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46화 (46/333)

< 46. 침식(2) >

#46

로난이 말했다. 시선은 돌란에게 고정된 채였다.

“공작님.”

“음?”

“혹시 별의 도래라는 말 들어 보셨어요?”

“별의 도래···?”

공작이 갸웃거렸다. 의외로 돌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어깨 위로 다시금 올라오고 있는 마나는 그가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뭐가 됐든 네뷸라 클라지에와 관련된 건 확실해 보였다. 로난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조만간 제국 전역에 퍼질 이야기니 그냥 말씀드릴게요. 우선, 별의 도래는 어느 날 하늘에서 종말이 내려온다는 날이에요. 그란 카파도키아를 파괴한 건 네뷸라 클라지에라는 조직이고요.”

“네뷸라 클라지에···?”

“네. 방금 이야기한 별의 도래라는, 세 살 배기 애새끼도 쪽팔려할 헛소리를 믿는 저능아들의 모임이죠. 문제는 폭력적인 저능아들이라 자꾸만 범죄를 저지른다는 점이에요.”

로난은 자신의 경험과 심문관 카라카에게 들은 정보를 적당히 짜집어서 말했다. 사악한 마법으로 동굴 거인을 조종했던 일부터 여지껏 사고인 줄 알았던 굵직한 사건들의 배후에 그들이 있었다는 사실까지.

“그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공작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그랑시아의 가주인 자신이 그런 거대한 비밀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어 하는 것 같았다. 그가 의심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는 그걸 다 어떻게 알아낸 건가? 체포가 이루어진 건 전대 검성이 개입한 뒤라고 들었는데, 그 전에 고문이라도 한 건가?”

“앗, 들켰네요.”

익살스레 웃은 로난이 입을 가렸다. 물론 정보 대부분은 카라카가 캐낸 것이었지만, 자신이 로돌란에 갔었다는 사실까지 굳이 밝힐 필요는 없었다. 그는 돌란을 곁눈질하며 입을 열었다.

“네. 제가 직접 뱉어내게 했어요.”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돌란의 무덤덤해 보이는 눈빛 속에는 맹렬한 살기가 준동하고 있었다.

걸려들었어. 로난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둘 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의리가 없더라구요. 악당들이 다 그렇지만, 그 자식들은 심했어요. 팔다리 좀 잘랐다고 술술 뱉더라니까요?”

아셀과 마르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로난은 일부러 이야기를 부풀려서 말했다. 카라카의 심문을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뭐, 아무튼 그래서 엘프는 귀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걸 알았죠. 칼을 가져다 대지도 않았는데 오줌을 지리면서 발버둥을 치더라니까요? 어찌나 추하던지···”

“그만. 그쯤 하면 됐네. 어차피 로돌란에서 공문이 올 테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군.”

공작이 손을 들어 로난의 말을 잘랐다. 로난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매만지던 공작이 침음을 흘렸다.

“그 많은 동굴 거인을 혼자서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느꼈지만···자네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군.”

“도론 영감과 그 도제랑은 친구였거든요. 화가 많이 났어요.”

“그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만···음? 돌란, 어디 불편한가?”

“예? 아, 아닙니다. 공작님.”

“마나가 거칠군. 피곤하면 잠시 쉬고 오게.”

돌란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그와 함께 온 기사도 이상하다는 듯 돌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돌란은 공작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공작님.”

필사적으로 추스리려 하고는 있었지만, 돌란의 마나는 이제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사나워져 있었다. 어김없이 틱틱거리는 반짝임을 함유한 채.

‘반응을 보니 제법 친했나 보군.’

로난은 돌란에게 직접 화두를 던지지는 않았다. 아직 정보의 신뢰성도 없거니와, 돌란이 그게 뭐냐고 잡아떼 버리면 끝이었으니까.

섵불리 행동했다가는 오히려 로난이 의심받을 수도 있었다. 충직한 기사를 의심하는 수상한 놈으로. 그때 회중시계를 꺼내서 확인한 공작이 침음을 흘렸다.

“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얼른 내 상만 주고 가야겠어.”

“네? 방금 주신 거 아니에요?”

“그건 도론 장인이 주신 걸 전달했을 뿐이지. 설마 그게 그랑시아의 보답이라 생각한 건가?”

공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기사들이 가져온 상자 세 개 중 하나는 공작의 앞에 놓여 있었다. 공작이 상자를 열자 찬란한 빛이 새나왔다.

내용물을 본 세 사람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가장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마르야였다.

“이, 이건···!”

“알고 있나? 하긴 자네는 상인이니 모르는 게 이상하겠군.”

상자에는 백금색으로 번쩍이는 금속 패가 아홉 장 들어 있었다. 패의 앞면에는 드래곤을 밟고 있는 기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그랑시아 가의 어음패. 사실상 제국령 전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일회성 자유 교환권. 이미 한 번 사용한 적이 있는 로난에게는 더욱 익숙한 물건이었다.

“받게.”

공작은 어음패를 인당 세 장씩 나눠주었다. 패를 받아드는 아셀과 마르야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저, 정말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걸까요···?”

“그날 자네들이 지켜낸 것을 생각하면 백 장도 모자라. 가신들과도 상의해서 수여하는 것이니, 필요한 상황에 재량껏 쓰도록.”

로난도 헛웃음을 치며 어음패를 받아들었다. 슐리펜의 치매가 재발하지 않는 이상 다시는 만질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다시 받게 될 줄이야.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어음패 따위가 아니었다. 보상을 전달한 공작이 돌아갈 채비를 하는 차였다. 별안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로난이 책상 밑의 서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음? 뭐 하나?”

“아, 공작님께 보여 드릴까 하던 게 있었는데 잠시만요···오, 찾았다.”

로난은 웬 공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낱장을 훑기 시작했다. 속지에는 앞뒷면으로 무언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공작이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그게 뭐지?”

“제가 고문을 통해 알아낸 정보를 적어둔 거예요. 미약하게나마 수사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공작님한테는 먼저 보여드릴까 했는데···.”

물론 추악한 거짓말이었다. 공책의 정체는 로난이 평소에 사용하는 낙서장이었다.

로난은 불을 뿜는 시타의 그림이나, 루시가 알려준 차 끓이는 법 같은 자질구레한 정보를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검토했다. 이윽고 공책을 덮은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씁, 역시 안 되겠네. 너무 지저분해요. 그냥 내일까지만 정리하고 우편으로 보내드릴게요.”

“싱겁군.”

“막상 내용을 보면 생각이 바뀌실 거예요. 비명 속에서 추려낸 정보 중에는 재미있는 게 제법 있었으니까. 가령···”

돌란의 시선은 대놓고 로난의 낙서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일부러 말꼬리를 끌던 로난이 히죽 웃었다.

“아하유테라는 존재에 대한 정보라든가.”

그 순간 돌란의 눈이 커졌다. 한순간 반짝이는 마나가 끓어오르듯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로난은 정확히 같은 자리에 노트를 집어넣었다. 공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하유테? 이상한 이름이군.”

“동감해요. 치질 걸린 원숭이한테나 붙여줄 만한 이름이죠.”

돌란이 이를 악물었다.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그랑시아 공작은 떠났다. 그는 방을 떠나기 전 한 번 더 그란 카파도키아를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네. 자네들의 발전을 기대하고 있겠어.”

“또 봐요, 공작님.”

로난은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남은 것은 일이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뿐이었다. 벙쪄 있던 아셀과 마르야가 로난에게 다가왔다.

“로, 로난···이,이,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

“야, 고문 얘기는 뭐야? 너 사람 죽였어?”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그랑시아 공작과 대면했다는 점, 생전 처음 듣는 비밀 조직의 이야기 때문에 얼이 빠져 있었다.

“흐으음···.”

로난이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아셀과 마르야. 어차피 마지막까지 함께 갈 인원들이라 언젠가는 진실을 말해 줄 필요가 있었지만, 당장 오늘 벌어질 일에 개입시키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란이라는 작자, 틀림없이 오러를 개화했다고 했지.’

결단을 내린 로난이 일어섰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셀과 마르야를 적당히 달래서 돌려보낸 뒤 방을 나섰다.

로난의 목적지는 나바르도제 관의 맨 위층이었다. 드넓은 복도를 헤매던 그는 유달리 화려한 문짝 앞에 멈춰 섰다. 문을 거칠게 두드린 지 머지않아, 오늘따라 익숙한 상판대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

그날 밤.

음산한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구름 뒤편에 떠오른 보름달은 장막 뒤의 촛불처럼 미약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성탑에서 경계를 보던 수위들은 일출 전에 달이 나타날까 안 나타날까라는 주제로 내기를 하고 있었다.

-훙!

그때 그림자 하나가 필레온의 성벽을 넘었다. 빠르게 수위들을 지나친 그림자는 곧장 부지 깊은 곳으로 향했다. 기척을 숨긴 그림자의 걸음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그림자가 고개를 들었다. 밤의 그늘에 잠긴 나바르도제 관은 꼭 흡혈귀의 고성처럼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건물의 측면으로 이동한 그림자는 눈짓으로 층수를 세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그가 목적지로 삼은 호실에는 불이 들어와 있지 않았다. 단번에 도약한 그림자가 3층 어느 호실의 발코니에 사뿐하게 착지했다.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지 않았다. 훤히 보이는 방 안쪽에는 온갖 고급스러운 가구들, 그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잠든 소년의 뒷모습이 보였다. 품을 뒤적이던 그림자가 기하학적인 문양이 그려진 양피지 하나를 꺼내서 창문에 붙였다.

-슈아아아아···

몇 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창문은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창문이 완전히 녹아내리기 전에 방 안쪽으로 들어섰다. 소년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퓨우우우···커어어억···.”

코 고는 소리가 천박했다. 그림자는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책상 밑의 서랍을 열었다. 위에서 두 번째 칸을 잡아당기자 너덜너덜한 공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으득. 그림자의 입속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빠르게 공책을 챙긴 그림자는 잠든 소년에게 몸을 돌렸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공책이 아닌 예리한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단검을 치켜든 채 소년에게 다가갔다.

저벅.

저벅.

저벅.

“······?”

그림자가 소년과 세 발자국 거리에 도달하는 순간이었다. 문득 이상함을 느낀 그림자가 황급히 이불을 들쳤다. 두꺼운 베개 네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커거거거걱!”

그 순간 다시금 코 고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림자는 그제야 그 소리가 위쪽에서 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고개를 든 그림자는 샹들리에에 거꾸로 매달려서 코 고는 소리를 내고 있는 검은 머리의 소년과, 빨간 눈동자의 괴생명체를 볼 수 있었다.

“커거걱···흐흐, 내가 말했지 인마. 오늘 밤에 온다고.”

탓! 매달려 있던 소년이 제비를 돌며 창문 앞에 착지했다. 자연스레 그림자의 퇴로를 차단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의 손에는 난생 처음 보는 형태의 검이 쥐어져 있었다.

로난이 말했다.

“날 죽여야 할 이유가 너무 많거든.”

그림자는 침착하게 다음 행동을 취했다. 단검을 도로 집어넣은 그가 롱소드의 칼자루에 손을 얹는 차였다. 뒤쪽에서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명할 수 있나.”

“······!”

오싹한 소름이 전신을 타고 내달렸다. 심해처럼 무겁고 낮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린 그림자의 입이 처음으로 벌어졌다.

“어째서···여기에···.”

“설명할 수 있냐고 물었다.”

인간의 형체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구름이 걷히며 달빛이 방 안에 드리웠다. 고즈넉한 빛줄기 아래로 암청색 머리칼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소년의 손에는 미스릴로 만든 롱소드가 쥐어져 있었다. 푸르스름한 검 끝이 그림자를 겨누었다. 슐리펜 시니반 데 그랑시아가 입을 열었다.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나. 돌란.”

“···도련님.”

돌란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백색의 검신이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섬뜩하게 점멸하는 마나가 돌란의 어깨 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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