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침식(3) >
#47
몇 시간 전.
로난은 유달리 화려한 방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문이 열리며 오늘따라 익숙한 상판대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난? 네가 왜···”
“일단 좀 들어가자.”
슐리펜은 벌써 교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쾅! 다짜고짜 쳐들어온 로난이 방문을 닫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지?”
“야, 뭣 좀 물어보자. 너네 아버지 호위 기사 중에 돌란이라는 놈 있지. 올해로 몇 년 차냐?”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다.”
“새끼야, 급하니까 묻는 말에나 대답해. 우리 누나 근황 알고 싶지 않아?”
“돌란 콘체스토 경을 말하는 거라면 올해로 근속 4년차다. 실력과 특유의 충성심으로 빠르게 호위 기사 자리를 꿰찼지. 일 년쯤 전에 검을 겨뤄본 적이 있었는데, 오러의 특성과 활용법이 제법 인상적이었다.”
“그랑시아도 좆됐네. 여러 가지 의미로.”
4년이라는 말을 들은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강림 사태 당시 강자들이 보이지 않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슐리펜이 젊은 나이에 공작 자리를 계승했던 이유도.
“그럼 너네 아버지는 얼마나 강하시냐? 그 돌란이라는 놈보다는 강해?”
“페일 로드의 주인을 우습게 보지 마라. 호위 기사 따위는 전원이 달려들어도 아버님을 이길 수 없다.”
“그건 다행이네.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놀라지 말고 잘 들어라.”
로난은 슐리펜을 데리고 문가에서 떨어졌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와 계획을 하나씩 읊어 주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슐리펜의 표정이 점진적으로 굳었다.
“···그래서 돌란인지 놀란인지 하는 놈이 날 죽이러 올 거야. 아마도 오늘 밤에.”
“지금 나보고 그 이야기를 믿으라는 건가.”
“확인해 보면 될 거 아냐 인마. 내 방에 숨어 있다가 그 자식이 오면 나와서 같이 조지면 돼.”
“돌란 경은 그럴 인물이 아니다.”
“그래. 너까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4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랑시아의 밥을 훔쳐 먹을 수 있던 거겠지. 아무튼, 난 말했다.”
로난은 그 말을 남긴 채 방을 나섰다. 그가 떠난 이후로도 제자리에 서 있던 슐리펜이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
다시 밤.
고즈넉한 빛줄기 아래로 암청색 머리칼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스름한 검 끝이 그림자를 겨누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슐리펜 시니반 데 그랑시아가 입을 열었다.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나, 돌란.”
“···도련님.”
돌란이 회답하듯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백색의 검신이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의미가 자명한 행동이었다. 슐리펜의 얼굴이 굳었다. 검은 후드를 눌러 쓴 돌란의 입에서 나지막한 읊조림이 새나왔다.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쾅! 별안간 돌란이 오른발로 바닥을 찍었다. 그 자리를 중심으로 퍼져 나간 파장이 방을 뒤덮었다. 갑자기 몸이 확 무거워진 것을 느낀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씨발, 뭐야?”
그와 동시에 몸을 비튼 돌란이 로난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거대한 십자 형태의 검기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니미!”
욕지거리를 내뱉은 로난이 무거워진 라만차를 휘둘렀다. 콰아앙! 방의 절반을 집어 삼키는 폭발과 함께 남아 있던 창문이 모조리 터져 나갔다.
슐리펜의 눈이 커졌다. 그의 몸 또한 사지에 모래주머니를 찬 것처럼 무거워져 있었다. 오러가 영향을 미치는 범위만 보면, 개화가 아닌 각성 단계에 근접한 수준이었다.
“이 무슨···!”
하지만 당황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폭발을 등지며 쇄도한 돌란은 어느새 슐리펜의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쉬이익! 빠르면서도 묵직한 참격이 슐리펜의 목을 노리며 날아왔다. 마나로 근력을 강화한 슐리펜이 황급히 검을 들어 올렸다. 캉!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실력을 감추고 있었나.”
슐리펜이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검격을 받아낸 손목이 징징 울리고 있었다. 검술 실력도, 오러의 위력도 기존에 슐리펜이 알고 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돌란은 계속해서 검격을 이어 나갔다. 캉! 캉! 캉! 허공에서 불씨가 한 번 튀길 때마다 슐리펜이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슐리펜을 벽에 몰아넣은 돌란이 입을 열었다.
“왜 오러를 안 쓰시는 겁니까.”
“네가 알 바가 아니다.”
“설마 이 상황에도 사람들이 다치는 걸 걱정하시는 겁니까. 하긴 도련님의 오러는 아직 넓은 범위로밖에 다루지 못하셨죠.”
슐리펜은 대답하지 않았다. 돌란은 연민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감입니다 도련님. 도련님과는 마지막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는데, 저 어디서 굴러먹은 지도 모르는 놈이 모든 걸 망쳐버렸습니다.”
“···언제부터 배신한 거냐. 무엇이 네 충정을 더럽힌 거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도련님. 저는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뭐라?”
대화 도중에도 합은 이어지고 있었다. 슐리펜이 눈살을 찌푸렸다. 돌란은 담담하게, 그러나 훗날을 위해 남겨둔 말을 너무 빨리 꺼내게 되어 아깝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애초부터 그랑시아의 기사였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 순간 슐리펜의 눈빛이 변했다. 한동안 반파된 방 안에서는 쇠 부딪히는 소리만 격렬하게 울려 퍼졌다. 잠시 후, 침묵하던 슐리펜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나왔다.
“······확인했다. 알아서 해라.”
“네?”
돌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뒤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우, 답답한 새끼야. 그 한마디를 듣겠다고 이 지랄을 떠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단검은 내 머리라도 긁어 주려고 꺼낸 거였겠냐?”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 한동안 그랑시아에 피바람이 불겠군.”
“뭣···!”
섬뜩한 위화감을 느낀 돌란이 고개를 돌렸다. 검기에 썰려 죽었어야 할 로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지루한 경기라도 보는 사람처럼 소파에 앉아 하품하고 있었다.
“···어떻게?”
“거꾸로 했어야지 등신아. 저 새끼한테 검기를 쏘고 나한테 달려들었어야지.”
로난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물론 로난이 마나를 자를 줄 안다는 사실을 모르는 돌란은 영문을 모른 채 벙쪄 있을 뿐이었다.
“뭐, 그래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만.”
사실 돌란의 운은 공책을 가지러 들어온 순간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돌란은 분명 강했지만, 로난과 슐리펜을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무난하게 검기를 베어낸 로난은 슐리펜이 같잖은 연극을 하는 동안 계속 소파에 앉아 있었다. 돌란이 직접 배신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 전까지 개입하지 말 것. 그것이 슐리펜의 요구 사항이었다.
‘그나저나 마나가 보이니까 참 편하네.’
솔직히 돌란의 오러가 발동되는 순간은 좀 당황했다. 갑자기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몸이 확 무거워졌으니까.
헌데 정신을 좀 집중해 보니, 돌란을 중심으로 나무뿌리처럼 뻗어난 마나가 눈에 들어왔다. 기분 나쁜 반짝임을 함유한 마나의 잔뿌리는 두 소년의 팔다리에 엉겨붙어 있었다.
라만차로 몸에 붙은 뿌리들을 잘라내자 무거운 것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로난은 여전히 뿌리를 매단 채 칼을 휘두르고 있는 슐리펜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괴물 같은 새끼···.”
자신도 충분히 빠르게 강해지고 있다 생각했는데, 저 자식은 어째 더 빨리 강해지는 것 같았다.
“그럼, 끝낼까.”
어쨌든 연극은 끝났다. 로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닥을 박차며 달려나간 그가 돌란을 향해 라만차를 휘둘렀다.
“크윽!”
캉! 황급히 몸을 비튼 돌란이 로난의 검을 받아쳤다. 그 순간 슐리펜의 검격이 돌란의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로난이 참격을 연속으로 날리며 낄낄거렸다.
“포기해, 병신아. 넌 끝났어.”
“닥쳐라···!”
“시릴라가 널 기다리고 있어. 에두온은 이미 뒈졌고.”
“네놈이 감히!”
하지만 분노를 실어 검을 휘둘러 봐도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암석 같던 돌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한 명의 공격을 막아내면 다른 한 명의 공격이 상흔을 남겼다. 2:1의 구도가 이어질수록 돌란의 로브는 점점 넝마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
불현듯 어지럼증을 느낀 돌란이 휘청였다. 몸이 빠르게 차가워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돌란은 자신의 몸에 난 상처들에서 과하게 피가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뭐지? 이게 왜···’
경미한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꼭 펌프로 빨아들인 것처럼 울걱울걱 샘솟고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돌란이 시선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어디 한눈을 팔아?”
서걱. 빈틈을 파고든 라만차가 돌란의 옆구리를 가르며 지나갔다. 촤아악! 분수처럼 솟구친 선혈이 바닥을 적셨다.
“허어억!”
헛숨을 들이킨 돌란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오른발이 바닥을 찍었다. 나무뿌리 같은 오러가 방을 뒤덮음과 동시에 소년들이 느려졌다. 그 와중에도 과다한 출혈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한순간의 틈을 타 몸을 뺀 돌란이 주위를 살폈다. 기괴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방울로 변해서 천장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저건···?”
핏방울은 모두 샹들리에에 매달려 있는 괴생명체에게 모여들고 있었다. 날개를 접은 채 피를 흡수하던 시타가 돌란을 바라보며 갸웃거렸다.
“뺘?”
“제기랄, 너는 또 뭐냐!”
돌란이 시타를 향해 검기를 쏘았다. 기력을 많이 소모해서 그런지 많이 작아진 검기가 쏘아졌다. 시타는 그대로 샹들리에에서 뛰어내리며 가볍게 공격을 피했다. 다시금 오러를 떨쳐낸 로난이 노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이 개새끼야! 어디다가 대고 그딴 걸 쏴!”
로난이 달려나갔다. 침대를 밟고 도약한 그가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둘렀다. 마침 주변에 일렁이던 마나의 흐름이 그의 검로가 되어 주었다.
“흐읍!”
피하기에는 늦었다. 양손으로 칼자루를 쥔 돌란이 검을 눕힌 채 들어 올렸다. 마나를 타고 내리꽂힌 참격은 그대로 검신과 돌란의 오른팔을 관통하며 지나갔다. 서걱! 검이 부러짐과 동시에 돌란의 오른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크아아아아악!”
지진이 난 것처럼 시야가 흔들렸다. 정신을 잃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돌란은 혀를 깨물며 필사적으로 기절하는 것을 막았다.
더는 방법이 없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서 소년들을 향해 검기를 쏘아낸 뒤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콰아아앙! 그가 몸을 던지기 무섭게 방 안에서 폭발이 솟구쳤다.
“커억! 허억···! 허어어억···!”
바닥을 구른 돌란이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바르도제 관 대부분의 호실이 불이 켜져 있었다. 소란을 듣고 깬 학생들이 발코니로 나와 있었다.
“저거 봐! 누구지?”
“도둑이다!”
“바, 방금 폭발음이 들리지 않았어?”
돌란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여기서 잡혔다간 모든 게 끝이었다. 저 멀리서 수위들의 갑옷이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쩌다가···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다리에는 힘이 남아 있는 게 다행이었다. 돌란은 각종 건물 사이를 지나 한적한 공터에 도달했다. 필레온의 성벽은 이제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저기만 넘으면 된다. 한 줌의 희망이 돌란의 가슴 속에서 반짝이려는 찰나, 갑자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진 4년간 들어온,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왜 오러를 안 쓰냐고 했지.”
“슐리펜!!”
어느새 방을 빠져나온 슐리펜이 그의 옆에서 달리고 있었다. 그의 코어가 맥동하는 것을 본 돌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슐리펜이 옅게 한숨을 내쉬며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네 추측이 맞다.”
슐리펜이 검을 휘둘렀다. 폭풍의 편린이 돌란을 향해 쏘아졌다. 돌란에게 적중한 오러는 그대로 그의 몸을 휘감으며 반경이 10m에 이르는 거대한 회오리를 만들었다.
-콰콰콰콰!
다만 회오리를 구성하는 것은 일반적인 바람이 아닌, 아닌 가닥가닥이 검격과도 같은 칼날의 바람이었다. 처절한 비명이 회오리 속에서 울려 퍼졌다.
“크아아아아!!”
슐리펜의 오러로 이루어진 회오리는 필레온의 성벽 위까지 솟구쳤다. 돌란의 비명은 머지않아 바람 소리에 삼켜졌다. 로난이 도착한 것은 폭풍검이 완전히 사그라든 뒤였다.
돌란은 붉은 무언가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의 몰골을 본 로난이 헛구역질했다.
“우욱, 씨발. 이거 살아는 있는 거냐?”
“이론상으로는.”
슐리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숨은 쉬고 있으니 아마 맞을 터였다. 그는 돌란의 피로 범벅이 된 교복을 보며 혀를 찼다. 이래서 쓰기 싫은 것도 있었는데.
“쯧, 더럽군.”
“빠야~”
그때 로난의 어깨 위에 앉아있던 시타가 두 소년의 몸과 옷에 묻은 피를 흡수했다. 말끔해진 교복을 본 슐리펜의 눈이 커졌다. 물끄러미 시타를 바라보던 그가 아주 작게 읊조렸다.
“······고맙다.”
“뺫!”
시타가 날개를 파닥이며 울었다. 서로가 서로를 썩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머지않아 중갑을 입은 수위들이 들이닥쳤다.
“이, 이게 무슨 일인가!”
“침입자? 그런데 상태가 왜···우웁.”
“헛, 나비로제 님!”
그때 수위들 사이로 나비로제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평소의 이미지와는 전혀 연상되지 않는 펑퍼짐한 잠옷 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마 자다가 바로 뛰쳐나온 모양이었다.
“내가 이 말을 이렇게 빨리 다시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자다가 나와보니 기숙사는 폭발해 있고, 웬 괴인이 넝마가 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비로제는 로난과 슐리펜, 걸레짝이 된 돌란을 번갈아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우선···이 자를 포박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