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44화 (44/333)

44. 해주(3)

#44

닳고 닳은 흑철검은 어느새 매끈한 라만차로 변해 있었다. 로난은 눈앞까지 들이닥친 그림자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다만 마구잡이가 아닌, 허공에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서.

서걱.

그림자가 반으로 갈라졌다. 촤아악! 핏물처럼 터져 나온 어둠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

“뭐야?!”

로난의 눈이 커졌다. 검격을 날린 본인조차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두 동강 난 그림자가 로난의 양옆으로 떨어졌다.

‘방금 그건···.’

기존에 낼 수 있던 속도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한 베기였다. 기이한 흐름 위에 올라탄 검신은 순풍을 받은 범선처럼 나아갔다.

다시금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검을 휘둘러 봤지만 아까와 같은 느낌은 나지 않았다. 정체 모를 흐름은 시야 곳곳에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중에라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어. 그리 생각한 로난이 시선을 내렸다. 양단된 그림자가 발치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로난은 그림자를 짓밟으며 물었다.

“왜 그딴 짓을 한 거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림자는 바람에 복상하는 재처럼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침을 뱉은 로난이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하긴···이렇게 쉽게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

시야에 닿는 풍경 전체가 분해되고 있었다. 로난은 자신의 손끝이 가루처럼 바스라지는 것을 보며 눈을 감았다. 머리가 영 어지러운 것이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모양이었다.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림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로난.”

“뭐?!”

로난이 눈을 떴다. 파란 하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두컴컴한 실내가 눈앞에 펼쳐졌다. 건조한 공기에는 케케묵은 종이와 잉크 냄새가 배어 있었다.

“···여기는?”

눈을 가늘게 뜨자 저 멀리 천장에 적힌 글자가 보였다. 세크리트의 집무실인 세파라치오였다. 다만 서재를 밝히던 조명이 모조리 꺼져 있었다.

‘강도라도 들었나···?’

천천히 몸을 일으킨 로난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한바탕 격전을 치른 근육은 아직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그때 뒤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행은 즐거웠느냐?”

“썅, 깜짝이야.”

로난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세크리트는 어디 가고 다소 깐깐한 인상의 노인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 놓인 작은 촛불이 노인의 얼굴을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동그란 안경을 낀 노인은 만년필로 종이에 무언가를 열심히 끼적이고 있었다. 로난은 그가 세크리트와 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로난이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후···밤이 됐나 보네요.”

“그렇단다. 긴 해주였어.”

“불은 왜 다 꺼놨어요? 에르제베트는요? ”

“쉬이이···저쪽이란다.”

검지를 입 앞에 가져다 댄 세크리트가 뒤로 눈짓했다. 고개를 돌리자 소파에 웅크린 채 잠든 에르제베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담요까지 덮고 있는 걸로 봐서 잠든 지 시간이 제법 흐른 듯했다.

“으응···우우움···.”

그녀는 입으로 들어간 머리카락을 열심히 오물거리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세크리트가 내려와 있는 담요를 목까지 올려주었다.

“먼저 가도 되는데 굳이 기다리겠다고 고집을 부리더구나. 이 아이가 아니었다면 해주술을 당장 걸지는 못했을 거야. 나중에 맛있는 거라도 사 주거라.”

“그래야겠네요.”

로난이 끄덕였다. 과음한 다음 날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마른 세수를 한 뒤 다시금 세크리트를 바라보았다.

“제가 얼마나 누워 있던 거죠?”

“조금 있으면 해가 뜰 시간이란다.”

“젠장, 오래도 잤네.”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거진 하루를 심상 세계에서 보낸 꼴이었다. 세크리트가 안경을 이마 위로 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지. 해주가 성공했으니 말이다.”

“정말요?”

“그래. 저걸 보려무나.”

세크리트가 서재 바닥을 가리켰다. 로난이 마법진을 깔고 누웠던 자리였다.

분필로 그린 세 개의 마법진은 모두 새카맣게 변색되어 있었다. 세크리트는 몸 밖으로 흘러나온 저주를 마법진이 흡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힘들었을 텐데 잘 해내 줘서 고맙구나. 너는 몇 번이고 소리를 질렀어. 울기도 했고. 해주 도중 흔히 벌어지는 일이지만, 괜스레 걱정되더구나.”

“···제가 울었다고요?”

로난이 황급히 눈가를 문질렀다. 부어오른 눈 밑에는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 설마 심상 세계에서 지랄을 떨었을 때마다 현실에서도 난리를 피운 걸까.

“염병···쪽팔리게.”

천장을 보며 한숨을 내쉰 로난이 다시 세크리트를 바라보았다. 당장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먼저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감정을 추스른 로난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교수님. 진짜로.”

“고맙긴. 늘 그렇듯이 얽혀 있는 매듭을 하나 풀었을 뿐이란다.”

“그런데 정확히 무슨 금제가 풀린 거죠?”

“흐으음···그건 본인이 가장 잘 느낄 텐데. 뭐 평소와 달라진 게 없느냐?”

“달라진 거? ···아.”

그러고 보니 더는 눈이 간지럽지 않았다. 로난은 그 사실과 더불어 심상 세계에서 본 이상한 흐름에 대해 말해 주었다. 세크리트가 인자하게 웃었다.

“허허, 마나를 볼 수 있게 된 모양이구나.”

“그 흐물거리던 게 마나라고요?”

“그래. 까마득한 과거라 기억은 나지 않지만···나도 처음 감응에 성공했을 당시에는 그런 형상으로 마나를 인식한 것 같구나. 축하한다.”

세크리트는 감응력이 발달할수록 마나를 더 넓고 자세하게 볼 수 있을 것이라 설명했다. 로난은 세크리트의 주위에서 일렁이는 흐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의 그 일격도 무의식적으로 마나를 활용한 건가.’

로난은 그림자를 베어낸 일격을 떠올렸다. 원래대로라면 잘렸어야 할 마나가 잘리지 않고 되려 힘을 실어 주었다.

자세한 원리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로난은 그것이 결을 따라 톱질을 하면 한층 작업이 수월해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 넌지시 추측했다.

‘잘 된 일이야.’

로난이 웃었다. 이제 마법이나 오러가 아닌 마나도 볼 수 있게 됐으니 비단 전투뿐만이 아니라도 많은 변화가 생길 터였다.

비록 아홉 개나 되는 저주가 아직 몸에 남아 있었지만 기쁜 건 기쁜 것이었다. 불현듯 세크리트가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로난, 거기서 무엇을 봤느냐?”

“예?”

“네 심상 세계에서 말이다. 해주까지의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야 그렇죠. 조금 길긴 한데···음, 그러니까···.”

로난은 심상 세계에서 겪었던 일을 하나씩 이야기했다. 기억에 없던 버드나무, 적막하던 님버튼. 어린 시절의 누이와 기억에 없던 어머니를 마주치기까지.

“호오···금제가 심상화된 모습이 과거의 고향이었단 말이냐? 흥미롭군···.”

세크리트는 로난의 말을 토씨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받아 적었다. 로난이 막 가족들을 만났을 당시의 이야기를 하던 도중이었다.

“잠깐, 갓난아기인 너 자신을 봤다고?”

“예? 그런데요.”

“허어···? 혹시 다른 사람을 착각한 게 아니냐? 네가 상상으로 만들어 낸 존재라거나.”

“아뇨. 그 정도는 구분해요. 분명히 저였어요.”

세크리트의 눈썹이 휘어졌다. 그는 자신의 발명품에서 중대한 결함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신음을 흘렸다.

“왜 그래요?”

“전례가 없던 일이라 그렇단다. 저주에서 비롯된 심상 세계는 제각각 다른 형태를 이루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단다. 그 세계를 누비는 주인공은 저주에 걸린 본인이라는 점이지.”

세크리트는 저주에 걸린 이를 중심으로 온갖 비현실적이고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라고 했다. 대부분의 저주는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헌데 로난은 누워서 옹알이하는 자신을 보았다. 목도한 풍경은 악의가 느껴지거나 비현실적이기는커녕 놀라우리만치 사실적이고 담담했다. 그가 거닐었던 세계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느꼈는데···그건 심상 세계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기억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계속해 보거라.”

세크리트가 메모를 재개했다. 잠시 고민하던 로난이 한층 무거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숨겨봤자 해결되는 일도 아닐 터였다.

“그리고···아버지를 봤어요.”

“아버지?”

“네. 생긴 걸 직접 본 건 아닌데···정황으로 보나 뭐로 보나 그건 분명 제 아버지였어요. 제가 베어야 하는 저주는 아버지였고, 제게 저주를 건 것도 아버지였어요.”

로난은 아버지일 것으로 추측되는 기괴한 그림자에 대해 설명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세크리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도 없었고,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는데 아버지의 감정은 또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는 게냐? 게다가 그림자 형태의 아버지가 갓난아기인 네게 저주를 거는 장면을 목격했고?”

"정확해요."

“으으음···기존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고 했지?”

“네. 전혀요. 원래 잊고 살았던 건 엄마도 마찬가진데 이 양반은 차원이 달라요.”

그림자의 형태나 목소리를 떠올리려 할 때마다 머리가 아파왔다. 뇌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관장하는 부분만 칼로 도려내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살아오면서 부모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로난의 기억이 시작되는 부분, 그러니까 ‘어린 시절’로 인식되던 과거에는 이미 두 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두 번 정도는 이릴에게 물어봤을 만도 한데 그런 기억조차 없었다. 세크리트가 말했다.

“흠, 일단 지금까지의 정보로 추측해 봤을 때···너는 기억을 봉인 당한 것 같구나.”

“기억이 봉인돼요?”

“그래. 네 증상과도 일치한단다. 저주를 건 사람이 아버지라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지. 자신의 정체와 네게 저주를 걸었다는 사실을 지우기 위해서 기억을 봉인한 게야.”

그럼 이릴도 기억을 봉인당한 걸까? 로난이 재차 질문했다.

“그럼 버드나무나 어머니, 갓난아기인 저를 본 것은···.”

“네 봉인당한 기억과 아버지의 기억이 저주에 뒤섞여서 구현됐을 가능성이 크지. 저주를 걸고 기억을 봉인할 당시 아버지의 기억 일부가 네게 넘어간 게야. 기억을 다루는 마법은 그런 경우가 종종 있거든.”

“···왜 그런 짓을 한 걸까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자식의 몸에 열 개씩이나 되는 저주를 거는 자의 사고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만년필을 내려놓은 세크리트가 말을 덧붙였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말이다.”

로난이 쓰게 웃었다. 첫 번째 해주는 그렇게 끝이 났다. 세크리트는 지금까지 밝혀진 두 개의 금제도 아마 마나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 설명했다.

“아마 이 금제 두 개만 해제해도 너는 남들과 똑같이 마나를 다루고 느낄 수 있을 게다.. 연구가 완료되는 대로 연락을 주마.”

“고마워요. 이제 가볼게요.”

“그래, 고생 많았다.”

세크리트가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서재 곳곳에 있는 조명에 일괄적으로 불이 들어왔다. 눈꺼풀을 움찔이던 에르제베트가 기지개를 피며 일어났다.

“으응···끝났어요?”

“엉. 기다려줘서 고맙다.”

“후후, 이걸로 로난 님은 제게 빚이 하나 생기신 거예요···.”

에르제베트가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로난에게 마음의 빚을 만들어 두는 게 그녀의 목적인 듯 했다. 그때 입에 물려 있던 머리카락이 가슴께로 떨어졌다.

“어···?”

검보랏빛 머리카락은 수 가닥씩 뭉텅이져 있었다. 어쩐지 촉촉해진 머리채를 본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자, 잠시만요. 이, 이건 그러니까···!”

“괜찮아. 나도 잘 때 침 흘려.”

“그 액체일 리가 없잖아요! 당신 정말···”

“에르제베트. 돌아가는 법은 알고 있느냐? 내 마나가 거의 바닥난 탓에 문을 열어줄 수가 없구나.”

“네?”

에르제베트가 뭐라 말을 이으려는 차였다. 세크리트가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뒤늦게 이성을 찾은 에르제베트가 다소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애초에 그거 때문에 기다렸는걸요.”

“마나는 충분히 남아 있고?”

“하.”

헛웃음 친 에르제베트가 말없이 서가로 걸어갔다. 그녀는 벽면에 붙어있는 책장에서 총 열 권의 책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빈자리를 향해 주문을 영창했다.

“델피림. 루나지에. 카쉬파.”

-쿠구구구···

그러자 책장이 서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나타난 좁은 복도를 본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지랄 맞은 곳이긴 하네요.”

“괜히 학생들이 나와의 면담을 꺼리는 게 아니지.”

장식 하나 없는 복도의 저편에는 시커먼 어둠만이 드리워 있었다. 문을 연 에르제베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봤죠?”

“역시 대단하구나 에르제베트. 수석다운 솜씨야.”

“흐흥, 만나 봬서 반가웠어요 세크리트 교수님. 다음 수업 때 뵐게요.”

칭찬을 들은 에르제베트가 히죽히죽 웃었다. 로난은 어쩐지 그녀를 다루는 법을 알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왔을 때처럼 손을 잡고 복도에 들어섰다. 인사를 하기 위해 뒤를 돌아본 로난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몸이···.”

“음? 아아, 해가 뜨고 있는 모양이군.”

작아진 손을 본 세크리트가 피식 웃었다. 그의 몸은 점점 줄어들며 옷에 삼켜지고 있었다. 세크리트는 하늘거리는 소매를 흔들며 인사를 보냈다.

복도를 걷던 로난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세크리트는 완전한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앳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또 보자꾸나.”

어둠이 한층 짙어지나 싶더니 갑자기 눈앞이 밝아졌다. 로난과 에르제베트는 숲 속의 오두막이 아닌 필레온 대광장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손을 놓은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마지막까지 제멋대로구만.”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한 거예요. 호수 위로 전이됐다는 학생도 있다 들었으니까.”

“허.”

숨을 들이쉬자 상쾌한 아침 공기가 폐를 채웠다. 삐죽삐죽 솟아난 첨탑들 사이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대광장을 비추는 포근한 서광 속에서, 로난은 물결처럼 일렁이는 자연 상태의 마나를 볼 수 있었다.

“신세 많이 졌어 에르제베트. 고마워.”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참, 제가 준 브로치는 잘 가지고 계시죠?”

“아, 그거.”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안주머니를 뒤적인 로난이 브로치를 꺼내 들었다. 입학식 날 받은 이후로 처음 세상에 나오는 것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브로치를 본 에르제베트가 눈웃음쳤다.

“후후, 그렇게 늘 품에 지니고 다니시다니. 그렇게 애지중지하지 않으셔도 로난 님께 아칼루시아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고요.”

“아니, 그냥 바빠서 까먹고 있던 건데.”

“숨기지 않아도 좋아요. 사자의 초대장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성에 방문하시는 날을 고대하고 있을게요.”

약간 열이 받을 정도로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에르제베트는 로난이 아칼루시아의 일원이 된다고 굳건하게 믿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 제안을 받은 뒤로도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 향후 동선을 계획하던 차에 에르제베트가 몸을 돌렸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아데샨 언니한테 안부 전해 주세요.”

“오냐.”

“저한테 빚진 것도 잊지 마시고요.”

에르제베트는 그 말과 눈웃음을 남긴 채 떠났다.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난은 아직은 어색한, 마나가 산재하는 풍경을 가로질러 기숙사로 돌아갔다.

침대에서는 시타가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로난은 지금 이 순간에도 몸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을, 기괴한 문자들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아홉 개라···.”

눈이 자꾸만 감겼다. 오늘의 첫 수업인 사냥술이 오후에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로난은 시타의 깃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잠이 들었다. 눈꺼풀이 만든 어둠 속에서 붉고 푸른 마나가 회오리치는 것이 보였다···

****

-다각···다각···다각···다각···.

로난이 막 잠들었을 무렵, 필레온의 서문으로 마차가 한 대 들어섰다.

여섯 마리의 백마가 끄는 화려한 육두 마차였다. 마차의 뒷면에는 드래곤을 밟고 있는 기사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마차는 아직 잠이 덜 깬 부지를 천천히 가로질러 들어왔다.

“정지.”

목적지에 도착한 마부가 고삐를 당겼다. 멈춰선 마차의 옆에는 로난이 지내는 나바르도제 관이 그 장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이윽고 달려온 마부가 문을 열자 장신의 중년 남성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몸을 몇 겹씩 감싼 화려한 의상, 암청색 머리카락과 가지런히 기른 콧수염이 인상적이었다.

날카로운 눈매로 기숙사 건물을 훑던 사내가 불편한 듯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서 지내는 건가.”

“한동안 격조했습니다 공작님.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그 순간 사내 앞의 공간이 찢어지며 한 노신사가 나타났다. 목까지 흘러내리는 수염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노신사의 얼굴을 알아본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잘 지냈소 크라티르. 그대의 마법은 어째 갈수록 격이 높아지는군.”

“허허, 공작님의 위엄만큼이나 하겠습니까. 슐리펜 군도 잘 지내고 있답니다.”

“어련하겠소. 다만 필레온의 위상에 비해 건물이 누추해 보이는군. 그랑시아 가에서 자금을 댈 테니 증축해볼 생각은 없소?”

필레온의 교장 크라티르는 대답하는 대신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사양의 의미였다.

공작이라 불린 사내는 다소 불쾌한 듯 입술을 비틀었지만, 그 이상의 표현은 하지 않았다. 오늘의 방문 목적은 학생 복지 개선이 아니었으니까.

“무리한 요청을 들어줘서 고맙소. 주말에는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아서.”

“이해합니다. 워낙에 무거운 자리에 앉아 계시니까요.”

“내 직위 때문에 허락한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소. 그럼, 지금 바로 만날 수 있겠소?”

“음, 사람을 한 번 보내보지요. 워낙에 부지런한 학생이니 아마 일어났을 겁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소. 내가 직접 올라가지.”

그 말과 함께 공작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허리춤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롱소드 한 자루가 매달려 있었다. 대장장이 도론의 걸작 중 하나. 혹한을 머금은 검 페일 로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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