마, 내가 로난이라는 증거 있어? 그리고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엉?”
“···증거라.”
슐리펜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총 두 가지의 증거를 제시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우연히 그들의 대화를 들은 것, 두 번째는 로난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오러 개화. 개안(開眼)의 경지에 이른 그에게는 보였다. 아셀의 심장을 휘감고 있는 고리와 마르야의 단전에서 커져 가는 덩어리가. 로난의 가슴 속에서 맥박치는 불가해한 마나가.
하지만 슐리펜은 둘 중 어느 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이런 니미!”
별안간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칼자루를 쥐었다. 한순간 슐리펜의 손이 사라지나 싶더니 허공에서 불씨가 튀어올랐다.
캉! 뒤늦은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꺄아아악!”
“싸, 싸움이다!”
“로난!!”
주변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사람들은 로난과 슐리펜이 검을 맞대고 있기 전까지의 과정을 보지 못했다.
흑철과 미스릴. 맞붙은 두 개의 검신이 허공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슐리펜이 낮게 읊조렸다.
“이게 증거다.”
“뭐?”
“네가 실기 수석이 아니었다면 받아치지 못했겠지. 나는 네가 무슨 기술을 보여줬는지 알고 싶다.”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로난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집착도 이 정도면 도를 넘었다.
과거 전장에서 만났을때도 보통 인간은 아니다 싶었는데, 그게 철이 들면서 나아진 것일 줄이야.
“오냐, 보여주마!”
어쨌든 이런 도발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으면 불구 아니면 병신이었다.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비적이던 칼날이 떼어짐과 동시에 세 번의 검격이 슐리펜을 향해 쏘아졌다. 줄곧 잔잔하던 슐리펜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당황이 스쳤다.
“으음!”
캉캉캉! 허공에서 세 번의 불꽃이 간격 없이 피어올랐다. 칼날을 털어 내듯 거둔 로난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이제 됐냐?”
“···확실히 실기 수석이 될 만 하군.”
보통의 검이었다면 부서지고도 남을 강격이었지만, 미스릴로 이루어진 슐리펜의 검신은 완고하게 충격을 버텨냈다. 로난이 말을 이었다.
“그래, 새끼야. 맨날 1등만 했으면 2등으로도 만족할 줄 알아야지. 안 그래?”
잘려나간 자신의 옷깃을 본 슐리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칫하면 당할 수도 있는 가공할 쾌검이었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쉰 로난이 납도하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를 제쳤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뭐?”
“숨기고 있는 것을 마저 보여라.”
갑자기 정색한 슐리펜이 검을 내질렀다. 로난은 황급히 검을 들어올리며 공격을 받아쳤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적당히 해 이 자식아! 도대체 뭐가 불만인데!”
슐리펜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 초만에 열 번이 넘는 공방이 오갔다. 맞받아친 베기가 불꽃을 피우고, 흘려넘긴 찌르기가 뺨을 스쳤다.
로난은 더 빨리 자리를 뜨지 않은 자신을 원망했다. 이 고상한 정신병자는 틀림없이 자신의 궁금증이 해결될 때 까지 까지 이 난리를 떨 터였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로난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 새끼 오러까지 발동하는 거 아냐?’
로난은 대부분의 오러 사용자를 무시했다. 쓸데없이 화려하기만 하고, 실전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슐리펜의 경우는 달랐다. 폭풍검이라 불리우는 그의 오러는 전략 병기 취급을 받는 희대의 사기 기술이었다.
물론 과거로 돌아온 터라 당시의 위력에는 한참 미치지 못할 것이고, 미치지 않고서야 인파 한가운데서 오러를 발동하겠냐만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서둘러 상황을 끝내고 빠져나와야 했다.
뭐 좋은 수가 없을까 고민하던 와중, 한 줌의 섬광이 머리 속에 번득였다.
‘이게 있었네.’
로난은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슐리펜의 검을 바라보았다. 틀림없이 마나를 머금은 미스릴이었다. 빠르게 안주머니를 뒤적이던 로난의 오른손에 둥그런 덩어리 하나가 쥐어져 나왔다.
그는 왼손을 등 뒤로 돌린 채 검지와 중지로 브이자를 해 보였다. 줄곧 뒤에서 심장을 졸이고 있던 아셀이 눈을 크게 떴다. 루나 고블린 사건 이후 정해 놓은 그와 로난의 수신호였다.
뜻은 [튀어]
“마, 마르야. 가자.”
“어? 어어? 어디 가?!”
아셀은 마르야의 손을 붙잡은 채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재차 슐리펜의 검격이 쏘아지는 순간이었다.
로난이 칼을 내림과 동시에 재빠르게 오른팔을 치켜들었다.
“멈춰!”
“무슨···!”
슐리펜이 황급히 팔에 힘을 주며 검을 멈추려 했지만, 검신은 이미 로난의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미스릴로 이루어진 칼날이 로난의 손바닥을 찍었다.
-챠아아아아앙-!!!
기괴한 금속음이 대광장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크으으윽?!”
생전 들어보지 못한 괴성에 군중이 귀를 틀어막았다. 미스릴 고유의 특성인 공명음이었다.
지진파를 연상케 하는 충격은 손을 넘어 전신으로 퍼졌다. 슐리펜은 그만 칼자루를 놓치고 말았다.
빈틈을 포착한 로난이 그의 얼굴에 박치기를 날렸다. 콰직! 슐리펜이 코를 쥐어싼 채 나동그라졌다.
“윽!”
“역시 환상종이야. 태어나기 전부터 효도를 하네.”
로난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손에 쥐어져 있는 마르페즈의 알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알껍질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슐리펜의 검이 미스릴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로난은 알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일어서려 하는 슐리펜을 향해 외쳤다.
“입학실 날까지 머리 좀 식혀라 새끼야! 남자라면 결과를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하는 거야!”
“크윽···거기 멈춰라···!”
그대로 등을 돌린 로난이 인파 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졌다. 그가 자리를 뜬지 머지않아 중갑을 입은 수위들이 달려왔다.
슐리펜을 알아본 수위들이 다급하게 그를 부축했다.
“슈, 슐리펜 님! 괜찮으십니까? 방금 그 소리는?!”
슐리펜은 피가 줄줄 흐르는 코를 쥐어싼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나를 확장해 로난 일행의 마나를 추적하려 했지만, 이미 거리가 멀어졌는지 감지할 수가 없었다.
“···예. 괜찮습니다.”
“누가 감히 이런 짓을 한 겁니까? 인상착의를 말씀해 주시면···!”
“지금 저는 엄연히 응시생 신분입니다.”
말뜻을 단번에 알아듣지 못한 수위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은 몇 초가 지나서야 그것이 말을 높이지 말라는 뜻이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핫···! 넵! 알겠습니···아니, 알겠네.”
“그리고 별 일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벼운 대련을 청했고, 저자는 응했을 뿐입니다.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그래도···.”
“그랑시아 가의 이름을 걸고 보장하겠습니다.”
그랑시아 공작가의 후계자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수위들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의례적인 인사를 한 뒤 물러갔다.
슐리펜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을 집어들었다. 검신을 살피던 그의 눈이 커졌다.
아주 미세하긴 하지만, 검날에 실금이 가 있었다.
‘도대체···뭐지?’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미스릴로 이루어진 검날을 나가게 한 구체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줄곧 로난의 것이라고 생각하던 불가해한 마나가 사실 그 구체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본인에게서는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슐리펜은 로난과 나눴던 공방을 떠올렸다. 오러까지 발동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한 마나를 검에 실은 채 전투에 임했다.
틀림없이 로난도 그런 줄만 알았는데···.
‘아냐, 그럴 리가 없다.’
슐리펜은 잠시 로난이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라리 극히 희귀하게 나타난다는 은밀한 마나. 소위 말하는 그림자의 마나를 타고났을 것이라는 가설이 더 그럴싸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설명이 됐다.
“······젠장.”
코피가 멎었다. 이성이 돌아오자 바람이 차게 느껴졌다.
결과에 납득할 줄도 알라는 로난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실기에서 차석을 했다는 충격 탓에 지나치게 흥분해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슐리펜이 고개를 들었다. 합격자들의 이름은 여전히 별과 함께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 아래에서 타오르는 두 글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로난.”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필레온 아카데미. 검성이 되기까지 단순히 거쳐가는 과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꼭 그러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슐리펜은 저잣거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평소와 다른 속도로 뛰는 것이 느껴졌다. 어린 천재는 그 감정의 이름이 기대감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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