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56화 (56/333)

< 56. 바이디안 산맥(5) >

#56

신상을 전부 닦은 사란테가 입을 열었다.

"못 본 새 많이 변했군요. 브리기아."

"너는 그대로고. 사란테."

목소리는 옆쪽에서 들려왔다. 사란테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브리기아는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방금까지 앓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이 신전도 그래. 지나칠 정도로 변한 게 없어.”

“보아하니 세니엘께 예를 갖추러 오신 건 아닌 것 같군요.”

“뭐, 그렇지.”

“설마 당신마저 변절할 줄은 몰랐습니다. 오래된 벗을 암살자로 보내다니, 교단도 참 지독하군요.”

사란테가 헝겊을 포개어 주머니에 넣었다. 브리기아가 코웃음쳤다.

“하, 만나자마자 마비독을 퍼먹인 너도 만만치는 않아. 중화제?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르메하임의 그림자가 오크들에게 잡힌 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당신의 미숙한 연기를 도와 드린 겁니다.”

“그건 맞아. 그래도 밧줄 푸는 건 그럴싸하지 않았어?”

“네. 그 보물이 아니었다면 조금이나마 당신을 걱정했을 지도 모르겠군요. 글랑을 그런 식으로 쓰실 줄이야.”

브리기아의 손발을 묶고 있던 밧줄은 글랑이라는 보물이었다. 굉장히 질기며,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서만 풀고 묶이는 효과를 갖추고 있었다.

기절한 척 밧줄을 풀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린 사란테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나에 스며드는 독이니, 밧줄을 푸는 주문이니··· 사란테는 로난을 속이기 위해 온갖 헛소리를 지껄여야 했다.

“그래도 글랑을 풀 때 했던 말은 조금 멋있었어. ‘이 아이에게 손 대지 마라.’ 라니, 무서워서 몸이 안 움직이더라.”

“농은 그쯤 하시지요. 그냥 찾아오시면 됐을 것을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하신 겁니까? 스스로를 포박하고 오크 무리에게 붙잡히다니. 취향이 심히 염려됩니다.”

“뭐···일단 재밌잖아? 그리고 신전에서는 가능한 피를 보고 싶지 않았어. 나도 나름 저 돌멩이를 오랫동안 믿어 온 사람이니까.”

“침전물 같은 신앙이라도 남아 있어 다행이군요.”

브리기아는 헤어진 연인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세니엘 신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둥에서 몸을 뗀 그녀가 사란테를 마주보며 섰다.

“또···그런 상황극을 하면 네가 궁금해서라도 올 줄 알았거든. 바이디안 산맥은 사란테 너의 영역이니까 어차피 내 기척은 감지했을 테고. 그런데 하룻밤 내내 붙잡혀 있어도 안 오더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귀한 손님들을 모시느라 말이죠.”

“귀한 손님? 설마 아까의 인간 아이들을 말하는 건가?”

“별달리 있겠습니까.”

“···하는 짓이 기특해서 살려 놨는데 그냥 다 죽일 걸 그랬네. 괜한 연기로 힘을 뺐어.”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알았는데. 단순한 변덕이었나 보군요.”

“나이를 세는 걸 잊은 이후로는 모든 게 변덕이었지.”

브리기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사란테는 정중하게 손을 모은 채 말을 이었다.

“브리기아. 세니엘을 향한 그대의 믿음은 어디로 간 겁니까? 함께 다 코냐까지 넋이 깃들 바위를 옮기지 않았습니까?”

“뒤늦게 눈이 트인 거지. 어차피 세상은 별빛에 휩싸일 거야.”

“가짜 신의 궤변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망상이자 도피일 뿐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각자의 삶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슬슬 철이 들 때도 됐잖아. 사란테.”

짝. 별안간 브리기아가 손뼉을 쳤다. 곧이어 산맥을 뒤흔드는 듯한 괴성이 신전 밖에서 울려 퍼졌다.

“크워어어어억!”

“그아아아아!”

산발적으로 울려 퍼지는 괴성에 사란테가 미간을 좁혔다. 눈을 감자 신전을 포위하고 있는 오우거들의 모습이 보였다. 족히 서른 마리는 넘는 것 같았다.

“···괴이한 주술이군요. 숲의 폭군을 이렇게나 많이 불러모으다니.”

“이 또한 별의 은혜지.”

콰앙! 그 순간 거대한 손이 신전의 외벽을 부수며 들어왔다. 손아귀가 사란테를 움켜쥠과 동시에 벽면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전신이 피처럼 붉은 오우거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워어어어!!”

오우거는 사란테를 눈앞에 가져다 댄 채 포효했다. 브리기아가 교태로운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네 말처럼 우리는 수천년지기 친구니까 특별히 내가 받은 명령을 알려줄게. 사란테 레마티온을 회유해라. 불가능한 경우 죽여라. ”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군요.”

“어떡할 거야? 너 정도의 실력자라면 지부장 정도는 거뜬해. 머지않아 교주의 측근 자리도 꿰찰 수 있을 테고.”

사란테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연한 눈빛으로 오우거의 상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그의 입이 벌어졌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죽음을 받아들였을 겁니다.”

“음?”

“솔직히 지쳐 가던 참이었습니다. 위대한 넋은 여전히 답이 없고, 교단과의 숨바꼭질은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끝날 조짐이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목소리가 담담했다. 오우거의 이빨이 눈앞에서 번들거리고 있었음에도 사란테의 표정은 잠을 자는 사람처럼 평안했다. 브리기아가 정색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입니다. 이번에야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순환을 시작하려 했죠. 하지만 요 며칠간, 저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희망?”

“네. 세니엘은 아직 우리를 져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울려 퍼졌다. 털썩! 사란테를 쥐고 있던 오우거의 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오우거의 입에서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워아아아악!”

사뿐하게 착지한 사란테가 오우거를 향해 손가락을 휘둘렀다. 재차 바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오우거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브리기아가 사란테를 노려보며 말했다.

“후자를 선택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수긍할 생각은 없지만요.”

“유감이야. 사란테.”

브리기아가 팔을 뻗었다. 모여든 그림자가 단검의 형상을 이루며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브리기아의 입술 사이로 유언장을 낭독하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때는 같은 길을 걸었던···내 친구여.”

신전에 드리워 있던 그림자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브리기아의 오러는 이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격이 높아져 있었다. 사란테가 한숨을 내쉬듯 읊조렸다.

“드레이크 스킨. 스톰 송. 더블 토네이도.”

사란테의 발밑에서부터 펼쳐진 마법진이 신전을 뒤덮었다. 동시에 브리기아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일대의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산등성이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

“음?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나?”

“소리?”

브라움이 두리번거렸다. 한순간 누군가의 고함 같은 것이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점차 어둠에 뒤섞이는 그림자와 빽빽하게 늘어선 나무 뿐이었다. 아셀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나, 나는 못 들었는데.”

“그런가? 하하하, 내가 잘못 들었나 보군.”

“하늘에서 난 소리 아냐? 으으···구름 좀 봐.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마르야가 하늘을 바라보며 칭얼거렸다. 산맥 위를 뒤덮은 먹구름은 갈수록 그 무게감을 더해가고 있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시커먼 덩어리는 금방이라도 노호하며 비와 번개를 토해낼 것 같았다.

사란테의 신전을 떠난 일행은 한창 산맥을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왔을 때보다 짐이 늘어난 탓에 하산하는 속도가 자연스레 느려졌다. 남들보다 세 배는 큰 배낭을 매고 있는 마르야가 입을 열었다.

“아으···무겁지는 않은데 등이 자꾸 쓸리네. 로난, 유령마는 산에서는 못 부르는 거지?”

“뺘~”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타가 뺨에다가 얼굴을 부벼 봐도 마찬가지였다. 아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난?”

“잠깐 말 걸지 말아 봐.”

“으, 응.”

그는 산맥을 내려가는 내내 오늘 있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로난의 머릿속은 그가 신전까지 데리고 갔던 브리기아라는 여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뭔가 이상해.’

상태가 하도 안 좋아 보여서 이성적인 관찰을 하지 못했다. 헌데 기억을 곱씹을수록 모든 게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브리기아가 오크 무리에 붙잡혀 있던 것 부터가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오크는 먹이를 산 채로 보관하는 몬스터가 아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이미 한 끼 식사로 전락했을 터였다.

또한 마나가 아예 느껴지지 않던 것도 이상했다. 아무리 의식을 잃었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경우라면 미약하게나마 겉으로 새나오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 브리기아라는 여자의 마나는 사란테의 요술 차를 마셔서 감각이 강화되었음에도 보이지 않았다. 꼭 일부러 감춰 놓은 것처럼.

-콰아아아아!

그 순간, 굉음이 작렬함과 동시에 머리 위의 하늘이 밝아졌다. 아셀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아아악!”

“아셀! 왜 그래?!”

마르야와 브라움이 아셀에게 달려갔다. 로난은 황급히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개의 거대한 용오름이 능선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로난의 미간이 급격히 구겨졌다.

“니미, 저게 무슨···.”

용오름 주위로는 마나의 격류가 휘몰아치는 것이 보였다. 사란테의 신전이 있는 방향이었다. 요동치는 마나의 속에는 돌란에게서 보았던, 네뷸라 클라지에 특유의 반짝임이 섞여 있었다.

“뭐야 귀염둥이. 설마 천둥 소리에 놀란 거야?”

“처, 천둥이 아냐···머리가···!”

아셀이 머리를 부여잡은 채 신음했다. 한순간 뇌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충격이 덮쳐왔다. 네 사람 중 마나 감응력이 압도적으로 높은 아셀만이 느낀 감각이었다.

“이봐, 브라움.”

그때 로난이 다가왔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새하얀 막대기 하나를 꺼내 브라움에게 내밀었다.

“이건···?”

“유령마를 부르는 호루라기야. 다들 먼저 필레온으로 돌아가. 절대로 따라오지 마.”

브라움은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따라오지 말라 경고하는 로난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절대로.”

로난은 그 말을 남긴 채 곧장 왔던 길을 따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르야와 브라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이봐!”

“야! 어디 가?!”

로난의 모습은 순식간에 바위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마르야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하필이면 지금···!”

재차 떨어진 굵직한 물방울이 뺨을 때렸다. 툭. 투둑.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폭우가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쏴아아아-

산맥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비는 세상을 침몰시킬 기세로 쏟아지고 있었다. 경사면을 타고 밀려오는 빗물은 구리구리한 흙색을 띠었다.

“헉···허어억···빌어먹을···.”

토하듯이 욕지거리를 내뱉은 로난이 소매로 눈가를 문질렀다. 잠시 맑아졌던 시야는 곧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빠르게 흐려져 버렸다.

목구멍 안쪽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한 시간은 족히 달린 것 같은데도 신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올리자 폭발하듯 번쩍이고 있는 마나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지랄을···헉, 하고 있는 거야···?”

전투는 여전히 진행 중인 것으로 보였다. 두 개였던 용오름은 네 개가 되어 몸을 비틀고 있었다. 중간중간 어둠 속에서도 어둡게 보이는 그림자가 가시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후···후우···좋아.”

몇 초간 숨을 고른 로난이 재차 달리기 시작했다. 시선은 하늘에 고정한 채였다. 퍽! 그 순간  무언가 단단한 것이 로난의 반면을 강타했다.

“씨팔!”

나무나 바위의 촉감은 아니었다.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눈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불현듯 콧구멍을 파고드는 악취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염병, 이게 무슨 냄새야?”

로난이 고개를 들었다. 저 높은 곳에서는 네 개의 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안광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순간 강렬한 기시감이 로난을 덮쳤다.

“너는···.”

그때 인근의 나무 위로 벼락이 내리쳤다. 한순간 세상이 대낮처럼 밝아짐과 동시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오우거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난과 눈이 마주친 오른쪽 머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워억?”

“크워.”

“···오랜만이네.”

로난이 헛웃음쳤다. 전율이 팔다리를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다른 오우거들보다 확연하게 큰 덩치. 아름드리 나무보다 두꺼운 팔뚝. 과거 삼 일 밤낮을 겨루었음에도 승부를 내지 못한 적수가 눈앞에 있었다. 트윈 헤드 오우거를 훑어본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상태가 영 나빠 보인다?”

짧은 시간이지만 분명히 보았다. 오우거의 가슴팍에는 동굴 거인들에게 찍혀 있던 것과 같은 문양이 찍혀 있었다. 그 순간 빛이 사그라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 나온 포효가 천둥을 집어삼켰다.

“그아아아아!”

“크워어어어억!!”

이중창은 빗소리를 뚫고 산맥에 울려 퍼졌다. 오우거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땅을 박차고 달려나간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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