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피와 알(4)
#21
“제, 젠장! 저게 도대체 뭐야···!”
가죽 모자를 쓴 소년이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탓에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난생 처음 보는 괴생명체가 날갯짓하며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빠야?”
“괴, 괴물···!”
길고 검은 네 장의 날개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는 피에 젖은 루비처럼 번들거렸다. 긴 꼬리가 바닥을 스칠 때마다 소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동화에 나오는 악마나 드래곤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천천히 뒷걸음질치던 소년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벌을 받은 거야···! 나쁜 짓을 해서 악마가 나를 찾아온 거야···!’
아무리 돈이 부족해도 밀렵꾼 일은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소년은 밀렵 조직 카리볼로의 드미레 지부에 소속된 말단이었다. 엊그제 지맥으로 사냥을 나간 대원들의 보급품을 전달하는 것이 그의 첫 임무였다.
헌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여덟 구의 시체였다. 머리가 없는.
핏기가 완벽하게 사라진 주검들은 서리가 내린 콩밭처럼 칙칙한 회색을 띠었다. 잘려나간 머리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사냥개들로 모자라 대장님까지 당하다니···.’
늑대 베움 역시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소드 익스퍼트 경지에 이른 그는 환상종을 두 자릿수로 잡아들인 베테랑이었다.
서둘러 지부로 돌아가 상황을 보고해야 했다. 소년이 막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콰아앙!
“끄아아악!”
어디선가 날아온 괴생물체가 소년이 몸을 감췄던 나무를 들이받았다. 잔가지와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윽고 머리를 털어낸 생물이 소년에게 다가왔다.
“뺘.”
‘뭐, 뭐라도 해야 돼!’
소년은 황급히 허리춤의 단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칼자루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이었다. 가만히 허공에서 홰를 치고 있던 괴물의 눈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뺘아아아···!”
“어?”
별안간 소년의 세상이 붉게 변했다. 소매로 눈을 문지른 소년이 헛숨을 들이켰다. 지저분한 소맷단에 붉은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히이익···!”
넘친 피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무리 눈을 닦아도 피는 멈추지 않았다. 소년은 머지않아 눈뿐만이 아니라 코와 입, 귀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사, 살려줘!!”
몸이 빠르게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에는 여전히 힘이 돌아오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자세를 뒤집은 소년이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 다시는 이런 짓 안 할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하지만 소년의 절규에도 무색하게 두 번째 악몽이 펼쳐졌다. 갑자기 그의 몸이 괴물이 있는 방향으로 끌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 안돼!! 살려줘어어어!”
급한 대로 수풀을 움켜쥐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풀잎이 허무하게 뜯겨나감과 동시에 소년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뺘하하하. 피가 고여 먹먹한 귓바퀴 너머로 괴물이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 웬 검은 머리의 소년이 수풀을 헤치며 튀어나왔다.
“얌마! 멈춰!”
로난이 수직으로 검을 휘둘렀다. 소년과 시타의 정확히 중간 지점이었다. 털썩! 소년을 끌고 가던 마나가 끊어지며 그의 몸뚱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어윽!”
“뺘아아앙?!”
시타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찌나 놀랬는지 새카만 동공이 거의 두 배로 커졌다. 소년은 바닥을 나뒹굴며 목구멍에서 울렁이던 핏덩이를 게워내고 있었다.
“우웩! 우웨에엑!”
“으 씨발. 얼굴이 왜 이렇게 됐어? 시타 너가 한 거냐?”
소년의 얼굴은 이목구비에서 나온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질색하며 소년을 바라보던 로난이 눈썹을 치켜 떴다.
“엥? 잠깐만.”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로난은 아직도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시타의 날개를 콕콕 찔렀다.
“시타, 이 자식 얼굴 좀 닦아 봐.”
“빠야?”
로난이 세수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눈을 깜빡이던 시타가 마법을 사용했다. 소년의 눈에서 다시 피가 왈칵왈칵 솟아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얌마!”
재차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빠르게 마나를 끊어낸 로난이 시타의 코에 딱밤을 날렸다.
“뿍!”
“너 무슨 소린지 다 알아 들으면서 그럴래? 얼굴에 묻은 피만 닦아 달라니까.”
“뺘우우웅···.”
기가 한풀 꺾인 시타가 다시 마법을 사용했다. 소년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피가 한곳에 모이더니 방울의 형태로 떨어져 나왔다. 얼굴을 만져 본 소년이 기겁하며 일어섰다.
“이, 이건···?!”
“역시 맞구만. 얼굴은 거의 안 변했네.”
“그, 그쪽이 저를 구해 주신 건가요?”
로난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아니었다. 피가 씻겨나간 소년의 얼굴은 자신이 알던 사람과 똑 닮아 있었다.
로난은 담뱃대를 꺼내물었다. 소년은 허리를 거의 반으로 접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허억···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덕분에 살았습니다!”
“뭐 이런 걸로. 밀렵질은 할 만 하냐 발루스?”
“···예?”
발루스가 얼어붙었다. 로난은 흥미롭다는 듯이 그의 행색을 살피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주 끝내주지? 손에 피 좀 묻히면 돈을 쓸어담는 직업인데, 그게 또 사람 피가 아니니까 죄책감도 안 느껴지고 말이야.”
“다, 당신이 제 이름을 어떻게···.”
발루스는 로난의 징벌병 동기였다. 로난에게 짐승을 죽이는 화살을 자랑하고, 카리볼로의 조직 체계를 쉴 새 없이 떠들어댄 작자가 바로 발루스였다.
당시에는 뿌리부터 글러 먹은 놈이라 생각했는데, 어째 소년기의 발루스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생김새도 태도도 그렇고 어딜 봐도 막 일을 시작한 풋내기의 냄새가 풀풀 풍겼다.
전신을 뒤덮다시피 했던 문신도 아직 새겨지기 전이었고, 말투가 천박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흔들리는 눈빛에는 아직 죄책감이 남아 아롱이고 있었다.
어쩌면 갱생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로난이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그건 알 거 없어 새끼야. 너는 선택해야 해.”
“선택···?”
“그래 인마. 조직의 배신자가 되던지, 아니면 하얗게 말라붙은 박제가 되던지. 딱 보니까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지?”
“바, 박제?! 그, 그것보다 그걸 어떻게···.”
그때 허공에서 홰를 치던 괴물, 시타가 로난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뺨에 얼굴을 연신 부벼 대는 것이 어지간히도 사이가 좋아 보였다.
둘이 한 패였다는 것을 깨달은 발루스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도, 도대체 당신 뭐야? 그 괴물은 또 뭐고···? 설마 저 사람들도!”
“맞아 발루스. 머리는 내가 잘랐고, 피는 이 털뭉치가 뺐지.”
로난은 검지를 뻗어 발루스를 가리켰다. 고개를 돌린 시타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코피 한 줄기가 발루스의 인중을 타고 흘러내렸다.
“피를 어떻게 뽑았는지 설명은 필요 없겠지?”
“히익···!”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고.”
로난이 연기를 내뿜었다. 주머니를 뒤적이던 그가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카리볼로의 사냥개가 피로 그린 지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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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은 밤까지 뒷정리를 한 뒤 페나르도 샘을 떠났다. 짐이 많아진 탓에 올 때보다 훨씬 큰 뗏목을 만들어야 했다. 하늘에는 선혈처럼 붉은 달이 떠올라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소득이 짭잘하네.”
로난은 발루스를 죽이지 않았다. 아직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카리볼로를 대륙에서 뿌리 뽑는데 크게 이바지해 줄 인재였다.
카리볼로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뜯어낸 로난은 그에게 피의 맹세를 받아냈다.
- 으흐흐! 이 악마의 전령이 네 피를 마신 이상, 너는 세상 어디에서도 모습을 숨기지 못해!
-허어억···! 맹세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맹세를 지키겠습니다!
보름에 한 번씩 조직의 정보나 근황을 알릴 것. 모두를 배신하고 조직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로난 일행에 대한 정보를 입에 담지 않겠다는 맹세였다.
피의 맹세. 어기는 순간 악마에게 영혼을 먹히는 금단의 주술.
물론 막 지어낸 거짓말에 불과했지만, 당시 발루스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맹세가 깨질 염려는 없어 보였다.
시타에게 호되게 당한 발루스는 시타를 악마의 전령으로, 로난을 사악한 흑마법사 정도로 믿고 있었다.
“너 제법 쓸만한데.”
로난은 달을 올려보고 있는 시타의 목을 살살 긁어 주었다. 시타는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듯 바닥을 뒹굴며 갸르릉 소리를 냈다.
“귀엽다아···.”
아셀은 양손으로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저 폭신한 깃털에 얼굴을 파묻고 싶었지만, 당한 게 있던 탓에 시도하기가 쉽지 않았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아셀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로난, 왜 이름을 시타라고 지었어?”
“너는 왜 아셀이냐?”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예전에 같이 다니던 개새끼 이름이야.”
로난은 그 이상의 정보는 말해주지 않았다. 아셀 역시 추가적인 질문은 하지 않았다. 단지 의문이 들 뿐이었다. 로난이 개를 기른 적이 있던가?
로난은 어느새 잠든 시타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짐승 같은 건 다시는 안 기르려고 했는데···.”
추억보다는 무겁고 후회라기에는 즐거운 기억이었다. 방랑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을 계기로 일 년을 함께해온 동반자는 밀렵꾼의 손에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에이, 모르겠다.”
로난이 드러누웠다. 뺨을 간질이는 시타의 깃털은 놀라우리만치 부드러웠다. 붉은 달빛, 물 위로 서서히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이번 모험의 막을 내리고 있었다.
****
두 사람은 꼬박 이틀에 걸쳐 제도로 돌아왔다. 로난은 시타를 보여주기 위해 곧장 바렌 교수를 찾아갔으나, 그는 남부의 밀림으로 출장을 간 상태였다.
“할 말이 많은데 아쉽게 됐네.”
적어도 보름은 걸릴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로난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들은 쪽지 하나를 바렌의 사무실 문 아래로 밀어 넣은 뒤 시장으로 향했다.
물론 현상금을 수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리볼로의 밀렵꾼들이 남기고 간 것들은 모두 짤랑이는 금화가 되어 소년들의 주머니를 채워 주었다. 장비, 장신구, 핏기가 싹 빠진 머리통까지.
“세상에, 이렇게 마나 순도가 높은 물이라니···! 이런 걸 도대체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비밀. 또 가져올 수도 있으니까 잘 좀 쳐 줘요 두온.”
두온은 마나 순도를 측정하는 와중에도 연신 감탄사를 흘렸다. 로난은 샘에서 길어 온 물을 카라벨 상단과 연금술 공방에 판매했다.
굉장히 마나의 순도가 높은 물인지라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우리 딸애가 손님들 이름으로 아예 노래를 부르더군요. 이번에 자기도 따라가고 싶었는데 못 갔다며 어찌나 칭얼거리던지···.”
“그러고 보니 안 보이네. 마르야는요?”
“아, 잠시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입학 전에 작별인사를 하고 온다는군요.”
하긴 일단 입학을 하고 나면 방학 기간이 아닌 이상 고향에 돌아갈 일이 없었다. 필레온은 철저한 기숙사 제도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누이를 본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합격 통지는 편지로 보내 놨지만,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하네요.”
“허허, 그렇죠. 저도 상단 일만 아니었다면 한번 들렀을 텐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나저나 그 동물은 도대체···?”
두온의 시선은 아까부터 로난이 아닌, 그의 어깨에 올라타 있는 시타를 향해 있었다. 그래도 한때 애완동물 사업까지 했었는데 도저히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아, 저번에 그 알에서 나온 애에요. 정체는 저도 몰라요.”
“알···? 아아, 저번에 그 엄청나게 단단했던 덩어리 말씀이군요!”
두온이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미스릴보다 단단한 알껍데기.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기억이었다.
시타는 연신 고개를 갸웃이며 지나가는 사람들과 가판대에 늘어선 물건을 구경하고 있었다. 특이한 생김새와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호, 혹시 만져봐도 될까요?”
“그럼요. 그런데 아마 싫어할 걸요.”
“후후, 다들 조심성이 없어서 그렇지요. 이래 봬도 제가 동물은 제법 잘 다룬답니다.”
두온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새카맣고 풍성한 깃털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폭신해 보였다. 그의 손이 시타에게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캬앗!”
“어억!”
위협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네 장의 날개가 확 펼쳐졌다. 거의 나동그라질 뻔한 두온이 가판대를 짚고 일어섰다. 로난은 시타의 목을 살살 긁으며 말했다.
“내 말이 맞죠. 보기보다 낯을 가리더라고요.”
“뺘아~!”
로난이 목을 긁어주자 시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풀며 갸르릉거렸다. 시타는 로난과 아셀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경계했다.
“이거 참, 면목이 없군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럼 갈게요.”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참, 차석이랑 필기 1위 축하드립니다. 두 분 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고마워요. 또 봐요.”
손을 한 번 흔든 로난이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배낭이 흔들리며 동전 짤랑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돈을 좀 번 두 사람은 예전에 눈여겨보던 식당으로 향했다. 라니얼 호수에서만 잡히는 2m짜리 장어를 통째로 굽는 곳이었다. 한 입을 먹어본 아셀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마, 맛있다···!”
“삐야!”
장어 특유의 쫄깃한 육질과 절묘한 소금간이 예술이었다. 제도에서 와 본 식당 중 가장 맛있는 것 같았다. 시타도 행복에 겨운 울음소리로 지저귀며 자기 몫의 고깃덩이를 열심히 먹어치웠다.
“아셀. 너는 이 돈으로 뭐 할거냐.”
“나? 나는···으음···아마 대부분 마법서나 실험 재료를 사는 데 쓰지 않을까? 워낙에 돈이 많이 드는 학문이니까.”
“그러냐. 대견하기도 해라.”
“로난 너는?”
로난이 침음을 흘렸다. 원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모은 거였는데, 차석을 해 버리는 탓에 돈을 쓸 곳이 없어지고 말았다. 전액 장학금도 모자라 품위 유지비라는 명목으로 월마다 지원금까지 받게 되었으니.
복에 겨운 고민이었지만 어쨌든 고민은 고민이었다.
“글쎄다.”
로난은 장어구이를 한 입 물어뜯었다. 맛있었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갑자기 님버튼에 있을 누이 생각이 났다.
자신이 산해진미를 즐기는 동안, 이릴은 오늘도 집에 덩그러니 남아서 감자 스튜나 먹고 있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누나는 평생을 그 시골짝에서 살았지.’
로난은 두 번의 삶을 살았지만, 도시의 생활을 제대로 영위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모든 게 다르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님버튼에서의 삶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내 똥기저귀를 손수 갈아 가며 키워냈고 말이야.’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러고 보니 동전 몇 닢만 툭 던지고 나왔을 뿐, 무언가를 해 준 적이 없었다. 이릴은 아마 이런 요리가,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터였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아셀. 우리 입학식 날에 참관이 가능했던가?”
“응? 아···응, 그럴 거야. 보호자나 가족 한정으로 가능한 걸로 알고 있어.”
“그렇단 말이지.”
로난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심각해진 표정을 본 아셀이 포크를 내렸다. 시타가 짭짭거리며 살을 뜯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때, 주방 쪽에서 외치는 듯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펜시아 가극단에서 마차를 좀 보내달랍니다!”
“몇 명이래?”
“스물 두 명입니다! 마르바스고, 이틀 뒤 돌아가는 마차까지 잡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확인했네. 내일 스물 두 명, 위치는 마르바스.”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대화였다. 아무래도 손님이 원한다면 마차를 보내주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로난의 표정이 밝아졌다. 갈 수 없다면 그냥 데려오면 되는 거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로난이 직원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저기요.”
“앗, 네 손님. 무슨 일이시죠?”
“혹시 님버튼까지도 마차가 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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