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3화 (23/333)

23. 누이를 위하여(2)

#23

슐리펜은 이후로도 한참이나 이릴과 대화를 나누었다. 정확히는 이릴이 일방적으로 말을 한 것에 가까웠지만.

“그런데 우리 로난이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네요. 앗! 혹시 그쪽도 이번에 필레온에 입학하시나요?”

“아. 으음. 그렇소만.”

“와아!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제 동생이랑 친하게 지내 주세요!”

“어. 어어. 음.”

로난은 측은한 눈빛으로 슐리펜을 바라보았다. 슐리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이제 말이라기보다는 반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야.” “윽.” “우왓!” 같은 것들.

‘사랑이란 참 무섭군.’

로난은 치매 환자가 된 제국의 샛별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에는 감히 누이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었다는 점에서 화가 치밀었지만, 이제는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때 이릴이 슐리펜의 칼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와! 그런데 칼이 엄청 멋있어요! 혹시 칼에 대해서 잘 아시나요? 그럼 혹시 괜찮은 가게를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저희 동생이 지금 마침 칼을 사야 하거든요.”

“누나, 제발.”

로난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릴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슐리펜을 올려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슐리펜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칼.”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었다. 제복의 주머니를 차례대로 뒤적이던 슐리펜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백금색으로 번쩍이는 금속 패였다.

슐리펜이 금속패를 이릴에게 내밀었다.

“우선. 받으시오. 내 실책에 대한···보상이오.”

“잘못은 나한테 했는데 왜 누나한테 보상을 주냐?”

“와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게 뭐죠?”

이릴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금속패를 만지작거렸다. 패의 앞면에는 드래곤을 밟고 있는 기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제국을 양분하는 대가문 중 하나인 그랑시아 가의 문장이었다.

로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금속패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귀족가에서 종종 사용하는 일종의 외상 증서였다. 우선 물건을 받고 차후 가문에서 대금을 지불할 것을 증명하는.

명망 높은 가문일수록 그 가치나 효용성이 크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랑시아 가의 어음패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상 제국령 전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일회성 자유 교환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흑철검을 망가뜨린 보상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과했다.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미친놈아···너 이게 뭔지는 알고 주는 거야?”

하지만 슐리펜은 로난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가게는. 공방 거리의 서쪽 끝에···500년이 넘도록 그랑시아 가의 보검을 만들어 온 대장간이 있소. 원래는 출입이 어렵지만···그걸 보여주면 들어갈 수 있을 것이오.”

“우와! 정말요? 그런 곳을 알려주셔도 되는 건가요?”

“그···지금은 장인들이 휴가를 갔으니, 며칠 뒤에나 찾아야 할 것이오.”

“너 진짜 제정신 아니지?”

“동생 분의···검이 망가진 것은···모두 내 실책이오. 부디···좋은 검을 만들기를, 아니. 구하기를 빌겠소.”

슐리펜이 몸을 돌리려는 차였다. 이릴이 다시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진짜진짜 고마워요! 덕분에 좋은 검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

로난은 그때 슐리펜이 지은 표정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몽둥이로 머리라도 맞은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자리를 떴다.

이릴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무섭게 생겨서 걱정했는데, 엄청 좋은 사람이었네. 다행이다!”

로난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릴은 슐리펜에게 받은 패를 로난의 손에 쥐어 주었다.

“자! 로난. 누나는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알아서 잘 쓸 수 있지?”

“···아마도.”

로난은 패를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원래 장비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거저 준다는 것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그랑시아 가의 무기를 만들어 온 비밀 대장간이라니. 로난이 혀를 내둘렀다.

“역시 사랑은 무섭군···.”

어차피 휴가 기간이라 했으니 대장간은 입학한 이후에나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로난과 이릴은 다시 번화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

로난 남매는 이번에는 제도에서 가장 큰 헤어 살롱으로 이동했다. 로난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원래는 귀족들도 예약하고 최소 세 달은 기다려야 할 만큼 명성이 높은 장소였다.

“어서 오세요. 예약하신 분 성함이···.”

“응? 왜 그러세요?”

“워, 원장님!!”

헌데 어째서인지 이릴의 얼굴을 보자마자 점원이 어디론가 달려갔다. 머지않아 셔츠 앞주머니에 가위를 꽂고 있는 노신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샬롱을 총괄하는 원장이었다.

“허어어···이건 정말이지···.”

원장 역시 이릴을 보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이릴의 얼굴과 머리칼을 한참이나 번갈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혹시 제게 아가씨의 아름다움을 세공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미모를 세···공?”

이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난은 원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머리를 잘라도 되냐고 묻는 거야. 거 늙은이가 알아듣게 말할 것이지···.”

“소, 송구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아하, 그럼요! 예쁘게 해 주세요!”

이릴이 의자에 앉았다. 원장은 심호흡을 한 뒤 가위를 들었다. 40년이 넘도록 귀족 영애와 귀부인들의 머리를 다듬어온 그였지만, 이번만큼 긴장되는 순간은 없었다.

물론 난생 처음으로 이런 곳에 와 본 이릴은 그저 기대감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녀가 로난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 로난은 안 잘라?”

“난 됐어.”

“···설마 그 머리로 입학하려는 건 아니지?”

“맞는데. 괜찮지 않아?”

로난이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어설프게 빗어넘긴 머리카락이 너저분하게 흔들렸다. 이릴의 얼굴이 동생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굳었다.

“절대 안 돼! 저기요! 제 동생도 머리 자를게요!”

이릴이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그녀는 로난의 소매를 끌어당겨서 강제로 의자에 앉혀 놓았다. 몇 번 씩 거절했지만, 누이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 자를게. 자른다고.”

“저···그럼 손님?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알아서 잘라 주세요. 깔끔하게.”

“아, 알아서···.”

미용사의 표정이 한순간 굳었다. 하지만 그는 곧 능숙하게 영업용 미소를 끄집어냈다. 이윽고 가위질이 시작되었다.

‘그러고 보니 누나 외의 사람이 머리를 잘라주는 건 처음이군.’

찰각찰각. 가위질 소리가 들릴 때마다 억센 머리카락이 숭텅숭텅 잘려 나갔다. 로난의 고개가 앞뒤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쩐지···졸음이···몰려왔다.

.

.

.

몽롱한 의식 속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오오, 이건 정말···.”

“머리카락이 확실히 사람의 인상을 좌우하긴 하는군요. 변신 수준인데요.”

“앗, 일어나셨나요 손님?”

로난이 눈을 떴다.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그는 아직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에서 이릴이 양손을 꼭 모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와아아···.”

“뭐야, 벌써 다 잘랐어?”

다소 과하게 풍성하던 백은발은 도시 여성 느낌이 나는 세련된 형태로 다듬어져 있었다. 부피는 두 배 가량이 줄었지만, 아름다움은 열 배 이상이 되었다.

“···어울리네. 그런데 다들 왜 나를 쳐다보고 있어?”

헌데 뭔가 이상했다. 가히 폭력적이라 할 수 있는 이릴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주변인들의 시선은 모두 로난을 향해 있었다. 이릴이 감격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동생이 이렇게 잘생겼었구나···.”

“뭐?”

로난이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위아래로 기다란 거울 속에서 웬 재수없게 생긴 놈 하나가 의자에 앉아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로난은 손을 들어 머리를 만졌다. 증축된 새집 같던 머리칼은 단정한 올백머리가 되어 있었다. 마치 바렌 교수의 갈기처럼 단정하면서도 야성적인 인상을 풍겼다.

“···이게 나야?”

이마 위로 넘어간 흑발은 평소처럼 부스스하지 않고 윤기가 흘렀다. 오롯이 드러난 눈동자가 반항적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앞섶에 가위를 꽂은 원장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오늘은 제 미용사 인생 최고의 날이군요. 한 개도 아닌, 두 개의 원석을 세공하다니. 그것도 최고로 반짝이는 보석들의 원석을 말입니다.”

그는 중간부터는 자신이 로난의 머리를 잘랐다고 말했다. 로난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젠장, 영 어색하네. 얼마예요?”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이런 멋진 경험을 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

“예?”

“부디 다음번에도 찾아와 주시길 바랍니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원장은 로난과 이릴을 정중하게 배웅했다. 밖으로 나오자 이릴에게만 쏠리던 시선이 분산되는 것이 느껴졌다. 원래는 남녀 모두가 이릴만을 바라보았다면, 지금은 남자는 이릴을, 여인들은 로난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영 부담스러운데, 누나는 이걸 어떻게 버텼어?”

“웅? 뭐가?”

“···아니야.”

하긴 이릴은 원체 아름다웠으니 선망의 시선 따위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익숙해졌을 터였다. 로난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다시 기를 때까지는 귀찮아지겠네.’

이후로도 두 남매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제도의 유명지를 관광하다가 저녁을 먹고, 해가 질 무렵에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의 숙소는 탑을 통째로 여관으로 개조한, 제도에서 손꼽히는 여관 [노을지기] 였다.

“자, 이 공이 어디로 갔을까? 오른쪽? 왼쪽?”

“뺘아!”

시타는 먼저 숙소로 돌아와 아셀과 놀고 있었다. 머리를 자른 로난이 들어오자 한 명과 한 마리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아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로, 로난···맞지?”

“그래. 이상하냐?”

“아, 아니···! 엄청 잘 어울려. 엄청.”

“뺘아아아!”

확 날아온 시타가 로난의 뺨에 얼굴을 부볐다. 평소보다 훨씬 애정 공세가 심한 것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때 이릴이 무언가에 홀린 듯이 창가로 걸어갔다.

“우와.”

해가 지고 있었다. 통유리 구조로 되어 있는 노을지기의 특실에서는 서부 대로를 한 눈에 내려볼 수 있었다.

새하얀 포석으로 뒤덮인 대로가 장미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노을 속을 서성이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포말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창밖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너무너무 예뻐. 세상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게 많았구나.”

로난은 말없이 입술을 비틀었다. 누이에게 받은 은혜를 아주 조금이나마 갚은 기분이 들었다.

세 사람은 밤늦게까지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로난은 시타를 포함한 모두가 잠들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입학식 전날 밤은 그렇게 표표히 흘러갔다.

****

입학식 날이 밝았다.

로난과 아셀은 아침식사를 마친 뒤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마법과는 망토가 달린 검은색 로브, 무예과는 흰 셔츠와 검은 슬랙스를 밑바탕으로 흑청색 블레이저를 입는 것이 기본이었다.

무예과의 경우는 넥타이의 색으로 학년을 구분했는데, 1학년인 로난은 붉은색 넥타이를 매야 했다. 이릴은 박수까지 쳐 가며 행복한 탄성을 내질렀다.

“꺅! 두 사람 다 너무 잘 어울린다!”

“답답해.”

로난이 맨 윗 단추를 풀었다. 일행은 곧장 필레온으로 이동했다.

방학이 끝난 필레온 아카데미는 평소와 달리 엄중하게 출입을 통제했다. 갑옷을 입은 수위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원을 빠뜨리지 않고 확인했다.

“음? 자네···.”

“예?”

로난을 알아본 수위가 말을 걸었다.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그때 슐리펜과 칼을 맞댄 친구군. 잘 지냈나?”

“뭐, 나름대로요.”

“보니까 실기 수석이던데, 도대체 무슨 수로 제국의 샛별을 꺾었는지 궁금하군. 가벼운 인사를 기대하겠네.”

"가벼운 인사? 그게 뭔데요?”

영문 모를 소리였다. 로난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뒤 부지 안쪽으로 이동했다. 입시날과는 달리 한산해진 거리가 눈에 띄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필레온 아카데미의 현 교장 크라바 크라티르입니다.”

입학식은 합격 결과를 발표했던 대광장에서 진행되었다. 이릴을 비롯한 참관인들은 광장 테두리에 세워진 임시 객석에 앉아 입학식을 구경했다.

연단에 올라 연설을 하는 크라티르의 뒤쪽으로는 익숙한 면면들이 줄지어 포진해 있었다.

전대 검성 나비로제, 귀에 피어싱이 있는 이상한 엘프, 웨어울프 기도칸 등, 로난의 실기시험을 담당했던 면접관들이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여러분들이 대륙을 이끌어 나갈 인재가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비록 필멸의 생을 살아가는 처지라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이룩한 업적은 백 년, 아니 천 년을 넘어서 영원토록 전해질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이제 십 년도 안 남았는데요.’

상투적이지만 굉장히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연설이 이어졌다. 이윽고 크라티르가 연설을 마치자, 객석에서 우레 같은 박수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입학을 환영합니다. 787기 여러분.”

“와아아아아아아!!”

“감사합니다. 그럼 슬슬 다음 단계로 가 볼까요? 여러분의 선배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배들?”

별안간 크라티르가 등을 돌렸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잡아당기는 손짓을 해 보였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뭐야 씨발.”

분명 비어 있었던 대광장 반대편의 풍경이 커튼처럼 뜯겨 나갔다. 마치 천으로 덮여 있던 그림이 드러나는 것처럼, 사람으로 가득 찬 대광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반가워요! 후배님들!”

“무예과면 제발 마상시합 동아리에 들어오자!”

“으하하! 로난이 누구냐? 이번 인사도 기대되는데!”

대광장의 반대편을 메우고 있던 것은 모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었다. 신입생과 대면한 학생들이 하늘이 떠나가라 환호성을 내질렀다.

필레온 786기. 그들보다 1년 앞서 입학한 필레온 아카데미의 선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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