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62화 (62/333)

< 62. 중간 평가(4) >

#62

로난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보던 아데샨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입이 나지막이 벌어졌다.

“···전쟁이 있었어.”

“전쟁?”

“응. 엄밀히 따지면 전쟁은 아닌가. 혹시 송곳니의 밤이라고 들어 봤어?”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징벌병으로 구를 당시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북부 수인(獸人) 연합이 대군을 이끌고 바르사 변경백령을 침공한 사건이었다.

현 검성의 자리에 등극해 있는 자이파가 주도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요.”

“그래. 이야기가 빠르겠네. 내 고향은 북부의 바르사 변경백령이야. 송곳니의 밤이 일어나기 전까지 거기 살았어.”

두 사람은 숲을 천천히 거닐며 대화를 나누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퇴적된 낙엽이 바삭거리며 부서졌다.

“아버지는 재단사였어. 제국군 중사인 어머니를 따라 북부에 정착하셨지. 내 위로는 나이 차이가 많은 오빠가 두 명 있었어.”

“바느질도 아버지한테 배운 거였나 보네요.”

“응. 아버지는 훌륭한 재단사였거든. 옷감뿐만이 아니라 가죽도 곧잘 다뤄서 북부에서도 나름 장사가 잘됐어. 자잘한 업무는 내게 많이 시키셔서 바느질이 완전히 손에 익었지. 하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는데요?”

“음···엄청 강인하면서도 예쁘고, 좋은 분이셨어. 이상적인 군인이라고 해야 하나? 목마를 자주 태워주셨는데 키가 크셔서 눈이 즐거웠어.”

아데샨은 즐거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어린 날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그녀의 꼼꼼하고 사근사근한 성격은 아버지에게서, 큰 키와 수려한 외모는 어머니에게 받아온 듯했다.

아데샨의 위로는 나이가 거의 열 살 차이가 나는 오빠가 둘 있었다. 둘 다 무예에 관심이 많았고 그녀를 워낙 잘 챙겨줬다고 했다.

“정말 행복했어. 낮에는 아버지를 도와 바느질을 하고, 밤에는 어머니를 포함한 온 가족이 함께 식사했지. 오빠들은 언제나 자신 몫의 고기를 조금씩 썰어서 내 접시에 올려놨어. 한창 커야 할 때니까 많이 먹어야 한다면서. 나는 그런 나날이 영원히, 영원히 이어질 거라 생각했어···”

아데샨이 말꼬리를 끌었다.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짙었다.

“송곳니의 밤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비로소 그녀에게 대장군의 꿈을 꾸게 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아직도 기억나. 주말에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성벽 쪽에서 뿔피리 소리가 울리더라. 그날 따라 말이 없던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챙겨서 집을 나섰어. 가족들의 뺨에 한번씩 입을 맞추고서.”

“가족들은 알고 있었군요.”

“응. 나 빼고 전부. 다음으로는 오빠들이 어머니를 따라 집을 나섰지. 어김없이 자기 몫의 음식을 내 접시에 올려놓은 채. 어머니와 오빠들을 본 건 그게 마지막이야.”

북부에서 수인족과 관련하여 일이 터질 조짐은 한참 전부터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야생성과 전통을 중시하는 북부의 수인 상당수는 타 종족과 엮이는 것 자체를 극도로 혐오했다.

하지만 제국은 북쪽으로의 확장을 멈추지 않았다. 우호적인 부족들은 사절단을 보내 회유하고, 반대파는 군대를 앞세워 죽이거나 몰아냈다.

성지 주베마저 제국령에 넘어가자 반대파 수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결국 자이파의 깃발 아래 모여든 수인들이 송곳니의 밤을 일으켰다.

로난이 혀를 찼다. 과거 아르말렌 백작, 그러니까 마르야를 만났을 당시 북부에서 웨어울프와 싸우던 로난은 그들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털북숭이들만큼 귀찮은 놈들도 드물지.’

수인들은 기본적인 신체능력이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생체 병기 취급을 받는 웨어라이온이나 웨어타이거는 말할 것도 없고, 웨어울프나 웨어폭스 정도만 되어도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인간 병사 따위는 대여섯 명씩 상대할 수 있었다.

송곳니의 밤은 그런 수인 1만 명이 변경백령을 침공한 사건이었다. 바르사의 성벽은 채 사흘이 지나지 않아 맹수들의 침입을 허용했다. 아데샨이 말했다.

“아버지는 당황하는 나를 안아서 짐수레에 태웠어. 우리는 그대로 피난길에 올랐지. 제도 인근의 난민촌에 막 정착할 무렵에 부고가 오더라. 피에 젖은 인식표는 어머니와···두 오빠의 것이었어.”

당시에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군인이었다. 그중에서도 대부분은 변경백령의 병사였다.

그들은 무용지물이 된 성벽을 대신하여 성벽이 되어야 했다. 한 몸바쳐 방어선을 구축함으로서 후방에서 본대가 오는 시간을 최대한 버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불행히도 아데샨의 어머니와 오빠들이 속한 부대도 그 역할을 맡았다.

“어머니와 오빠들은 체스판의 병정처럼 죽었어. 말이 방어선이지 그냥 고기방패였지. 다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부고를 전해준 것은 어머니의 부대에 속해 있던 패잔병이었다. 오른팔과 왼쪽 다리가 잘린 병사는 그날의 진실과 참상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살 수 있었어. 어머니와 오빠들뿐만이 아니라 훨씬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내다 버리지 않아도 됐었어. 부고에는 숭고한 희생이니 뭐니 적혀 있었지만, 사실 전부 안 죽어도 되는 사람들이었어.”

패잔병은 자신들이 대책도 없이 사지로 내몰렸다고 설명했다. 병사와 부사관들이 보기에도 훨씬 괜찮은 전략이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지휘부는 마지막까지 명령을 바꾸지 않았다. 그들은 어찌 됐건 목적을 달성했고, 사태가 끝난 뒤에는 가슴팍에 훈장을 달았다. 아직도 아데샨의 귓가에는 패잔병이 자리를 뜨며 중얼거렸던 말이 맴돌고 있었다.

- 우리는 왜 죽어야 했던 건가···.

아데샨이 메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매년마다 고향의 위령비를 방문해서 어머니와 오빠들의 이름을 찾아. 글씨도 작고 저 높은 곳에 새겨져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아.”

“아데샨.”

“나는 대장군이 될 거야. 이 땅에 위령비는 더는 필요 없어. 적어도 살았어야 할 이들의 이름으로 뒤덮인 위령비는···.”

결국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로난은 숲을 감상하듯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예나 지금이나 상관이 우는 모습은 썩 보기 껄끄러운 장면이었다. 머지않아 눈가를 닦아낸 아데샨이 배시시 웃었다.

“···미안. 역시 재미없었지.”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죠.”

“아하하. 그래, 그런 반응을 보여주는 게 차라리 편해.”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의 그녀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대장군 아데샨이 누구인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고, 로난 한 명을 위해 제국군을 군단 단위로 갈아버린 위인 아닌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같은 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 무렵의 아데샨은 아직 보석 같은 희망과 선의를 품고 있었다. 어찌 보면 탁상공론에 불과한 이야기였지만, 로난은 그것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턱을 매만지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재단사 일을 하고 계셔. 원래 집이 있던 그 자리에서.”

“그렇군요. 수인들이 무섭지는 않아요? 당장 필레온에만 해도 많이 있잖아요.”

“아예 무섭지 않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괜찮아. 어머니와 오빠를 죽인 건 사실상 무능한 지휘부니까. 그리고 입대하게 되면 수인 군인들과도 교류해야 하는걸.”

“긍정적이라 좋네요.”

두 사람은 침묵을 유지한 채 한참을 걸었다. 어느새 나무들이 듬성듬성해지기 시작하더니 완만하지만 높은 언덕이 나타났다. 아데샨이 양팔을 벌리며 정면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아, 시원하다.”

“그러게요.”

“저 위에 올라가면 섬이 한눈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아?”

“음?”

아데샨이 검지로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과연 위로 쭉 뻗어 있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딱 봐도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장소로 보였다. 문득 언덕 꼭대기를 바라본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게 뭐지···?”

“응? 그러게. 뭐가 세워져 있네.”

멀어서 잘은 안 보였지만, 무슨 구조물 같은 것이 세워져 있었다.한참을 봐도 정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가 보면 알겠죠.”

두 사람은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하늘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로난은 언덕을 오르는 내내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태껏 아데샨이 보여준 모습과,그녀와 나눈 대화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역경의 풍파에도 좌절하지 않는 소녀. 가치 없는 죽음을 혐오하는 미래의 대장군.

‘에이, 모르겠다.’

마침내 시간을 거슬러 돌아왔을 때부터 이어지던 긴 고민이 끝났다. 로난의 입이 나지막이 벌어졌다.

“아데샨.”

“응?”

“선배는 마나에 재능이 없는 게 아니에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선배의 마나는 특별해요. 그림자의 마나라고 불렀던 거 같은데, 별도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모든 마나 중에서도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힘을 품고 있다 했어요.”

“···뭐?”

아데샨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앞서 가던 로난도 따라서 멈췄다. 아데샨의 입에서 당황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걸 누구한테 들었어? 그림자의 마나라고···?”

“뭐, 아는 사람한테 들었어요. 그림자의 마나가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거기서 발현하는 능력이 엄청나게 강했던 건 기억이 나는데.”

차마 미래의 본인에게 들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강풍이 두 사람의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있었다. 로난은 자신의 외투를 걸친 소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도와줄게요.”

“어···?”

“까짓거 한번 해 봐요. 대장군.”

로난은 자신의 유약함을 인정했다. 그는 아데샨에게 집에 가서 옷감이나 자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말할 수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의 그녀가 꿈을 이룰 수 있게 돕는 것이 올바른 판단일 터였다.

“너···.”

아데샨은 가만히 굳은 채 로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잿빛 눈동자 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때 저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만났군. 로난.”

“씨발.”

익숙한 중저음이었다. 로난이 눈살을 팍 찌푸렸다.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익숙한 상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슐리펜은 정체모를 건물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한참을 찾아다녔다. 다른 경쟁자들을 모조리 베어 버릴 정도로 말이야.”

“슈, 슐리펜···!”

아데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로난은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만 봐도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

“너는 진짜 미친 새끼다···몇 놈 잡았냐?”

“51명이다. 몇 명은 나쁘지 않았다만 역시 맞수가 될만한 건 너밖에 없더군.”

“움직이지 말고 거기서 기다려. 우리도 정상 구경 좀 하게.”

로난은 머뭇거리는 아데샨을 데리고 언덕을 마저 올랐다. 과연 아데샨의 말마따나 이곳은 섬의 정상이었다. 좁고 빽빽한 숲과 자그마한 평원, 사면을 둘러싼 진청색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로난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경치 좋다. 그쵸.”

“으, 응···좋은데···그···괜찮아?”

하지만 아데샨은 경치 따위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그녀는 맹수라도 조우한 사람처럼 슐리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 섬에서 마주칠 수 있는 최악의 상대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슐리펜이 아데샨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나비로제 님의 조교군. 늘 신세지고 있다.”

“아, 그래···안녕.”

“지금까지 살아남은 걸 보니 나름대로 실력이 있나 보군. 그런데 어깨에 걸친 외투는 당신 게 아닌거 같은데.”

“그, 그건···.”

아데샨이 얼굴을 붉혔다. 슐리펜은 그 이상의 추궁은 하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렇게 세 명이 마지막인 거 확실하냐?”

“그렇다.”

“좋아. 선배, 와서 이것 좀 봐봐요. 도대체 뭐 하는 건물일까요?”

로난은 정체불명의 건물에 손을 얹은 채 아데샨을 불렀다. 두꺼운 원기둥 형상을 한 건물은 도무지 용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으응? 그러게···잠깐만.”

아데샨의 눈빛에 흥미가 감돌았다. 그녀는 슐리펜을 뒤로한 채 건물을 살피기 시작했다. 봉수대라기에는 지붕이 돔으로 막혀 있었고, 등대라기에는 높이가 낮았다. 미끈한 외벽은 이름 모를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기하네...정말 본 적이 없는 양식인데?”

아데샨이 잠시나마 두 사람의 존재를 잊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옆에서 로난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미안해요 아데샨. 그래도 삼 등이면 나쁘지 않죠?”

“에?”

서걱. 로난이 라만차를 휘둘렀다. 아데샨의 형체가 일그러지며 사라졌다. 슐리펜이 말했다.

“둘이 같이 오는 게 아니었군.”

“선배가 끼기에는 거친 자리라서.”

“지당한 판단이다.”

스르릉! 슐리펜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과는 또 다른 검이었다. 이름 모를 문자가 아로새겨진 검신을 타고 심상치 않은 예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칼 좋은데. 도론이 만들었냐?”

“그렇다. 페일 로드만은 못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지.”

그들은 투기장에서 대련할 때처럼 열 걸음의 간격을 두고 물러섰다.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기자 잠자리의 날개처럼 얇은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만차를 한바퀴 돌려 잡은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럼, 할까.”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한순간 두 사람의 형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서로를 향해 쇄도한 로난과 슐리펜은 정확히 중간 지점에서 충돌했다. 카아아앙!! 날카로운 금속음이 바람을 찢으며 울려 퍼졌다.

“이번에야말로 네 전부를 보여라.”

슐리펜이 말했다. 두 개의 검신은 맞닿은 채 비적이고 있었다.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슐리펜의 입이 재차 벌어졌다.

“나도 그러겠다.”

그 순간 바람의 형상을 한 마나가 슐리펜의 검을 휘감으며 올라왔다. 폭풍검을 눈치챈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캉!! 강한 참격으로 거리를 벌린 슐리펜이 로난을 향해 검기를 발사했다.

“미친놈···!”

로난이 사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두 개로 나뉜 검기가 그의 발치에 떨어졌다. 콰아아아! 반경이 5m에 이르는 칼날의 회오리가 로난의 양옆에서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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