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5화 (25/333)

25. 입학

#25

절단면이 깨끗했다. 브라움이 다리 잘린 대검을 허망하게 쳐다보았다. 로난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냥, 한 번 보고 베꼈어요.”

“한 번 보고···베꼈다고···?”

브라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로난의 말을 들은 사람이 더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무예과의 2학년들, 그중에서도 나비로제의 수업을 듣는 이들은 이미 과할 정도로 놀라고 있었으니까.

“바, 방금···! 신입생이 나비로제님의 회전검을 쓴 거 맞지?”

“감춰둔 수제자라도 되나? 어떻게 저렇게 완벽하게···!”

나비로제 류 3초식, 회전검.

나비로제가 창안한 검술 중에서 결정타 역할을 하는 초식이었다.

무기나 특정 부위만이 아닌 전신에 회전을 줌으로써 위력을 극대화하고, 체격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기술.

균형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위력이 급격하게 반감되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졸업생들도 따라 하기 힘들어하는 고난도의 초식이었다.

헌데 로난은 그 회전검을 한 번 본 것 만으로 완벽하게 구사해 내고 있었다.

남은 인원은 아홉 명. 브라움을 제압한 로난이 다른 학생들에게 달려들었다.

캉!

“이, 이게 무슨!”

칼날이 선회하며 바람을 찢었다. 로난은 수평, 수직, 사선으로 회전하며 선배들의 무기를 향해 검격을 날렸다.

콰작!

“제기랄! 신입생!”

퍼억!

“아, 아끼던 창인데!!”

금속음과 파열음이 연속적으로 울려 퍼졌다. 로난의 몸이 회전할 때마다 손잡이 부러진 병장기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경악에 빠진 교수진들 사이에서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대련을 구경하던 나비로제가 헛웃음 쳤다.

“그때 가져간 건가.”

나비로제는 실기시험 당시 자신이 로난의 목에 검을 겨눴던 일을 떠올렸다. 기술을 훔칠 만한 것은 그때밖에 없었다. 아홉 초식 중에서 3초식인 회전검만 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른 초식도 몇 개 보여줄 걸 그랬군.’

실기시험 이후로 지난 시간은 고작 한 달. 나비로제는 드디어 자신의 후계자를 찾았다는 고양감에 몸을 떨면서도 어딘가 고까운 듯 입술을 비틀었다.

“헌데 시건방진 면모는 여전하구나. 광대라도 되려는 거냐?”

로난은 일부러 속도를 늦춰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실기시험 당시 보여준 것보다 몇 배는 느려진 검격이 눈에 띄었다.

일반인의 눈에 보일 정도로.

“와아아아아! 멋져 로난! 으아앙! 여러분, 저게 제 동생이에요!”

이릴은 눈물까지 흘려 가며 로난의 이름을 외쳤다. 열 명이 넘는 상대를 화려하게 제압하는 로난의 모습은 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릴이 봐도 대단한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로난이 미소 지었다.

‘실력 행사는 이 정도면 됐겠지.’

카창! 로난의 몸이 다시 회전함과 동시에 나스도의 무기가 산산이 조각났다. 나스도는 자루만 남은 레이피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길.”

나스도가 칼자루를 내던졌다. 더는 로난을 제외하고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양측의 객석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묵묵히 회중시계를 꺼내 든 크라티르가 시간을 확인했다.

선배 열 명을 제압하기까지 걸린 시간, 정확히 2분 28초.

“······후우.”

전율이 온몸을 내달렸다. 강바닥에서 황금을 발견한 잠수부의 심정이 이러하리라.

교육자로서의 희열. 크라티르가 경합의 결과를 선언하려는 순간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들.”

납도한 로난이 별안간 허리를 숙였다. 아직 침묵이 팽배한 터라 모두가 로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관객석에 앉아 있던 마르야였다.

“쟤 왜 저래?”

마르야는 마차에 치여 죽은 개라도 본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로난의 평소 행실을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로난은 2학년생 한명 한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제 검이 어디까지 닿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일단 저지르고 봤지만, 다들 실력이 뛰어나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릅니다.”

기가 죽어 있던 2학년들이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융숭한 말투였다. 로난은 자신을 낮추고 선배들의 자존감을 높여 주는 식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제 인간이 풋익어 혈기를 억누르지 못했습니다. 무모하고 무례한 부탁을 들어주신 선배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군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로난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 희석되어 가고 있었다. 로난은 쐐기를 박듯 고개를 숙였다. 정중하되 비굴하지는 않게.

“무예과의 신입생, 로난이었습니다.”

다시 일대가 정적에 빠졌다. 일장 연설을 마친 로난이 슬쩍 고개를 들어 이릴을 바라보았다.

“...로난.”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아 가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난이 옅게 웃었다. 다시 생각해도 완벽한 계획이었다.

로난은 정말로 이릴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방금의 사과 또한 그 과정 중 하나였다. 아이의 교우 관계는 건강과 더불어 부모의 제일가는 관심사니까.

단순히 쌈박질을 잘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다. 주변 사람들하고도 문제 없이 잘 지낼 수 있다는 확신 정도는 심어 주어야 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 걱정 많은 누이가 온연히 마음을 놓을 터였다. 하나뿐인 가족을 먼 제도에 보내고도 언제나처럼 웃으면서 지낼 수 있을 터였다.

그 얼굴을 떠올리면 이까짓 고개 숙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거 봐 누나. 난 잘 할 수 있다니까.

“이런 사랑스러운 후배를!! 내가 오해하다니!!”

그때 정적을 깨며 브라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쿵대며 달려온 브라움이 로난의 팔을 붙잡아서 들어 올렸다.

“그런 말 하지 마라 로난! 너는 정정당당한 실력으로 우리 모두를 이겼다! 나 브라움이 인정한다!!”

“운이 좋았어요.”

“하하하하! 겸손한 천재라니 이거 참 재수 없군!! 교장님!! 승자 선언을 부탁합니다!”

“···아, 그렇죠.”

뒤늦게 정신을 차린 크라티르가 2학년들을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진 면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괜찮은 자식이었잖아?”

“그러게. 제 잘난 맛에 사는 망나니인 줄 알았는데.”

“든든하다! 신입생!”

크라티르는 로난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황혼기에 접어든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참 어른스러운 대처였다. 하마터면 감정의 골을 만들 수도 있던 사건을 멋지게 수습해 냈다.

“그럼 승자를 발표하겠습니다. 이번 ‘가벼운 인사’의 승자는···”

저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크라티르가 미소지었다.

“1학년! 로난 학생입니다!”

“와아아아아아아!!”

정체되어 있던 분위기가 폭발하듯 달아올랐다. 진영을 가리지 않고 우레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크라티르가 허공을 움켜쥔 채 위로 끌어올렸다.

-쿠구구구!

로난의 발밑이 치솟으며 드높은 시상대가 만들어졌다. 순식간에 공중에 다다른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기랄, 뭐야?”

“로난! 로난! 로난! 로난! 로난···!”

단상 위에서는 필레온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가 앞으로 5년간 지내야 할 곳이었다. 먼발치 아래로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로난이 픽 웃었다.

“요란하기도 하지.”

****

이후의 입학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마법과의 간단한 인사는 선배들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신입생 수석인 에르제베트를 제외한 아홉 명 전원이 2학년들에게 패배했다.

“죄, 죄송합니다 에르제베트 님!”

패배한 동기들이 에르제베트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검보랏빛 머리의 소녀는 도도하게 고개를 돌리며 혀를 찰 뿐이었다.

“쯧.”

“부, 부디 용서를!”

그 꼴이 꼭 부잣집에서 기르는 고양이 같았다. 에르제베트는 끝내 동기들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고 객석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기세에 짓눌린 아셀이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저, 저런 사람이 내 동기라니···.”

“그러게. 좆된 거 같은데 어떡하냐 아셀.”

이런저런 절차가 진행되고, 마지막에는 각 과의 수석인 슐리펜과 에르제베트가 선서문을 낭독했다.

배움에 정진이 어쩌구, 미래가 어쩌구 하는 것들. 다시 한 번 크라티르와 교수진들이 축하를 보내는 것으로 입학식이 종료되었다.

“고생했으니 회포를 풀어야겠죠? 연회 자리는 갈레리온 성의 메인 홀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모두 이동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뒤로 신입생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참관인 신분인 이릴은 참석할 수 없었다. 로난은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황급히 연회장을 떴다.

“아셀. 마르야랑 먼저 놀고 있어. 배웅은 나 혼자 하고 올게.”

“으, 응···!”

정문 앞에는 이미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로난은 누이에게 사 준 물건들을 차곡차곡 실었다.

최대한 천천히 짐을 옮겼음에도 끝은 찾아왔다. 이릴이 말했다.

“너무너무 즐거웠어.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

“그렇게 말할 것까지야.”

“아니. 누나는 이제 정말로 안심이야. 이번에 가면 언제 만날 수 있어?”

“여름방학 때니까···한 다섯 달 뒤.”

“헤헤, 길긴 길다. 그래도 누나가 걱정 안 해도 되지?”

로난이 끄덕였다. 역 앞에는 미리 불러 놓은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로난의 어깨에 앉아 있던 시타가 이릴에게 얼굴을 비볐다.

“뺘아~”

“시타 너도 잘 있어.”

이릴은 언제나처럼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말투에서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그녀는 동생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밥 잘 먹어야 해. 일주일. 아니, 한 달에 한 번은 편지 써 줘. 이상한 사람 따라가면 안 돼. 힘이 세다고 친구들 괴롭히면 안 돼. 여자친구는···사귀게 되면 꼭 누나한테 말해 줘야 해.”

“마지막 두 개는 좀 생각해 볼게.”

로난이 능청스레 웃었다. 헤헤 웃은 이릴이 로난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

“그럼, 갈게.”

이릴이 마차에 올랐다. 로난은 마차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떠나간 자리를 빤히 바라보던 시타가 고개를 푹 숙였다.

“뺘우우웅···”

네 장의 날개는 축 늘어져 있었다. 고작 이틀이었지만 정이 많이 든 모양이었다. 마차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던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섯 달이라.”

지나치게 길었다. 사실 만나고자 하면 주말마다 만날 수는 있었다. 주말에는 부지 밖으로 나가는 것이 허락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러기에 님버튼은 너무 멀었다. 왕복해서 오가는 시간만 하더라도 이틀이 꼬박 소모될 터였다. 무언가를 고민하던 로난이 중얼거렸다.

“제도에···괜찮은 집 한 채가 얼마쯤 하더라.”

아예 이릴이 제도로 와 버리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을 모을 필요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당장 거기에 치중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돈은 차차 모이기 마련,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 배움을 원한다면 필레온으로 가라.

‘드디어.’

한 순간도 아데샨의 말을 잊어본 적이 없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어쨌건 일차적인 목표 달성에 성공했다. 로난은 필레온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시타. 가자.”

“뺘!”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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