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32화 (32/333)

32. 재회(2)

#32

“세상에 몇 없는 행운아 중 하나지. 잘 봐 두도록 해라. 순식간에 보이지도 않는 곳까지 올라가 버릴 테니까.”

밤처럼 검은 머리칼, 새하얀 피부와 높은 콧대가 눈에 들어왔다. 나비로제가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데샨.”

“네. 그나저나 정말 마나가 느껴지지 않아요. 저처럼 타고난 마나가 미약한 걸까요?”

“더 심하지. 너는 소드 유저의 경지까지는 어찌어찌 도달했지만, 저 아이에게서는 단 한 방울의 마나도 느껴지지 않으니까.”

“그런···그런 게 가능할 리가···.”

아데샨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로난의 창무를 지켜보았다. 유려하게 이어지는 동작에서는 일말의 군더더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국 창술의 시연을 마친 로난이 방패와 숏 소드를 집어들었다. 아데샨이 중얼거렸다.

“저도 계속 노력하면 언젠가···저렇게 될 수 있을까요?”

나비로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현실만큼이나 냉혹한 침묵이었다. 하지만 아데샨은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고 계속해서 선망의 시선을 불태웠다. 머지않아 로난의 시연이 끝났다.

“후···다 했어요.”

로난이 메이스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한동안 침묵이 감돌더니 선배들 사이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짝짝짝···점점 커지고 많아지던 박수소리는 투기장 전체를 메우기에 이르렀다. 누군가 외쳤다.

“대단한데, 신입생!”

이어서 로난을 칭찬하는 내용이 산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하지만 로난의 귀에는 그 중 어느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전신에서 스며 나오는 열기가 감각을 무뎌지게 했다.

“어으 씨바, 더워라.”

아무리 허공에 하는 칼질이라 해도 연속해서 하려니 땀이 장난 아니게 흘렀다. 자켓과 넥타이는 진작에 풀어헤친 뒤였다.

로난은 셔츠 자락을 들어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맹수의 것을 연상케 하는 복근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몇몇 여학생들이 입을 가리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엘릭서가 따로 없네. 내가 이 맛에 나비로제 님 수업 듣지.”

“미친년. 그나저나 가서 연상은 어떠냐고 물어볼까?”

로난은 땀을 다 닦은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나비로제가 노고를 치하하듯 끄덕였다. 그때 누군가가 수건을 들고 다가왔다.

“저, 저기. 정말 잘 봤어. 정말 티 끝만 한 실수도 없더라.”

“아, 그래. 고마워요.”

“다음에 괜찮다면 한번 가르침을 받고 싶어. 이름이...”

“로난이에요.”

로난이 수건을 집어들었다. 감사를 인사를 위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키가 자신보다 큰 소녀를 마주친 로난은 그대로 돌덩이가 된 것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대장군님?”

“어? 대장군...이라니?”

수건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데샨이 당황스레 갸웃거렸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턱 끝에 고이고 있었지만, 로난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윽고 로난의 입이 벌어졌다.

“아데샨.”

“어, 어? 내 이름을 알아?”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앳되기는 했지만 얼굴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수건을 주워든 로난이 얼굴을 닦았다.

로난은 자신이 땀을 줄줄 흘리고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눈에서 나온, 땀이 아닌 액체 한 방울 정도는 묻어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

****

나비로제의 수업은 대련이 주를 이루었다. 간단한 이론과 검술 시연 이후로는 아무나와 조를 짜서 대련하는 형식이었다.

오늘 나비로제가 가르쳐준 것은 나비로제 류의 1초식이었다. 뱀처럼 휘감아 들어오는 검로가 상대의 대처를 어렵게 하는 기술이었다.

평소라면 두 눈에 불을 켜고 따라 했을 로난이지만, 오늘은 영 수업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수건을 건네준 어린 날의 대장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앳돼 보이기는 했지만 설마 나랑 비슷할 줄이야.’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다. 죽음을 한 번 경험한 로난은 그런 이들을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누이가 그러했고, 매일 밤 낄낄대던 징벌병 전우들이 그러했다. 마지막 순간에 미래를 양도한 대장군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로난은 수건을 받은 뒤로 한참이나 제자리에 서 있었다. 아데샨은 그런 로난을 이상한 듯이 바라보다가 나비로제의 부름을 받고 달려갔다.

‘뭔가··분위기가 많이 다르던데.’

로난은 전생에 본 아데샨의 모습을 떠올렸다. 최연소 제국군 대장군. 대가문 아칼루시아의 공작. 백만의 군세를 부리는 그녀에게서는 일말의 빈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혈관에 피 대신 쇳물이 흐른다 해도 믿어지는 분이었지.’

로난이 알던 대장군 아데샨은 극도로 냉정하고 이성적인 인간이었다. 아하유테와의 결전 당시 제국 기사단을 비롯한 잔여 병력의 대부분을 징벌 부대의 호위로 보내며 갈아버린 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감정 따위는 일절 드러내지 않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로난과 함께했던 마지막 순간에는 마음을 열었지만, 그때마저도 대장군으로서의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헌데 지금은 표정도 풍부하고, 어쩐지 어리숙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혼자 검술을 연습하던 나스도가 외쳤다.

“아데샨 조교님! 여기 자세 좀 봐 주세요!”

“앗···지금 갈게!”

아데샨이 서류뭉치를 안아든 채 달려갔다. 그녀는 나비로제의 조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스도가 허공에 레이피어를 찌르며 검술을 펼쳤다. 아데샨은 그의 자세를 면밀하게 분석한 뒤 교정해 주었다.

“음···전체적으로 괜찮은데 왼쪽 허벅지에 조금 힘이 많이 실렸어. 코어의 출력을 2할정도 낮추고 무게중심을 오른쪽 앞으로 둬 볼래?”

“아, 훨씬 낫네요. 감사합니다.”

나스도가 감사인사를 표했다. 아데샨은 상냥한 웃음을 남긴 채 다른 학생의 자세를 보러 갔다. 꼼꼼하면서도 사근사근한 모습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도저히 전생의 면모와 엮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의문이 들었다. 지금의 아데샨은 몇 번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거지?

‘첫 번째 아니면 세 번째인데···,’

구슬의 효과를 정확히 모르기에 알 수가 없었다. 허나 지금의 모습만 봤을 때는 누가 봐도 첫 번째 삶을 살아가는 중이었다. 아데샨이 보여준 미소는 거듭되는 삶의 풍파에 마모된 사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네 번째 삶일 가능성은 없나? 아냐, 그렇다면 옷감이나 자르면서 살고 있었겠지. 그럼 내가 알던 대장군님은 거기서 죽은 건가?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갈수록 가중되는 의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신입생. 방금 시연 잘 봤다. 무시무시하던데?”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웬 키 크고 훤칠하게 생긴 청년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는 열심히 대검과 레이피어를 휘두르고 있는 브라움과 나스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문은 들었어. 저 두 얼간이를 완전히 박살내 버렸다면서?”

“예?”

“왜, 입학식 때. 저 쓸데없이 덩치만 큰 멍청이랑 자기 무기처럼 얍삽하게 생긴 놈 말이야.”

넥타이를 풀고 있어서 제대로 된 학년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브라움과 나스도를 하대하는 걸 보니 더 상급생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면식이 있는 두 사람을 막 대하는 점이 조금 거슬렸지만, 친하면 그럴 수도 있거니 생각했다. 청년이 손을 내밀었다.

“카르단 오운이다. 잘 부탁해.”

“로난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너를 보고 자괴감이 좀 들었어. 어떻게 각기 다른 종류의 무기를 그렇게 완벽하게 다룰 수 있지?”

“그냥 배운 대로 했어요.”

카르단은 계속해서 로난을 칭찬했다. 다소 과하거나 작위적으로 느껴지긴 했지만, 로난은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싫어할 이유는 없으니까. 카르단이 자신의 창을 붕붕 돌리며 말을 이었다.

“혹시 나랑 대련 한 번 할래? 장래가 유망한 후배님한테 한 수 배우고 싶은데.”

“그래요. 여기서 바로 하나요?”

“아니. 잠깐만 기다려봐. 야! 아데샨!”

“으, 응?!”

카르단이 소리쳤다. 머지않아 달려온 아데샨이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카르단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하여튼 느려터져서는. 가서 내 창 좀 가져와라.”

“창? 지금 들고 있는 건···.”

“멍청아, 척 하면 척 알아들어야지. 이건 장창이고 단창 가져오란 소리잖아. 얼른 가서 가지고 와.”

“아, 응!”

아데샨이 뒤를 돌아 달려갔다. 답답한 년. 카르단이 그리 중얼거렸다. 조교라기보다는 시종을 대하는 듯한 하대를 본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그냥 부를 때 가져와 달라 했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으응? 아하하, 조금 놀랐겠구나. 미안해. 나는 실력도 없는 주제에 권리를 누리려 하는 사람들을 참을 수 없거든. 쟤처럼 말이야.”

카르단이 창을 찾아 헤매는 아데샨을 가리켰다. 그는 아데샨이 나비로제의 수업을 들을 자격이 없다고 설명했다.

“원래 나비로제 님의 수업인 ‘실전 상급 검술’은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수강할 수 있었어. 헌데 저 애는 아직까지 소드 유저의 경지에 머물러 있음에도 수업을 듣고 있지. 뻔뻔하게도.”

“왜 수업을 듣게 해 주는거죠?”

“말도 마. 청강이라도 시켜 달라고 비는 꼴이 얼마나 추하던지. 우리 학년은 다 알걸? 견디지 못한 나비로제 님이 조교로 들인거지.”

요컨대 아데샨은 전대 검성 나비로제의 수업을 너무나도 듣고 싶어했으나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관찰력과 꼼꼼함을 필두로 삼아 조교를 시켜 달라고 부탁했고, 나비로제는 받아들였다.

니미, 뭐가 문제인 거지? 로난이 말했다.

“나름대로의 잠재성이 있어서 허락한 거 아닐까요? 방금 보니 조교 역할은 꽤 하는 것 같던데.”

“뭐야, 저 멀대 같은 년이 마음에 든 거야? 이거 충격인데. 얼굴이 좀 반반하긴 해도 취향이 영···.”

“카르단! 여기 창···!”

그때 단창을 쥐고 달려온 아데샨이 두 사람 앞에 멈춰섰다. 땀방울 몇 줄기가 새하얀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카르단이 아데샨의 이마를 툭툭 치며 말했다.

“느려터져서는···실력이 안되면 조교 역할이라도 똑바로 해야 할 거 아냐. 원래는 수업을 들을 자격도 안 되면서.”

“그, 그만해···카르단.”

“선배님을 붙여야지. 응? 나는 이제 3학년이라고. 유급생 주제에.”

카르단은 멈추지 않았다. 로난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비로제는 저 구석에서 슐리펜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몇몇 선배들이 힐끔힐끔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방관만 할 뿐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랄이군.’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속이 부글거려서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아데샨을 조롱하고 있는 카르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저희 대련이나 하죠. 더는 못 봐주겠는데.”

“어? 그래야지. 그런데 너 말투가 갑자기 왜 그러냐? 더는 못 봐주겠다니?”

“글쎄요? 얼른 준비나 해요. 저기에 서면 되는 거죠?”

제1 투기장의 바닥에는 길고 널찍한 직사각형이 여러 개 그려져 있었다. 다른 조와 대련 동선이 겹치지 않게 구분된 구역이었다.

로난은 근처에 있는 직사각형의 한쪽 끝으로 가서 섰다. 아데샨에게서 단창을 빼앗듯이 낚아챈 카르단이 반대쪽에 자리를 잡았다. 로난의 표정을 본 카르단이 신경질적으로 지껄였다.

“선배에게 보일 만한 눈빛은 아닌 거 같은데.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든 거지 후배님?”

“닥치고, 여기가 필레온이라서 다행인 줄 알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리고 너 지금 반말한 거냐?”

“그래. 이 씨발새끼야.”

직사각형이 밝게 빛나며 대련 개시를 알렸다. 쏘아지듯 뛰쳐나간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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