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57화 (57/333)

< 57. 바이디안 산맥(6) >

#57

“그아아아아!”

“크워어어어억!!”

이중창은 빗소리를 뚫고 산맥에 울려 퍼졌다. 트윈 헤드 오우거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땅을 박차고 달려나간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그때보다는 덜 걸려야 할 텐데.’

로난은 오우거의 우측으로 쇄도하며 라만차를 휘둘렀다. 칼끝이 질긴 피부를 가르는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동시에 오우거의 주먹이 로난이 있던 자리를 내리찍었다. 쾅!! 지반이 덩어리째 뒤집히며 아직 젖지 않은 흙이 튀어 올랐다. 한발 늦게 고개를 돌린 좌측 머리가 노호를 터뜨렸다.

“크워아아악!”

과연 라만차는 명검이었다. 자로 그은 듯한 자상이 오우거의 허벅지에 새겨져 있었다. 유효타를 먹이기 위해 같은 자리에 수백 번 검을 휘둘러야 했던 전생과 대조되는 결과였다.

“젠장.”

허나 로난의 표정은 영 밝지 않았다. 상처가 충분히 깊지는 않았거니와 아무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출혈이 멈추더니 묻어 있던 것마저도 빗물에 씻겨 내려가 버렸다.

그때 오우거의 발차기가 정면으로 날아왔다. 로난은 구르며 공격을 회피했다.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거대한 통나무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빌어먹을···!”

피하기엔 늦었다. 로난은 앉은 자세 그대로 칼을 휘둘렀다. 나무가 토막나며 오우거의 당황한 면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곧장 도약한 로난이 오우거의 손에 들려 있는 나무줄기에 매달렸다.

“그웍!”

오우거가 통나무를 놓았다. 동시에 나뭇가지를 밟고 뛰어오른 로난이 오우거의 가슴팍에 라만차를 꽂아넣었다. 푹! 검신의 3할 정도가 피부 속으로 파고들었다.

“크악!”

오우거는 모기라도 잡으려는 것처럼 반대쪽 손바닥으로 로난을 내리쳤다. 로난이 기다렸다는 듯이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퍽! 손바닥이 칼자루를 내리침과 동시에 라만차가 가슴 깊숙이 쑤셔박혔다.

“크아아아악!”

“그워어어억!”

두 개의 입에서 고통어린 함성이 터져 나왔다. 각혈까지 하는 걸로 보아 내장을 다친 듯 했다. 오우거의 속옷을 타고 기어올라간 로난이 다시 칼자루를 붙잡았다.

이번에 끝내야 했다. 로난은 칼자루를 아래로 잡아당기며 오우거의 눈앞까지 도약했다. 끌리듯이 뽑혀 나온 라만차가 호를 그렸다.

서걱! 왼쪽 머리의 이마에 붉은 선이 생기더니 피와 뇌수가 솟구쳤다. 형제의 죽음을 확인한 오른쪽 머리가 눈을 부릅뜨며 비명을 질렀다.

“크와아아아악!”

“너도 같이 가야지.”

서걱. 연달아 그어진 참격이 오른쪽 머리의 목을 베었다. 동맥과 목뼈가 잘리는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쿵! 오우거의 거체가 뒤로 넘어갔다. 착지한 로난이 쓰게 중얼거렸다.

“제정신일 때 싸웠다면 더 좋았을 텐데.”

오우거의 숨이 끊어지자 가슴팍에서 점멸하던 낙인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빗물에 뒤섞인 피가 경사면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못 다한 승부를 마쳤음에도 영 개운하지가 않았다. 로난은 옛 맞수의 주검을 뒤로한 채 산길을 내달렸다.

신전과 가까워질수록 주변 풍경은 점차 황량해지고 있었다. 나무들은 부러지거나 뿌리째 뽑혀 있었다. 산짐승과 오우거의 시체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용오름도, 격동하던 마나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로난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씨발.”

대지는 파종기의 밭고랑처럼 뒤엎어져 있었다. 신전을 둘러싸고 있던 숲은 울퉁불퉁한 공터로 변해 있었다.

단 하나의 기둥조차 남기지 않고 파괴된 폐허에서 신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막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웬 남녀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비집고 들려왔다.

“어···떻게···.”

“내가 말했잖아. 슬슬 철이 들 때도 됐다고.”

사란테와 브리기아의 목소리였다. 로난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폐허 한복판에서 비를 맞으며 서 있는 브리기아가 보였다. 그녀의 뒷모습에 가려진 탓인지 사란테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역시 저년이···!’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는 최대한 기척을 감춘 채 브리기아에게 접근했다. 다시금 사란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수를···부린 겁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별의 가호가 없었으면 정말로 위험할 뻔했어.”

“별의 가호라니···또 이상한 힘을···.”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브리기아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끔찍한 몰골을 본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왼쪽 팔꿈치 아래가 깔끔하게 절단되어 있었다. 옷은 거의 다 찢어져 나신에 가까운 상태였다. 반 넘게 사라진 오른쪽 귀에서는 아직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멀쩡히 서 있는 게 신기할 정도의 중상이었다.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아직 완전하지도 않은 게 이런 위력이라니···간부들이 용을 쓰면서 진급하려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아.”

그럼에도 브리기아의 목소리에서는 경쾌함이 묻어났다.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라는 안도감마저 느껴졌다.

그럼 사란테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조금씩 거리를 좁히던 로난은 마침내 사란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세니엘의 신상에 등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사제복도, 양쪽 귀도 멀쩡한 것이 얼핏 보기에는 브리기아보다 처지가 나아 보였다.

문제는 하반신이 통째로 사라져 있다는 점이었다. 원래는 허리가 있어야 할 자리 아래로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은 피가 울걱이며 샘솟고 있었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칼자루를 잡아당기며 브리기아를 향해 쇄도했다. 칼날이 목에 닿기 직전, 슬쩍 고개를 돌린 브리기아가 로난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아, 그 애네.”

브리기아가 손을 올렸다. 캉! 라만차는 그녀를 베지 못한 채 허무하게 멈춰섰다. 어느새 브리기아의 손에는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연이어 검격을 쏘아낸 로난이 토해내듯 외쳤다.

“이 개 같은 년아! 무슨 짓을 한 거냐!!”

“아까는 고마웠어. 등이 넓어서 좋더라.”

능글맞은 목소리에서 긴박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검격은 재차 틀어막혔지만 로난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캉! 캉! 캉! 두 사람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빗속에서 불똥이 튀었다. 브리기아는 로난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거나 막아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왔어? 기껏 살려줬는데 이러면 죽일 수밖에 없잖아.”

“닥쳐···!”

로난이 눈을 부릅떴다. 지맥 주변이라 그런지 마나의 흐름이 사방에 산재해 있었다. 로난은 그 중 브리기아를 향해 뻗어 있는 흐름을 따라 참격을 날렸다.

“어?”

몇 배는 빨라진 검격이 빗방울을 자르며 날아왔다. 위험을 직감한 브리기아가 황급히 방어 자세를 취했다. 카앙!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단검이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크윽!”

“뒈져라!”

로난이 재차 칼을 휘두르려는 차였다. 불현듯 스산한 기운이 로난의 뒷목을 타고 올라왔다. 본능에 따라 공격을 멈춘 로난이 몸을 뒤로 뺐다. 쾅! 그림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가시가 정확히 로난이 있던 자리에서 솟구쳤다. 가시 너머로 브리기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법인데.”

“엿 같은 기술을 쓰는군.”

자세를 다잡은 로난이 다시 브리기아를 향해 질주했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가시들이 치솟았다. 동시에 허공이 일렁이더니 각기 다른 방향에서 솟아난 가시 다섯 개가 로난을 향해 쏘아졌다.

로난은 다섯 바퀴를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검로를 따라 가시들이 절단되며 브리기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어깨 위로 칠흑처럼 검고 불길한 마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익숙한 빛무리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짓씹는 듯한 읊조림이 로난의 입술 사이로 새나왔다.

“···네뷸라 클라지에.”

“뭐? 네가 그걸 어떻게···”

로난은 대답하는 대신 검격을 쏘았다. 브리기아는 뒤로 제비를 넘으며 공격을 피했다. 발밑에 드리워 있던 그림자가 그녀의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완전히 눈빛이 변한 그녀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지?”

“댁 어머니가 말씀해 주시더군.”

“···진짜 살려둘 수 없겠는데.”

브리기아가 하나 남은 팔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콰아아! 끝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기다란 그림자의 칼날이 로난을 향해 쏘아졌다. 중상을 입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기량이었다.

“젠장!"

로난이 수직으로 검을 세웠다. 양단된 채 날아간 그림자가 산봉우리에 부딪히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공세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손가락처럼 일어난 가시들이 다시금 로난에게 달려들었다. 미처 베어내지 못한 가시 하나가 로난의 어깻죽지를 꿰뚫었다.

“으윽!”

피가 튀었다. 통증이 몰려왔지만 아파할 시간은 없었다. 그림자의 가시는 덩굴처럼 꿈틀거리며 로난을 뒤쫓았다. 거리를 좁혀야 뭐든 할 텐데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한창 가시들을 쳐내며 뒷걸음질치던 차, 갑자기 로난의 머릿속에 사란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난. 더 물러나세요.]

“썅, 놀래라. 살아 있었어요?”

[아직은요. 시간을 벌어 드리겠습니다. 틈을 타 도망치세요.]

불현듯 손끝이 저릿하게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한 로난이 등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브리기아가 조소했다.

“온갖 허세는 다 부리더니 도망치는 거냐?”

브리기아는 비웃음을 머금은 채 손날을 휘둘렀다. 다시 초승달 형상의 그림자가 로난을 향해 쏘아졌다. 로난은 쳐내지 않고 몸을 숙여 회피했다. 그림자가 로난의 머리 위를 스치듯이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하늘이 환하게 밝아졌다.

“뭐?”

브리기아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낙뢰 한 줄기가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콰아아앙! 마나와 뒤섞인 전류가 폭발하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섬광이 사위를 뒤덮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방향을 틀어 달려간 로난이 반쪽이 된 사란테를 들처멨다.

“염병, 방금 당신이 한 거에요?!”

[왜 이쪽으로 오신 겁니까!]

“그럼 그냥 죽게 내버려 둬요? 그리고 저년은 어차피 뒈졌을 거 같은데.”

[아마 아닐 겁니다. 지금이라도 절 내려놓고 도망치세요. 세니엘이 준 기회를 저버리시면 안 됩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로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섬광이 잦아들며 브리기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헉···허어억···헉···.”

가만히 서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꼴이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지만,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괴물 같은 년. 그리 중얼거리던 로난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저건···?’

브리기아의 몸 주위로 반투명한 막이 점멸하고 있었다. 마나 실드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는 기괴한 장막이었는데,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사란테가 통탄스럽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아, 이번에도 역시···,]

“저거 나만 보이는 거 아니죠? 저게 뭐예요?”

[본인은 ‘별의 가호’라고 칭하는데···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기에 닿은 공격은 전부 흘려지거나 소멸했습니다.]

“모든 공격이···안 통한다고요?”

[네. 무슨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격 자체가 달라졌어요. 당신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분명 이전에 본 기억이 있었다. 호흡을 고르던 브리기아가 입을 열었다.

“허억···역시 방심할 수 없네, 사란테. 헉, 이번에는 진짜 죽을 뻔했잖아.”

“비···겁한···.”

“하하, 비겁하다니···헉, 어쨌든 이걸로 너희의 승산은 아예 없어졌어···.”

브리기아가 손을 뻗었다. 그림자가 모여들며 아까 로난이 쳐냈던 단검이 다시 나타났다. 단검을 한 바퀴 돌려 잡은 그녀가 로난과 사란테를 노려보며 말했다.

“슬슬 지겨워지니까···헉, 끝을 내자.”

브리기아의 발아래로 그림자가 모여들었다. 몸을 타고 올라온 그림자가 그녀의 몸을 갑옷처럼 뒤덮었다. 단검을 타고 자라난 그림자가 롱소드의 형상을 이루었다. 연이어 그녀 등 뒤의 공간이 일렁이며 수백 개의 가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봐도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투구 아래에서 지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친구의 목은···헉, 내가 직접 거둬야지···.”

“아···아아···.”

시체처럼 창백해진 사란테가 절망 어린 침음을 흘렸다. 그는 저 방어막이 발동되는 동안의 브리기아는 사실상 무적이라고 설명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로난의 눈이 튀어 나올 듯 커졌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씹새끼의 이름이 머릿속에 번득였다.

‘아하유테···!’

생각났다. 브리기아를 감싸고 도는 방어막에서는 그 개자식에게서 느껴지던 것과 흡사한 인상이 느껴졌다.

아하유테는 로난을 제외한 이들의 공격을 모조리 흘려내거나 소멸시켰다. 널브러져 있던 사고가 퍼즐처럼 맞춰졌다. 대머리들을 숭배하는 집단. 대머리들의 권능.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던 로난이 사란테에게 속삭였다.

“사란테.”

[네?]

“딱 한 번만 빈틈 만들어 줄 수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신지···.]

“아까 같은 벼락은 바라지도 않아요. 진짜 사소한 거 하나라도 좋아요. 그러니까···”

로난은 서둘러 짠 작전을 속삭이듯 설명했다. 의문에 찬 표정으로 침묵하던 사란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브리기아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잘 가, 사란테.”

로난이 정신을 집중했다. 시간이 느려지며 쇄도해오는 브리기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등 뒤로는 한발 늦게 쏘아진 가시들이 폭우를 찢으며 날아오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귓가에서 사란테의 읊조림이 들려왔다.

“···윈드 스피어.”

쐐애액! 허공에 마법진이 생기더니 바람으로 이루어진 창이 브리기아를 향해 쏘아졌다. 그와 동시에 뛰쳐나간 로난이 라만차를 휘둘렀다.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로난 쪽이 약간 더 빨랐다. 로난의 참격과 사란테의 마법을 번갈아 보던 브리기아는 사란테의 마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어차피 가호에 막힐 것은 뻔하지만, 오늘 처음 보는 애송이의 칼질보다는 숙련된 마법사의 마법이 위협적인 것이 당연하니까.

그리고 그 판단이 그녀의 운명을 갈랐다. 라만차는 그대로 방어막을 찢어발기며 호를 그렸다. 서걱! 브리기아의 머리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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