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평가 종료 >
#64
슐리펜의 가슴에 붉은 선이 생기며 피가 튀었다. 동시에 궤도를 비튼 참격이 로난의 목을 내리쳤다.
한순간 시야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쾅! 단단한 바닥이 로난의 등을 강타했다.
“커억!”
로난이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의 정신은 여전히 슐리펜이 만들어낸 폭풍 속을 표류하고 있었다.
로난은 천천히 호흡을 바로잡았다. 흐려졌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졌다. 아득하게 높은 천장과 그 한복판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종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나비로제가 학생들을 주목시킬 때 사용하는 종이었다. 등을 맞댄 바닥의 촉감도 어딘가 낯익었다. 별안간 사방에서 쩌렁쩌렁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 돌아왔다!”
“누가 1등이지? 제대로 본 사람 있어?!”
“거의 동시에 전송된 거 같은데?”
환호는 어디라 할 것도 없이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로난은 자신이 필레온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불현듯 온몸을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로난을 덮쳤다.
“으윽···씨발···.”
그제야 로난은 자신이 중상으로 분류되어 마땅한 상처를 입었음을 깨달았다. 슬쩍 들어본 팔에는 크고 작은 자상이 셀 수 없이 새겨져 있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난!”
“아데샨···?”
“세상에, 피 좀 봐. 여기요!”
황급히 달려온 아데샨이 로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의료진들을 호출했다. 외모와 도통 어울리지 않는 호들갑에 로난이 피식 웃었다.
“괜찮아요.”
“상처가 벌어지니까 움직이지 마. 어서 지혈을···!”
“내가 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대장군을 지혈해 주던 전생과 정확히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아데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요. 참, 누가 이겼어요?”
“지금 그게 궁금해? 너는 진짜···”
“궁금해요.”
“···내가 볼 때는 무승부였어. 도저히 승패를 가릴 수가 없어서 교관님이 재차 확인하는 중이야.”
“무승부?”
로난의 눈이 커졌다. 틀림없이 자신이 진 줄로만 알고 있었다. 문득 마지막 합을 나누던 순간이 머릿속을 스쳤다.
‘분명 안 닿는 거리였는데.’
기억이 띄엄띄엄 끊어져 있었다. 자신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슐리펜에게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만이 명확하게 떠올랐다.
이윽고 세 명의 치유술사가 로난에게 들러붙었다. 주문이 영창되며 연녹색의 빛무리가 로난을 뒤덮었다.
‘대단한데. 시타도 언젠가는 이렇게 할 수 있으려나.’
과연 전문가들이라 그런지 회복 속도 자체가 달랐다. 자칫하면 흉터로 남을법한 큰 상처들도 순식간에 아물었다.
이런 정신 나간 시험을 치르면서도 나비로제가 당당하던 이유가 있던 것이다. 치유술사 중 한 명이 감탄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하군. 이런 부상을 입을 때까지 귀환 판정이 안 나다니.”
“네?”
“자네가 싸우는 걸 봤네. 몸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팔찌의 마법이 발동할 만한 치명타는 전부 피하거나 방어하더군. 어떻게 그런 동작이 가능한 거지?”
“그냥 한 거죠. 그런데 제가 싸우는 걸 어떻게 봤어요?”
나이가 지긋한 치유술사는 시험이 투기장에 중계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일러 주었다. 로난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니미, 그래서 죄다 동물원 원숭이라도 보듯 쳐다보던 거였구만.”
“선망의 시선이라 생각하게.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나비로제 님의 시험에 의료진으로 참여했지만, 이런 경우는 자네와 제국의 샛별이 처음이야.”
“그러고 보니 그 자식은 어디 있어요? 죽었나?”
“저쪽에서 치료를 받고 있지. 자네처럼 상처가 많지는 않지만 하나같이 깊은 부상이더군. 아마 조금 더 걸릴 거 같네.”
“등신, 꼴 좋다.”
로난이 낄낄거렸다. 치료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많은 상처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로난이 탄성을 흘렸다.
“크, 확실히 배운 작자들이라 그런지 다르긴 다르네요. 어때요 선배, 다 나았어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로난이 아데샨에게 등을 보여주었다. 찢어진 옷 너머로 드러난 피부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맹수처럼 도드라진 근육을 본 아데샨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으, 으응···다 나았어. 그, 이거 돌려줄게···.”
아데샨은 그때까지 로난의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로난은 고개를 내저으며 외투를 벗으려는 그녀를 저지했다.
“에이, 나중에 돌려줘요. 선배도 아직 옷 안 갈아입었잖아요.”
“그래도···너도 지금···상태가···.”
“사내새끼가 웃통 좀 까는게 뭐 어때서요. 됐으니까 입어요.”
“그, 그럼···,”
고개를 끄덕인 아데샨이 옷깃을 여몄다. 얼굴에 묘하게 붉은기가 도는 것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그때 인파를 가르며 익숙한 면면들이 나타났다.
“두 사람 다 여기 있었구나.”
“뭐야?”
삼학년 수석인 에이운과 측근인 대머리들이었다. 그 옆에는 아데샨을 괴롭혔던 카챠인지 뭔지 하던 계집애가 풀죽은 채 서 있었다.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댁들이 무슨 배짱으로 여길 왔어? 매가 모자라셨나?”
“지, 진정해. 시비를 걸러 온 게 아니야.”
“그럼 왜 왔는데?”
“그건···.”
로난이 주먹을 쥐는 것을 본 에이운이 손사래를 쳤다. 완전히 박살을 내놨는데 멀쩡해진 걸 보니 의료진의 실력이 뛰어나기는 한 모양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에이운과 대머리들이 허리를 숙였다.
“미안하다. 내가 섣불렀어.”
“허?”
“주위의 말만 듣고 너희를 멋대로 재단하려 들었어. 특히 아데샨 네게 사과를 하고 싶어.”
“나한테···?”
로난과 아데샨은 벙찐 채 고개를 조아린 대머리들을 바라보았다. 수정구처럼 맨질거리는 세 개의 두피 위로 그들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뒤따라 머리를 숙인 카챠가 웅얼거렸다.
“나도 미안해. 알게 모르게 너를 질투하고 있었나봐. 그런데 키가 크고 예쁜 건 사실이잖아···.”
“다, 다들 갑자기 왜 이래? 교관님이 뭐라고 하셨어?”
“아니. 네 공격에 당하고 많은 생각을 했어. 너는 불가능한 일을 해냈어, 아데샨.”
에이운은 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아데샨과 싸웠을 당시를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소드 유저 단계에 그쳐 있는데다 신체능력도 그닥 뛰어나지 않은 아데샨이 자신의 빈틈을 파고들고 오러까지 발동하게 했다. 로난에게 저항도 못 한 채 당한 것보다 그게 더 충격적이었다. 에이운이 말을 이었다.
“더는 아무도 너를 무시하지 않을 거야. 적어도 3학년에서는.”
“그런···.”
“그냥 이 말을 전하고 싶었어. 그럼 우리는 가 볼테니 푹 쉬어.”
사과를 마친 에이운과 카챠가 등을 돌렸다. 아데샨은 그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죠 선배. 자신감을 가져요.”
“나, 나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뭘 그렇게 겸손을 떨어요. 교관님이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건 진짜 좋은 공격이었다니까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데샨은 부끄럽다는 듯 자신의 손목을 문질렀다. 로난은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건 말 그대로 아데샨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어쨌든 잘 된 일이었다. 유급생이고 하니 은근히 따돌리는 분위기가 산재해 있던 것 같은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싹 사라질 것 같았다.
“아, 제가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마지막에 어떻게 된 거예요?”
“응?”
“분명 칼이 안 닿는 거리였거든요. 그런데 무승부가 났다고 해서.”
로난이 불안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데샨이 뭐라 대답하려던 차였다. 인파가 재차 갈라지며 나비로제가 걸어 나왔다.
“아, 교관님.”
“치료는 끝났나 보군. 고생했다.”
“잘도 이런 정신 나간 시험을 기획하셨네요.”
“내 수업이 인기 없는 이유 중 하나지.”
“그래도 재밌었어요. 그건 뭐예요?”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나비로제의 손에는 밀봉된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우승자에게만 주어지는 부상이다.”
“우승자? 제가 1등이에요?”
“공동 우승이다. 수십 번 돌려봤는데 전송되는 타이밍이 정확히 일치하더군. 하여튼 너희는 이상한 놈들이다.”
나비로제가 옅게 웃었다. 로난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이번에야말로 그 싹수 없는 놈의 콧대를 세 번 정도 접어 주려고 했는데.”
“우승해놓고 못마땅해 하는 것도 똑같군.”
“뭐, 그래도 선배가 2등이 된 건 좋네요. 축하해요 아데샨.”
로난이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가만히 서 있던 아데샨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두 사람을 흥미롭게 쳐다보던 나비로제가 로난에게 두루마리를 건넸다.
“그래서 이건 뭐에요? 스크롤?”
“내 추천장이다.”
나비로제는 그 추천장이 있다면 제국에 존재하는 조직 대부분은 견학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마탑이나 유서깊은 길드들은 물론이요, 황실 기사단까지 허용 범위 안이라는 말에 로난의 입이 벌어졌다. 기대한 것보다 더 큰 상이었다.
‘안 그래도 어떻게 접근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로난은 추천장을 공손하게 받아들었다. 조만간 유용하게 쓸 일이 있을 것 같았다. 나비로제의 입에서 묘하게 고양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이제 다룰 줄 알게 된 건가.”
“네? 뭘요?”
“검기 말이다. 그걸로 마무리를 짓지 않았나.”
로난의 눈이 커졌다.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수면으로 떠올랐다. 라만차의 궤적을 따라 쏘아진 가느다란 파장.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정신이 몽롱한 나머지 환각을 본 줄로만 알았다. 드디어 쓸 수 있게 된 건가? 곧장 칼을 뽑아든 로난이 허공에 참격을 날렸다. 쉭! 굉장히 빠르기는 했지만 파장 같은 것이 쏘아지지는 않았다.
“젠장, 안 되네요.”
“침착하게 해 봐라.”
허나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애꿏은 먼지만 검풍에 흩어질 뿐이었다. 나비로제가 입술을 비틀었다.
“···미약하기는 했지만 틀림없이 검기였는데. 혹시 검기를 발현하기 전에 전조 같은 게 없었나?”
“전조요?”
“그래. 분명 마나를 느꼈을 텐데.”
그러고 보니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이 몸을 관통했던 기억이 났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굉장히 불쾌하고 섬뜩한 감각이었다.
‘그게 마나였나?’
문득 로난은 첫 번째 해주를 했을 당시를 떠올렸다. 마나를 보게 되기 전에 눈이 간질거렸던 것처럼, 그 또한 저주가 약해지거나 풀렸다는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나비로제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막 감각이 트인 터라 감이 안 잡히는 모양이군.”
“네?”
“가끔씩 있다. 너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몇 단계씩 발전하는 경우가. 그 감각을 되찾아야 검기를 가르치든 할 텐데, 곤란하군.”
나비로제는 세상 감질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로난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귀하기 전에도 사선을 넘은 경우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침음을 흘리던 나비로제가 영 언짢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사람 한 명을 알려줄 테니 찾아가 봐라. 평소에는 영 못 써먹을 놈이지만, 마나를 다루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