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33화 (33/333)

33. 재회(3)

#33화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리고 너 지금 반말한 거냐?”

“그래. 이 씨발새끼야.”

직사각형이 밝게 빛나며 대련 개시를 알렸다. 쏘아지듯 뛰쳐나간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뭐, 뭐야?!”

당황한 카르단이 단창을 휘둘렀다. 반달 모양의 검기 네 개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로난은 가볍게 몸을 비틀어 검기들을 피했다.

“급식을 똥구멍으로 처먹은 건 아니네.”

검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스도나 브라움보다 훨씬 높은 경지였다. 물론 로난이 알 바는 아니었지만.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를 본 카르단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있는 마나를 다 긁어모아 아까보다 몇 배는 거대한 검기를 뽑아냈다. 카르단이 검기를 쏘아 내며 외쳤다.

“미친 새끼! 죽어라!”

검기는 정확히 로난의 허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날개가 달리지 않고서야 피할 수 없는 궤도였다.

하지만 로난은 피하지 않았다. 단지 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쾅! 양단된 검기가 로난의 양옆으로 떨어지며 폭발을 일으켰다. 카르단의 눈이 커졌다.

“뭐?!”

거리가 완전히 좁혀졌다. 로난의 눈앞에는 이미 수천 개의 검로가 드리워 있었다. 대부분이 카르단을 고깃덩이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미래와 직결된 길이었다. 로난이 혀를 찼다.

‘아카데미가 다 좋은데 유일하게 이게 마음에 안 드네.’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어서는 안 됐다. 한숨을 내쉰 로난이 카르단의 머리와 그의 창대를 향해 검격을 쏘았다.

서걱. 두피를 타고 미끄러진 검신이 다시 돌아왔다. 카르단이 뒤늦게 몸을 빼는 순간이었다.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공중에 떠오르며 카르단의 머리에 넓찍한 도로가 개통되었다.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본 카르단이 당혹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흐아아악! 뭐, 뭐야?!”

“한동안 머리는 안 잘라도 된다는 거지.”

그와 동시에 단창에 가느다란 선들이 생겼다. 총 열두 개의 토막으로 나눠진 창이 폭발하듯 흩어졌다. 로난은 그대로 카르단의 가슴을 걷어찼다.

“커억!”

등부터 바닥에 처박힌 카르단이 헛숨을 들이켰다. 한순간 시야가 흐려지더니 천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로난이 카르단의 멱살을 틀어쥐며 말했다.

“잘 들어 카르단. 이건 경고야.”

“너, 너 이러고도 무사히 넘어갈 줄 알아? 이, 이 학년도 아니고 삼 학년 선배에게 이런 짓을···!”

짝! 로난이 카르단의 뺨을 후려쳤다. 세차게 돌아간 고개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로난은 벙어리가 된 카르단의 멱살을 코앞까지 끌어당기며 으르렁거렸다.

“난 너 같은 선배 둔 적 없어 이 새끼야. 그리고 그딴 건 내 알 바가 아니야.”

“뭐, 뭐···!”

“명심해. 저 사람에게 한 번만 더 그따위로 굴었다간 네 앙증맞은 거시기를 잘라서 이마에 붙여 버릴 거다.”

“히···히이익···!”

“세상에서 가장 추잡한 유니콘이지. 아마 유니콘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을 당할 거다. 뿔이 형편없이 작아서.”

로난이 멱살을 놓았다. 카르단이 뒤통수를 찧으며 쓰러졌다. 그는 일생일대의 악몽이라도 꾼 사람처럼 가만히 천장을 올려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대련장은 이미 적막에 빠져 있었다. 면식이 있는 나스도나 브라움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자신들을 대하던 정중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몸을 일으킨 로난이 검끝으로 남학생 하나를 겨누었다.

“거기 너.”

“어···응?”

카르단이 아데샨을 괴롭힐 당시 눈이 마주친 선배였다. 로난의 기세에 눌린 학생이 움츠러들었다.

“이딴 일이 언제부터 벌어진 거냐?”

“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뒈져 볼래? 아까 나랑 눈 마주쳤잖아. 기억나게 해 줘?”

로난이 검을 뽑아든 채로 그에게 다가갔다. 겁에 질린 남학생이 뒷걸음질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데샨이 로난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 저기···! 나는 정말 괜찮아. 진정해, 응?”

“비켜요. 나는 당신이 저런 병신한테 욕 처먹는 꼴 못 봐요.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는 새끼들도 마찬가지고.”

로난은 누워서 껄떡이는 카르단을 가리켰다. 넋이 완전히 나가 버린 얼굴에는 공포만이 남아 떠다니고 있었다.

뭐라 형용 못할 감정이 로난의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옛 상관에 대한 충성심이 뒤늦게 발화한 건지, 마지막 순간에 나누었던 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래서는 안 됐다. 옳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를 쥐어준 사람이 병신 취급을 받으면 안 됐다. 아데샨을 뿌리치고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멈춰라. 로난.”

로난이 바라보던 세상이 한순간 어둠에 뒤덮였다. 곳곳에서 쇠붙이 같은 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로난은 목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뱀 한 마리가 코앞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헛숨을 들이킨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그게 댁의 오러인가.”

대련장을 휘감은 몸통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바렌 교수도 한 입에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뱀이었다.

마주치는 것 만으로 생물을 마비시키는 섬뜩한 눈동자는 나비로제와 같은 짙은 녹색을 띠고 있었다. 뱀의 아가리가 천천히 벌어졌다.

“카르단과의 대련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겠다. 대련 중에는 많은 일이 벌어지는 법이니까. 다만, 그 이상은 허락할 수 없다.”

“···설마 다 보고 있었어요?”

“그래.”

“젠장, 그러고도 당신이 교육자에요? 당신 부하가, 아니, 학생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잖아요.”

로난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소드마스터고 지랄이고 이제 알 바가 아니었다. 뱀이 아가리를 완전히 벌리며 독니를 드러냈다.

“그건 네가 참견할 영역이 아니다. 나와 내 조교가 알아서 할 일이지. 검을 들고 제자리로 돌아가라.”

혓바닥으로 뇌를 핥는 듯한 섬뜩함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나비로제의 오러가 만들어 낸 신기루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검을 쥔 손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호흡을 가다듬은 로난이 걸음을 내디뎠다.

“좆까.”

뱀의 아가리가 닫혔다. 뒷목에 강렬한 충격이 느껴졌다. 로난의 의식이 끊어졌다.

****

매미 소리에 눈을 떴다. 나뭇잎으로 이루어진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눅눅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비적대는 이파리 사이로 구름 가득한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

공기가 무거웠다. 로난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그물로 만든 해먹에 누워 있었다. 저 한구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 마리만 제대로 잡아도 팔자를 피는 거라니까? 꿈새나 바다요정 같은 건 진짜 저택 한 채 값이 나온다고!”

“그럼 너는 왜 여기서 삽으로 똥이나 푸고 있냐 발루스. 저택은 어디 두고 왔어?”

“두뇌가 쥐콩만한 새끼들이라 그런지 이해를 못 하는군. 어이, 로난! 이 등신들 좀 주물러 줘!”

로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폐자재로 지은 낡아빠진 막사, 산아래로 펼쳐진 제국군 야영지와 모닥불에 둘러앉아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내놈들.

로난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징벌 부대 동기들의 이름을 읊조렸다.

“···루단? 마틴? 발루스? 너희들이···왜 여기 있어?”

“에휴, 어제 얼마나 퍼마셨길래 그 모양이야? 술 훔친 거 있으면 같이 좀 먹자니까.”

“냅둬. 지루한 나머지 미쳐버렸나 보지. 우라질,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서 대기해야 하는 건지. 대장군이면 다야?”

대장군이면 다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섬뜩한 기시감이 로난의 뇌리를 스쳤다. 분명 기억에 있는 장면이었다. 뒤이어 벌어질 일을 떠올려낸 로난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씨발,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병신들아. 너네 이러고 있으면 안 돼.”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로난?”

“입 닥치고 따라와. 시간이 없···”

로난이 막 발루스의 목덜미를 낚아채려는 차였다. 갑자기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오오오오-!

부오오오오-!

부오오오오-!

“악, 내 귀!”

“씨벌, 이게 무슨 소리야?”

동기들이 귀를 틀어막았다. 산 아래의 야영지에서 분주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로난의 시선이 하늘에 닿는 순간이었다. 웅장한 목소리가 모두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아하유테가 부름에 응한다.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허공에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떠오름과 동시에 구름이 부서졌다. 전신이 새하얀 거인이 네 장의 날개를 퍼덕이며 천천히 강하하기 시작했다.

“저, 저, 저게 뭐야?!”

“괴, 괴물이닷!”

비현실적인 광경을 목도한 동기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많은 화살과 공격 마법이 기다렸다는 듯이 거인을 향해 쏘아졌다. 아하유테의 손에 빛이 모이는 것을 본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잘 들어. 니들은 아무짝에 도움이 안 되니까 혼란을 틈타 도망쳐. 저런 게 둘씩 더 내려오니까 북부로 올라가면···”

로난은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세 명의 동기는 모두 시체로 변해 있었다.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진 육신에서는 이목구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쏴아아아아···

빗소리가 들려왔다. 로난은 별안간 배경이 불그죽죽한 황무지로 변한 것을 눈치챘다. 아하유테의 푸른 피가 발밑에 고여 있었다. 누군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를 재단사로 만들어 주겠나?”

“허어억!”

로난이 솟구치듯 상체를 일으켰다.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바닥에 떨어졌다. 새하얀 커튼이 사방에 드리워져 있었다.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커튼 한 면이 젖혀졌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아데샨?···나비로제?”

커튼을 젖히고 나타난 것은 나비로제와 교복을 입은 아데샨이었다. 로난을 위아래로 한 번 흝은 나비로제가 등을 돌렸다.

“괜찮아 보이는군. 먼저 가겠다.”

“네, 넵!”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참으로 어이없는 퇴장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데샨이 침대 옆의 간이의자에 걸터 앉았다.

“기절해서 내가 보건실로 데려왔어. 몸은 좀 어때?”

“···괜찮아요.”

“저기, 아까 나 때문에 화낸 거지?”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악몽을 꾼 모양이었다. 강림하는 아하유테와 처참하게 널려 있는 시체들, 대장군의 유언만이 잔여물처럼 남아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로난의 눈치를 보던 아데샨이 말을 이었다.

“방관한 애들을 너무 미워하진 마. 카르단은 3학년 중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우등생이었거든. 잘못된 건 알고 있었지만, 무서워서 말이 안 나왔을 거야.”

“···그러고 보니 그 새끼는요?”

“음···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당분간은 수업에 안 나올 거 같아. 제대로 걷지도 못 해서 친구들의 부축을 받아야 했거든.”

“그거 다행이네요.”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카르단인지 뭔지 하는 놈의 지성을 믿기로 했다. 그 정도로 경고했는데 못 알아 들으면 그때는 정말 죽이거나 병신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장군···아니, 아데샨.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응? 뭔데?”

“왜 그런 취급을 받고 가만히 있어요? 화나지도 않아요? 특히 나비로제는 교관이라는 작자가 자기 학생을 방관하고 있잖아요.”

로난의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나와 내 조교가 알아서 할 일이라니. 다시 화가 치밀어 오르는 말이었다. 입술을 이리저리 비틀던 아데샨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내가 부탁한 거니까.”

“부탁이요?”

“응. 나비로제 님은 정말 좋은 분이니까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해. 내가 부탁했어. 카르단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내게 함부로 대하더라도 관여하지 말라고.”

“왜 그런 등신···아니, 멍청한 부탁을 한 거죠?”

아데샨이 사정을 설명했다. 전대 검성 나비로제는 아데샨의 우상이었다. 4년간의 입시 끝에 기적적으로 필레온에 합격한 아데샨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비로제의 수업을 듣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녀의 수업은 소드 익스퍼트 이상의 경지에 이른 학생들만 들을 수 있었다.

“자격 없는 특권을 누리고 있으니까. 나는 아직도 소드 유저의 경지에 머물러 있거든. 설령 조교 일로 무마하더라도 그건 변하지 않아.”

그 말을 들은 로난의 눈이 커졌다. 딱히 사려 깊은 마음씨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몇 년을 수련했음에도 아직 소드 유저라고···? 그 대장군 아데샨이?’

마나에 대해 잘 모르던 과거였다면 그러려니 넘어갔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로난은 아데샨의 오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 제국군의 정점에 군림하는 자에게 걸맞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나에 대해 뭐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로난이 뭐라 얘기하려던 차에 아데샨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고마워.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이렇게 신경을 써 줘서. ”

“···그냥 제가 열받아서 한 거예요.”

“그럼 너는 참 좋은 사람이네. 앗, 이거 봐봐.”

갑자기 아데샨이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로난이 대련 당시 벗어던진 재킷이었다. 아데샨은 팔꿈치 부분을 가리키며 생글생글 웃었다.

“살짝 찢어져 있길래 꿰매 놨어. 감쪽같지?”

“그러게요.”

그녀의 말마따나 팔꿈치 부분에는 어떤 흠집도 보이지 않았다. 바느질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말문이 트인 아데샨이 재잘재잘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나비로제 님의 오러에 저항하고 움직인 학생은 네가 처음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슐리펜을 제외한 모두가 들고 있던 무기를 떨어뜨렸는데.”

“칼자루를 좆나게 쎄게 쥐면 돼요.”

“아하하, 너 좀 재밌다.”

아데샨이 키득거렸다. 그녀는 로난의 거친 말투에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적응이 안 되는 모습이었다.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한테 영감을 받아 도서관에 가는데 말이지, 웬 1학년 여자애가 혼자 서성이고 있는 거야. 머리가 아주 예쁜 보라색인 애였는데, 그래서···.”

“아데샨.”

“응?”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예요?”

“그게···무슨 뜻이야?”

“왜 그렇게 강해지는 데 집착하는지 알고 싶어요. 본인도 알잖아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꺾이고도 남았을 거예요.”

아데샨의 상황은 결코 좋지 않았다.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고, 실기 성적 부족으로 유급까지 당한 데다가 학비를 벌기 위해 잡일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의지가 꺾이지 않는다면 필히 의지할 줏대가 하나 있을 터. 로난이 되물었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요?”

한순간 아데샨의 말문이 막혔다. 로난은 웃음기를 거둔 채 아데샨을 응시했다. 그녀는 로난의 시선을 피하며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무릎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 사실은 내가 꿈이 하나 있거든···.”

“꿈?”

“응. 어떻게든 이루고 싶은···비웃지 않겠다고만 약속하면 말해 줄게.”

“약속할게요.”

“그래. 너랑은 뭔가 잘 맞는 거 같으니까. 진짜 믿을게?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한 거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호흡한 아데샨이 읊조리듯 말했다.

“대장군.”

로난의 시간이 멈췄다. 마른 세수를 한 아데샨이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이었다.

“무모하게 보여도 도전해보고 싶어.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군사학이나 전술에는 자신이 있거든. 한 번도 1등을 놓쳐본 적이 없고.”

잿빛 눈동자 속에서는 희망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데샨은 속사포처럼 빠른 속도로 자신의 꿈에 대해 토로했다.

“그리고 전쟁이 한 번 나면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죽잖아? 나는···”

별안간 아데샨이 말꼬리를 끝었다. 한순간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지만, 이미 눈앞이 부옇게 변한 로난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데샨은 다시 밝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음, 아니다. 이건 나중에. 아무튼 오러도 개화하지 못한 지휘관은 아무도 따르고 싶어하지 않을 것 같더라고.”

그녀의 말이 길어질수록 실감이 났다. 자신이 알던, 재단사가 되고 싶어하던 대장군 아데샨은 이제 없다. 소매로 눈가를 문질러 닦은 로난이 헛웃음 쳤다.

“그러니까···앗! 안 비웃는다면서?”

“비웃은 거 아녜요.”

“으으···진짜지?”

아데샨이 로난을 째려보았다. 그는 쓴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를 확인한 아데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으음···이제 슬슬 가봐야겠다. 충분히 쉬다 돌아가.”

“네.”

“참, 나비로제 님이 다음 수업때도 꼭 나오라고 하셨어. 안 나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여서.”

“제기랄, 알았어요.”

“그럼 또 보자 로난. 고민거리가 있거나 할 이야기가 있으면 언제든지 제1투기장이나 크라티르 관으로 와. ”

쿵. 문이 닫혔다. 로난은 아데샨이 나간 뒤로도 한참이나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남겼던 유언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 헛짓거리하지 말고 재단사나 하라고 전해 주겠나?

헛짓거리라. 그리 뇌까린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커튼 사이로 주홍빛 광선이 스며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걸 내가···어떻게 말하냐.”

로난이 중얼거렸다. 그는 해가 완전히 저문 뒤에야 기숙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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