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9화 (29/333)

29. 그란 카파도키아(2)

#29

일행이 디디칸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뭉쳤다. 화로의 벽면을 더듬거리던 디디칸이 특정 구간을 꾹 눌렀다. 건물이 미세하게 진동하나 싶더니, 네 사람이 서 있던 바닥이 서서히 꺼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겍.”

화들짝 놀란 마르야가 아셀을 껴안았다. 사방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쿠구구구···

천천히 내려가던 바닥은 이윽고 사면을 둘러싼 벽에 완전히 삼켜졌다. 당황하는 모습을 본 디디칸이 껄껄 웃었다.

“마석과 도르래를 이용해 만든 승강기야. 땅 밑의 대장간과 이어지는 가장 빠른 통로지.”

“다른 곳에도 통로가 있나봐?”

“그렇지. 위치는 비밀이지만 족히 수십 개는 된다고. 가장 큰 고객은 그랑시아지만 그 외 고객들의 의뢰도 잔뜩 받고 있거든.”

승강기는 어두컴컴한 수직 통로를 한참이나 내려갔다. 올려다본 출입구는 벌써 달처럼 작아져 있었다. 시타의 눈동자만이 붉은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깡···깡··· 어디선가 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윽고 시야가 탁 트였다. 서늘한 바람이 훅 몰려왔다.

“어서 와라. 제도 최대의 대장간에.”

바위 통로를 벗어난 승강기는 이제 철골로 이루어진 지지대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세 사람의 눈동자가 누구라 할 것 없이 휘둥그레졌다.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게 다 뭐냐···.”

거대한 동공을 개조해서 확보한 공간으로 보였다. 여기저기에 집채만한 종유석과 석순이 돋아나 있었다. 동공의 벽면을 뒤덮은 발광 이끼가 광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동공의 곳곳에는 돌로 지어진 건물 대여섯 개가 버섯처럼 돋아나 있었다. 대장간이라기보다는 마을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건물 사이로는 짜리몽땅한 난쟁이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지하의 장인, 드워프였다. 디디칸이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란 카파도키아. 이 전체가 대장간이지. 구성원 대부분은 드워프지만 나 같은 타종족도 있기는 해.”

마을의 한구석에는 부글대는 용암이 호수처럼 고여 있었다. 드워프들은 특수 처리를 한 양동이로 용암을 퍼나르고 있었다.

쿵. 머지않아 승강기가 멈춰섰다. 디디칸이 세 사람을 내려보며 말했다.

“자, 따라오라고. 최고의 대장장이에게 데려다 줄 테니까. 그런데 그 영감 휴가가 끝났던가?”

디디칸이 귀를 세운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저 멀리서 용암을 나르고 있는 드워프를 향해 외쳤다.

“어이! 오늘 도론 영감 있어?”

“디디칸 이 빌어먹을 놈! 투명화 인챈트 스크롤을 훔쳐간 게 네놈이냐! 또 투명 갑옷인지 뭔지 하는 헛짓거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드워프가 다짜고짜 성을 냈다. 세 사람이 동시에 디디칸을 쳐다보았다. 잠시 검지를 세워 주둥이 앞에 가져다댄 디디칸이 재차 외쳤다.

“그럴 리가 없잖아! 도론 영감 있냐고!”

“내가 알 게 뭐냐! 휴가도 끝났으니 늘 있던 자리에 눌러앉아 있겠지!”

드워프가 씩씩대며 걸어갔다. 양손에 들린 용암 양동이가 위태롭게 출렁였다. 디디칸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자, 휴가가 끝났다는군.”

“너는 다른 대장장이들과 생각이 다른가 보지?”

“그야 당연하지. 우리 노친네들이 희대의 명장이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지만,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마련이거든. 우리는 더 나은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해.”

디디칸이 심지 굳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난은 슬슬 이 털북숭이가 마음에 들려고 하고 있었다. 디디칸을 따라가던 일행은 거대한 정육면체 모양의 건물 앞에 멈춰섰다.

“이건 참···난해하게 생겨먹었네.”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돌로 이루어진 정육면체의 표면은 파리도 못 앉을 만큼 미끈했다.

도대체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정육면체의 윗면에는 천장까지 닿는 기다란 굴뚝이 세워져 있었다. 디디칸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천재적이지? 지금 만나러 가는 도론 영감이 젊을 때 만든 작품이야. 한 사백 년 전 쯤 되겠군.”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사, 사백 년이요?”

“그래. 아마 제도에서 사는 드워프 중에는 가장 나이가 많을 걸.”

드워프의 평균 수명이 삼백년 전후라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정육면체에는 창문 하나 없이 넓지막한 대문 하나만 달려 있었다. 디디칸이 대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파도처럼 밀려온 붉은 빛무리가 네 사람을 향해 쏟아졌다.

“악! 내 눈!”

“뜨, 뜨거워!”

“삐얏!”

로난이 손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 얼굴을 태워버릴 듯이 뜨거운 광선이었다.

붉은 빛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디디칸이 빛의 발원지를 향해 외쳤다.

“도론 영감!! 손님이야!!”

그러자 빛과 열기가 사그라들었다. 로난이 눈을 가리던 손을 치웠다. 난잡하면서도 기묘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다 뭐야?”

대장간의 풍경은 나뭇가지 대신 병장기를 엮어 만든 둥지 같았다. 창, 검, 단검, 폴암··· 종류를 가리지 않고 쌓여 있는 무기들이 사각형의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강철로 된 둥지의 중심부에는 새하얗고 큼직한 모루가 놓여 있었다. 그 앞에 웬 둥그런 주먹밥 하나가 망치를 들고 서 있었다.

“손님이라고?”

주먹밥이 고개를 들었다. 굉장히 몸집이 작은 드워프였다. 뽀글뽀글하고 새하얀 수염은 눈을 제외한 얼굴의 모든 부위를 뒤덮고 있었다.

도론이라 불리운 드워프가 입을 열었다.

“어지간히 기대되는 손님인가 보구나 디디칸. 내게 직접 데려올 정도라면 말이야.”

“그래, 이 갑옷이 아니라면 나는 불구가 됐을 거라고. 생전 처음 보는 쾌검이었어.”

디디칸이 로난을 가리키며 웃었다. 도론이 다리를 절뚝이며 로난을 향해 다가왔다.

“이리 내 보거라.”

도론은 말도 없이 로난의 흑철검을 빼앗아 갔다. 반토막난 흑철검을 본 도론이 한숨을 내쉬었다.

“디디칸. 정말 이 아이가 내 손님이 맞느냐?”

“응?”

“이건 뭐···쓰레기를 칼이라고 들고 다니는구나.”

도론은 아무 말도 없이 흑철검을 등 뒤로 집어던졌다. 거대한 화로 속으로 들어간 흑철검은 그대로 검은 쇳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영감. 이게 지금 무슨···”

“너희들도 이리 줘 보거라.”

“어엇?!”

도론은 차례대로 마르야와 아셀의 무기도 확인했다. 연이어서 한숨을 푹푹 내쉰 도론이 그들의 무기를 화로로 던졌다. 녹아내리는 검 두 자루와 지팡이를 보며, 아셀과 마르야가 비명을 질렀다.

“내, 내, 내 지팡이가!”

“이게 무슨 짓이에요!”

로난이 헛웃음쳤다. 두리번거리던 그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숏 소드 한 자루를 집어들었다.

“사백 년 동안 땅굴 속에서 살다보니 뇌에 곰팡이가 핀 모양이군.”

로난이 도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흑철검은 애초에 못 쓰게 됐으니 상관이 없었지만, 나머지 무기는 분명 멀쩡한 것들이었다. 도론이 입을 열었다.

“마침 잘 됐구나. 칼을 쥔 김에 휘둘러 보거라.”

“뭐?”

“젊은 놈이 벌써 귀가 먹은 게냐? 허공에라도 좋으니 어서 휘둘러 보거라.”

도론이 혀를 차며 재촉했다. 로난은 디디칸을 살기를 담아 노려보았다.

디디칸은 온 힘을 다해 손사래를 치며 도론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분을 식힌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알았수다.”

“그래, 어서···”

도론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로난의 손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첫 수업에 배운 제국 검술의 1초식이었다.

수직으로 떨어진 칼끝은 정확히 도론의 눈동자 앞에 멈춰섰다. 쐐액! 뒤늦은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아셀과 마르야가 입을 틀어막았다.

“꺄악!”

“로, 로난! 무슨!”

풍압으로 각막이 베였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리였다. 도론이 고개를 티끝만큼이라도 앞으로 기울였다면 그는 틀림없이 장님이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도론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이건···.”

“어떠냐 이 놈아.”

되려 당황한 건 로난 쪽이었다. 그는 도론과 방금 자신이 휘두른 검을 빠르게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도론이 양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게 칼이라는 거다.”

로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휘두른 검과는 차원이 달랐다. 검로는 안정적이다 못해 자에 대고 긋는 느낌이었고, 무게 균형 역시 완벽했다.

아무렇게나 집어든 게 이 정도였다. 이런 명검들이 수백, 수천 자루가 널려 있었다. 로난이 숏 소드를 살포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인정할 수 밖에 없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뭐?”

“디디칸. 이런 괴물을 어디서 데려온 거냐? 확실히 내 손님이구나!”

도론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디디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말했잖아. 진짜 장난 없다니까.”

“한 번만 더 해보겠느냐? 자, 이번에는 이걸로.”

도론은 롱소드 한 자루를 로난에게 내밀었다. 로난은 군말 없이 두 번째 검격을 선보였다.

이번에는 나비로제의 회전검이었다. 쉬릭!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매끄러운 검격이 허공을 갈랐다. 도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낯익은 검술인데···혹시 나비로제 그 아이의 친구인가?”

“친구? 나비로제 교관님을 알아요?”

“알다마다. 그나저나 교관이라고 했나? 내 늙은 귀가 드디어 망가진 건가?”

“아뇨, 필레온 아카데미의 교관이에요.”

도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염을 몇 차례 주물럭거린 그가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 네 말대로 땅굴에 수백 년을 처박혀 있다 보니 시간 관념이 무뎌지는구나. 그 아이의 검을 만들어줬을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그 대태도요? 무식하게 넓고 기다란 거.”

“그래. 비검(飛劍)우루사. 내 삶을 통틀어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걸작이었지.”

도론은 나비로제의 대태도를 만들 당시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나비로제의 모든 검술은 물론, 오러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무기 제작 의뢰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우루사뿐만이 아니야. 그랑시아 공작의 검 페일 로드, 전 제국 기사단장 애스턴의 장창 에스카모네도 내가 만들었지. 아아, 이제야 머리가 좀 돌아가는군.”

“그럼 영감님은 개인마다 맞는 무기를 만드는 건가요?”

“그렇지. 모든 전사들은 싸우는 방식이 다르고, 자연스레 무기를 다루는 방식도 다르거든. 얘야, 너도 한 번 휘둘러 보거라.”

“네? 저요?”

마르야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자신이 쓰던 것과 비슷한 숏 소드 두 자루를 집어들었다.

“···그럼, 할게요?”

도론이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쉬릭! 돌개바람을 연상케 하는 그녀 특유의 강검이 허공에 획을 그었다. 스무 번 정도를 휘둘러 본 마르야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와···이 검 뭐죠? 진짜, 아니 진짜 좋은데요?”

반응이 마치 아까의 로난을 보는 듯 했다. 이토록 가벼우면서도 균형이 잘 잡혀 있는 무기는 처음이었다. 도론이 흥미롭다는 듯 마르야의 팔을 바라보았다.

“보기보다 힘이 훨씬 센 아이구나.”

“가, 감사합니다···혹시 여기 널린 무기들을 파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저희 상단과 거래하시면···”

“얘야. 네게 맞는 무기는 숏 소드가 아니란다.”

“네?”

도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기 더미를 파헤치던 그가 대검 하나를 끄집어냈다. 2학년 선배인 브라움이 쓰는 것 보다는 작았지만, 충분히 묵직해 보였다.

“이, 이걸 저보고 쓰라고요?”

“그래. 한 번 휘둘러 보려무나.”

마르야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칼자루를 쥐었다. 대검을 쥐는 것은 처음이라 익숙하지가 않았다.

“흐으읍···!”

어떻게든 자세를 잡은 마르야가 대검을 휘둘렀다. 후우웅! 경쾌한 참격이 공기를 찢었다. 로난이 입을 둥글게 말며 감탄했다.

“오. 확실히.”

“내 말을 이해하겠느냐?”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검 다루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아 자세는 다소 어색했으나, 검을 휘두르는 속도라던지 안정성이 쌍검과는 차원이 달랐다.

놀란 것은 마르야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조금만 익숙해지면 자신의 수족처럼 다룰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로난이 물었다.

“그럼 저는 뭘 휘둘러야 할까요?”

“너는 무기의 종류가 문제가 아니란다.”

“그럼요?”

“소재가 문제지. 네 쾌검을 감당해낼 소재가 세상에 몇 종류나 될런지 모르겠구나.”

도론이 침음을 흘렸다. 로난의 검격은 자신이 그동안 보아온 어떤 검사보다 빨랐다. 그는 여지껏 축적돼온 경험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역시 미스릴인가···? 아냐, 오리할콘이 나을지도. 합금용 운철이 남아 있던가?”

“가격은 상관 없어요. 어차피 제가 내는 것도 아니라.”

“애초에 가격 같은 건 신경쓰지 않았다. 그딴 걸 따질 셈이었으면 저 윗동네에 널린 싸구려 공방으로 갔어야지. 흐으으음···정말로 뭐가 좋을까. 아예 몬스터의 갑각이나 비늘 종류로···.”

‘비늘?’

비늘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이었다. 로난의 머릿속에 한 줄기 섬광이 번득였다. 그는 난데없이 외투를 벗어서 탈탈 털기 시작했다.

“로, 로난···뭐 해?”

“가만있어 봐. 그걸 분명히 내가 챙겨 놨는데···.”

주머니가 여덟 개가 넘는 외투에서는 온갖 물건이 다 튀어 나왔다. 한 입 먹은 비스킷, 구겨진 양말, 절그럭거리는 동전 등등···마침내 찾던 것을 발견한 로난이 히죽 웃엇다.

“찾았다.”

로난은 찾은 것을 움켜쥔 채 도론에게 다가갔다. 그는 아직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소재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아냐, 아냐. 블루 와이번의 비늘은 너무 탱글탱글해. 그렇다면 뭘로···”

“영감님. 이건 어때요?”

“음?”

로난이 손을 내밀었다. 도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의 파편처럼 생긴 얇은 조각들이 로난의 손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흑진주처럼 검고 아름다웠다.

“이게···뭐지?”

사백 년이 넘도록 대장장이 일을 해왔음에도 본 적 없는 소재였다. 로난이 시타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얘가 깨고 나온 알껍데기에요.”

“뺘아.”

시타가 로난의 손에 얼굴을 부볐다. 도론의 눈이 커졌다.

“알껍데기라고? 이게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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