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발자크 >
#73
“응. 밤의 세계를 지배하는···”
오필리아가 뭐라 말을 이으려던 차였다. 콰아아앙! 바닥이 폭발하며 자루를 뒤집어 쓴 사내가 두 사람 앞에 착지했다.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로딘은 어디 있나?”
무시무시한 압박감이었다. 발자크라 불린 사내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 있지 않았다. 오필리아의 마법 공세를 당한 직후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씹···”
로난은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말뚝을 내질렀다. 기괴한 각도로 몸을 비틀며 회피한 발자크가 로난의 목을 향해 손날을 휘둘렀다. 예리한 손톱이 다섯 개의 칼처럼 번득이고 있었다.
“윽!”
로난이 허리를 뒤로 젖혔다. 창백한 손바닥이 콧잔등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갔다. 쐐액! 뒤늦은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말뚝을 내던진 로난이 라만차를 뽑아들었다.
‘강하다.’
피의 갈고린지 뭔지 하는 얼간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브리기아와의 전투처럼 단 한 번의 빈틈을 파고들어야 승산이 있었다. 위태롭게 합을 주고받는 도중, 근처의 어둠이 일렁이며 시커먼 늑대 한 마리가 뛰쳐 나왔다.
“캬아아아!”
“제기랄.”
순수한 무투가 계열인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그림자 늑대는 시커먼 송곳니를 드러내며 로난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발자크는 대응이 힘든 후측면에서 쇄도해오고 있었다. 욕지거리를 내뱉은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한번 해보자 이거지.”
로난은 발자크가 있는 방향으로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마나의 흐름을 타서 가속된 초고속의 참격이었다. 서걱! 검로가 그어지는 순간 윗턱이 머리에서 분리된 늑대가 형체를 잃고 사라졌다. 자루 안쪽에서 처음으로 당혹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무슨···!”
위험을 감지한 발자크가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두 사람의 간격은 아슬아슬하게 칼끝이 닿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자칫하면 반격당할 위험이 있었지만 로난은 멈추지 않았다. 성공해야 할 텐데. 그리 속으로 읊조린 로난이 뿌리듯이 검을 휘둘렀다.
“뒈져라!”
한순간 감전당하는 듯한 충격이 로난을 덮쳤다. 쐐애액! 검신을 타고 발현된 검기가 발자크의 머리를 향해 쏘아졌다. 아무 색도 없던 이전과는 달리 피처럼 붉은 검기였다.
“으음!”
발자크가 황급히 고개를 비틀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피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촤악! 자루가 사선으로 찢겨나감과 동시에 피가 튀어 올랐다. 드러난 얼굴을 본 로난이 히죽 웃었다.
“예상 외로 멀쩡하구만. 틀림없이 좆같이 생겼을 거라 예상했는데.”
“너는···꽤 흥미롭군.”
발자크의 외모는 생각했던 것보다 준수했다. 생김새로만 추정되는 나이는 기껏해야 이십대 후반. 이목구비는 뚜렷했고 머리카락은 부엉이처럼 탁한 회색을 띠었다.
유이한 하자가 있다면 빛을 잃어버린 왼쪽 눈동자와 로난의 검기에 맞아서 생긴 상처였다. 깊숙한 자상이 오른쪽 입꼬리에서부터 귓볼 아래까지 새겨져 있었다. 발자크가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핥으며 중얼거렸다.
“타의로 피를 흘린 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다만 두 번째 하자는 금방 사라졌다. 몇 초가 지나지 않아 상처가 아무는 것을 본 로난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좆같은 괴물 새끼.”
“마침 잘 됐군. 이 허전함을 네가 좀 채워 줘야겠다.”
발자크의 얼굴에 균열 같은 미소가 드리웠다. 딱! 그가 허공에 손가락을 튕기자 어둠이 일렁이며 아까와 같은 늑대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로난은 연회장 곳곳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안광은 족히 스무 쌍이 넘었다.
“너는 자로딘이 될 수 있을까?”
발자크가 광기 어린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피로 이루어진 장창이 들려 있었는데, 역시나 다른 모기들이 쓰던 것보다 월등하게 만듦새가 좋았다. 어둠 마법만으로도 충분히 엿 같은데 혈마법까지 잘 쓰는 모양이었다.
“진짜 재수가 없으려니까···.”
헛웃음 친 로난이 자세를 다잡았다. 그는 발자크가 전력의 반도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난의 어깨에 앉은 시타가 날개를 펼치며 위협하듯 포효했다.
“뺘아아악!”
어쩌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별달리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쾅! 무기를 움켜쥔 두 사람이 뛰쳐나갔다. 검고 붉은 날붙이가 서로를 향해 쏘아지는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오필리아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만.”
“제기랄!”
로난은 자신의 손목을 붙잡으며 급제동을 걸었다. 발자크도 마찬가지였다. 넘어질 것처럼 휘청이던 두 사람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발자크의 눈이 커졌다.
“···오필리아?”
“적당히 말리고 싶어도 끼어들 새가 없네. 두 사람 다 너무 거칠어.”
로난과 발자크를 번갈아서 쳐다보던 오필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발자크는 유령이라도 마주친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말을 하지 못 하고 있었다.
도약할 준비를 하던 늑대들이 일제히 자리에 착석했다. 로난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외쳤다.
“얌마, 위험하게 뭐 해? 얼른 도망치지 않고!”
“괜찮아.”
“언제는 우리가 감당할 상대가 아니라며?”
“그렇기는 한데···”
말꼬리를 끌던 오필리아가 입술을 비틀었다. 발자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오필리아. 정말로 너인가?”
“응. 오랜만이야, 발자크.”
발자크는 그제야 오필리아의 존재를 눈치챈 것 같았다. 그만한 소란 속에서도 알아채지 못할 걸 보면 어지간히도 로난과의 승부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군. 방금 날 공격한 마법이 네 것이었군···이럴 줄 알았으면 양 팔을 벌리고 기꺼운 마음으로 맞을 것을.”
그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로난의 머릿속에 오필리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래서 상대 안 하려고 했던 거야.]
그녀와 눈이 마주친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필리아가 말을 이었다.
“미쳐있는 건 여전하네. 내 얼굴을 봐서 이제 그만해 주면 안될까?”
“그러지. 가짜 자로딘이 예상외로 흥미로워서.”
별안간 발자크가 손가락을 튕겼다. 어둠 속에서 도사리던 늑대들이 사라졌다. 너무나도 허무한 결착이었다. 오필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거의 80년 만에 보네.”
“정확히는 83년이다. 그런데 그 귀여운 모습은 뭐지?”
“인간들의 학교에 다녀야 하니까 일시적으로 조정했어. 괜히 눈에 띄면 안 되니까.”
“그런가. 너희 성에 얹혀 살 때가 생각이 나는군. 즐거웠는데.”
“응. 그런 시절도 있었지.”
“그나저나 네가 내 이름을 부르다니···.”
장창을 내려놓은 발자크가 오필리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가로저은 그녀가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미안. 그 이상 가까이 오지는 말아줘.”
“아직은 나를 용서하지 못한 건가?”
“응.”
“그래. 그렇게 하지.”
발자크는 순순히 멈춰섰다. 고분고분한 태도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싸운 상대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소꿉친구라도 되나?’
다만 친밀해 보이면서도 어느 정도 선을 긋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오필리아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발자크.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야? 네 수준이 이런 꼬마들과 놀 정도는 아니잖아.”
“자로딘 스톤송과 못 다한 승부를 하기 위해 왔다. 전부 틀어졌지만.”
“자로딘과도 싸웠었구나. 용케 둘 다 살아 있네.”
“대단한 마법사였지. 이 가짜가 주문을 외우는 대신 칼을 뽑아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절망했는지 너는 모를 거다. ”
발자크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는 누구보다 강해지고 싶다는, 뱀파이어 치고는 꽤나 특이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강자와 겨루고, 그들의 피를 마시는 것이 발자크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자로딘과의 승부는 대륙의 서녘 변두리에서 벌어졌다고 했다. 땅거미가 질 즈음에 시작된 전투는 결국 다음날 아침이 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가증스러운 태양이 떠오르는 바람에 무승부로 끝낼 수밖에 없었지. 그런 호적수는 오랜만이었다.”
싸움이 벌어졌던 장소에는 아직도 산더미만한 기암괴석들이 솟아나 있다고 했다. 자로딘의 대지 마법으로 인한 흔적이었다. 발자크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무지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 애송이들이 꾀어내는 것은 물론 권속으로 만들어낼 비책이 있다더군. 그 놈이 찾는 것이 선혈의 정수라길래, 내거 하나를 빌려줬지.”
“뭐?”
대화를 경청하던 로난의 눈이 커졌다. 뭘 빌려줬다고?
“빌려주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빌려줄 수 있는 거였냐?”
“누가 대화에 끼어들어도 좋다고 했나. 가짜 자로딘.”
“그러지 마 발자크. 수백 년 만에 새로 사귄 친구야.”
“이리 와서 앉아라. 멀리서는 말소리가 잘 안 들리니까.”
발자크가 돌로 만들어진 의자를 톡톡 건드렸다. 로난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염병할 새끼···.”
“진작 말하지 그랬나. 오필리아와 친구인 걸 알았으면 그렇게 험하게 다루지 않았을 텐데.”
“검기가 정확히 아랫턱을 날려버렸어야 하는데.”
강함과 비례하는 호승심도 그렇고, 특정 인물 앞에서 맛이 가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슐리펜을 연상케 하는 놈이었다. 발자크가 말했다.
“말 그대로다. 나는 정수가 세 개거든.”
“염병, 뭐가 그렇게 많아? 오필리아 너는 한 개라 하지 않았어?”
“응. 대부분의 경우는 없거나 한 개지. 발자크가 이상한 거야.”
선혈의 정수는 뱀파이어의 힘이 응축되어 체내에 생성되는 코어의 일종이었다. 몇 년의 훈련만으로 만들 수 있는 일반적인 마나 코어와는 달리 자리가 잡히는 데만 수십, 수백 년이 걸리는 것이 특징이었다. 발자크가 투덜거렸다.
“요즘 애송이들은 정수가 있기는커녕 자리조차 잡히지 않았더군. 나는 서른 살에 첫 번째 코어를 완성했는데 말이지.”
“네가 이상한 거라니까.”
“우리 형님은 일곱 개다.”
“그럼 너랑 대공님이 이상한 거야.”
타고난 재능도 있겠지만, 수를 늘리거나 크기를 키우기 위해서는 꾸준한 단련과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투쟁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발자크는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뱀파이어였다.
“그러고 보니 회수를 잊을 뻔했군.”
딱! 별안간 발자크가 손가락을 튕겼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늑대가 저 구석에 누워 있는 츠바이의 목덜미를 물어챘다.
"흐, 흐아아악!"
잘려나간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저항했으나 허사였다. 늑대는 그를 발자크의 발치에 내던져 놓고는 사라졌다. 발자크가 츠바이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리며 말했다.
"계획은 실패했으니 정수는 돌려받아야겠다.”
“자, 잠깐만! 기다려 봐, 아직 할 수 있어!”
발자크는 대꾸하지 않았다. 푹! 그의 손이 츠바이의 가슴을 꿰뚫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비명이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끄아아아악!”
다시 뽑혀 나온 발자크의 손아귀에는 아직 뛰고 있는 심장이 쥐어져 있었다. 일전에 봤던 선홍빛의 마나가 심장 주위를 둘러싼 채 은은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츠바이는 가슴 밖으로 뽑혀 나온 자신의 심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 살려..."
콰직! 발자크는 가차없이 심장을 움켜쥐었다. 고여 있던 피가 사방으로 비산함과 동시에 버둥이던 몸뚱이가 늘어졌다. 선혈의 정수는 원래의 자리를 되찾아가듯 발자크의 몸 속으로 흡수되었다.
“쯧, 쓰레기 같은 놈.”
발자크는 츠바이의 시체를 똥기저귀라도 되는 것처럼 던져 버렸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야, 나랑 내기 하나만 하자.”
“내기?”
“그래. 선혈의 정수를 걸고. 세 개나 있으면 해볼만하지 않냐?”
발자크와 오필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난은 아까 챙겨 뒀던 물건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숫산양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 피의 맹약을 진행할 때 사용되는 종이였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도박판 특유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마침내 발자크가 코웃음치며 말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런 좆만한 모기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