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76화 (76/333)

< 76. 소생(2) >

#76

연구실과 이어지는 나선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로딘은 로난의 양어깨를 붙잡은 채 입을 열었다.

“144번째 실험을 시작해야겠다. 지금 당장.”

“지금요?”

자로딘은 대답하는 대신 등을 돌렸다. 그는 다리를 접지른 사슴처럼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선혈의 정수는 아직 로난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에잇, 젠장.”

머리를 긁던 로난이 자로딘을 따라갔다. 어두침침한 연구실에는 여전히 잉크와 쇠 비린내, 농후한 장미향이 만연하게 번져 있었다.

수냐가 들어 있는 유리관이 저 멀리서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로난은 낙엽처럼 깔린 책들을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늦었군.”

진작에 도착한 자로딘이 자신이 작성한 노트를 미친 사람처럼 뒤적이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손을 내밀었다.

“이리 주겠나. 서둘러 마력을 추출해야 하니.”

“통째로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요?”

“미량이면 충분하다. 금방 끝날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낡아빠진 책상 위에는 이전에 사란테의 반지에서 마력을 추출할 때 사용하던 도구들이 늘어서 있었다. 선혈의 정수를 받아든 자로딘은 곧장 추출에 착수했다.

과연 작업이 끝나기까지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분리해낸 선혈의 마나가 자그마한 플라스크 속에서 맥동하고 있었다. 심호흡한 자로딘이 말을 이었다.

“그럼 144차 소생 실험을 시작하겠다. 실험자는 자로딘 스톤송. 피험자는 수냐.”

자로딘은 두 개의 플라스크를 든 채 유리관으로 향했다. 나머지 하나에서는 반지에서 추출한 사란테의 마나가 일렁이고 있었다.

수냐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유리관 가운데 둥둥 떠 있었다. 전에 본 것과는 또다른 드레스가 입혀져 있었다.

자로딘이 주문을 영창하자 플라스크 안쪽에 있던 두 종류의 마나가 유리관 안쪽으로 전이되었다. 꼭 붉고 푸른 물감을 푼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메마른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디.”

슈아아- 마나는 이름 모를 액체와 뒤섞이며 수냐의 몸으로 느릿하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자로딘은 그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다 몸을 돌렸다.

“이 말을 먼저 해야겠지. 고맙다.”

“다 끝난 거예요?”

“아니. 마나가 모두 스며들 때까지 기다려야 해. 한 시간 정도면 결과가 나올 거다.”

자로딘의 얼굴에는 기대와 체념이 반반씩 어우러져 있었다. 이 또한 무수히 많은 시도 중 한 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자로딘이 말했다.

“경황 없이 군 점에 대해 사과하마. 선혈의 정수는 가급적 신선할수록 좋아서.”

“괜찮아요.”

“이해해줘서 고맙군. 혹시 시간 좀 있나?”

“네.”

“그럼 잠깐 대화나 하지.”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서로 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을 터였다. 두 사람은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나를 도와주는 게냐.”

“그러고 싶어서요.”

“말하기 싫다면 묻지 않으마. 그래도 이거 하나는 꼭 들어야겠다. 무슨 짓을 했길래 이 미친 뱀파이어의 정수를 손에 넣은 거지?”

“뭐야, 알고 있었어요?”

“그래. 설마 했는데 내가 아는 자의 것이 맞더군.”

"어···말하자면 좀 긴데요.”

로난은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물론 적당한 각색을 거쳐서. 피의 갈고리의 음모, 버려진 고분에서 벌어진 발자크와의 내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자로딘의 눈이 점진적으로 커졌다.

“자기 자신을 건 내기라니, 완전히 미쳤군.”

“결과만 좋으면 된 거 아니겠어요.”

“그나저나 발자크랬던가. 그 뱀파이어가 아직도 나를 찾고 있다고?”

“완전히 돌아 버려서 집착하던데요. 무슨 멋진 경험을 시켜줬길래 그 모양이 된 거예요?”

“짐작 가는 게 너무 많아서 대답을 못 하겠군. 서로 열 번씩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격전이었으니.”

자로딘은 발자크의 근황이 궁금했는지 이것저것 질문해 왔다. 로난은 그가 원하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턱을 매만지며 경청하던 자로딘이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느꼈는데, 너를 보고 있자면 젊은 날이 떠오른다.”

“갑자기요?”

“그래.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던.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착각하던 시절의 내가.”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자로딘은 별안간 자신의 과거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청춘은 곁가지 없이 수직으로만 자라는 나무와 같았다.

“스톤송 가문은 남부에서 제일가는 마법 명문가였다. 나는 거기서도 수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천재였지. 부와 명예 따위는 매일 아침 떠오르는 해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굉장히 재수없긴 하네요.”

“그래. 오만하고 또 오만했지. 당시의 나는 가족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두 발로 걷는 금붕어처럼 대했다.”

자로딘은 천재였다. 남들이 평생을 걸고 도전하는 일을 휴지에 코 풀듯이 해결했다. 강자라 알려진 이들을 찾아다니며 도전해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상대가 쌓아올린 노력을 비웃으며 끝날 뿐이었다.

열여덟 살 즈음에는 모든 것이 시시해져 방랑길을 떠났다. 혈기에 몸을 맡긴 채 날뛰기에는 자유 용병만 한 게 없었다.

실력이 있었기에 돈을 많이 벌었지만, 모두 그날 밤에 술과 여자로 써 버렸다고 했다. 로난은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쓰레기 같은 행보에서 상당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망나니의 본보기였네요.”

“부정하지 않겠다. 두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도 그러고 살고 있었겠지.”

“한 명은 아내일 거고. 다른 한 명은 누구예요?”

“나비로제. 너도 익히 아는 괴물이다.”

두 사람이 최초로 조우한 것은 남부의 대밀림이었다. 당시의 나비로제 역시 자로딘과 마찬가지로 자유 용병이었는데, 우습게도 서로를 잡아오는 것이 의뢰주들의 요청이었다. 자로딘이 그렇듯 당시의 나비로제도 현재와는 성격이 많이 달랐다고 했다.

“아직도 귀에 선하군.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목을 잘라서 등불로 만들어 버리겠다 했었지.”

“젠장, 우리 교관님이요? 좀 날렸나 보네.”

“발자크가 차라리 온순했다. 그 괴물이 새끼손가락으로 야자 열매에 구멍을 뚫어서 들이키는 모습을 학생들이 봤어야 하는데.”

자로딘이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나비로제와의 사투를 거의 삼십 분에 걸쳐 묘사했다.

해일처럼 일어선 바위가 호수를 메우고, 거대한 검기가 쏘아질 때마다 수백 그루의 나무가 참수당했다. 정오에 시작된 결투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끝났다. 승자는 나비로제였다.

“그건 내 생애 첫 패배였다.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가 없었지. 그 괴물은 반쯤 불구가 된 나를 밀림 한복판에 내던지고 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날렸네요.”

“겸손함을 배운 수업료 치고도 비쌌다. 소리를 듣고 찾아온 수냐가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로 짐승들의 밥이 됐을 거다.”

수냐는 대밀림에 거주하는 원주민이었다. 그녀는 반병신이 된 자로딘을 자신의 마을로 데려가 거진 일 년 가까이 간호했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자로딘은 그녀가 없는 나날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혼자서는 밥도 못 먹고,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침대에서 잠을 청했지. 그래도 돌이켜 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연인이 되었고, 종국에는 원주민들의 축복 속에 혼례를 올렸다. 완벽하게 재기한 자로딘은 곧바로 수냐를 데리고 스톤송 가문으로 돌아갔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불현듯 자로딘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문제는 내가 얼간이었다는 거지.”

하지만 수냐를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가문의 사람들은 그녀를 자로딘 스톤송의 아내보다는 신기한 전시품처럼 대했다.

물론 수냐는 그런 멸시에 개의치 않았다. 언제나처럼 남편을 사랑해 주었다. 문제는 자로딘이었다. 그는 그런 질문을 던지는 이들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자로딘의 입에서 메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아내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씨발.”

로난은 하마터면 칼을 뽑아들 뻔했다. 실험이 끝나기까지는 십 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자로딘이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수시로 내게 결혼한 이유를 물었다. 나는 매번 다른 대답을 했지. 원주민과의 우호를 위하여, 어떤 마법적인 연구를 위하여···몇 번의 문답은 아내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자로딘은 아내에게 사과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미꽃을 건네면서. 수냐는 언제나 바보처럼 웃으며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녀가 죽은 것은 이제 자로딘이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게 될 무렵이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죽어 있었다고 한다.

“왜 죽었는지는 몰라요?”

“모른다. 병사도, 독사도 아니었어. 도저히 사인을 파악할 수 없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이후의 내용은 로난이 일기에서 본 것과 같았다.

그는 아내를 되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있었다. 이야기를 마친 자로딘이 입을 다물었다. 로난은 바닥에 침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진짜 개자식이었네요 교수님. 짐승 새끼도 그거보단 낫겠네.”

“부정하지 않겠다.”

“그럼 사인을 밝히기 위해서 아내를 되살리려는 거예요?”

“물론 그것도 있지. 사과도 해야 한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수도 없이 들어온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다. 왜 그녀와 결혼했냐는 질문 말이다.”

“뭐라 대답할 건데요?”

“먼저 그 자가 누구든 간에 주먹으로 얼굴을 날려 버릴 거다. 그리고···”

말꼬리를 끌던 자로딘이 고개를 들어 로난을 바라보았다. 눈구멍 깊숙이 박혀 있는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의 입이 나지막이 벌어졌다.

“그냥,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대답할 거다.”

로난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한 시간이 지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이 유리관을 쳐다보았다. 자로딘의 얼굴이 굳어졌다.

“······”

더는 남아 있는 마나가 보이지 않았다. 수냐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오 분을 더 지켜보던 자로딘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유리관에 손을 얹은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실패로군.”

자로딘의 표정은 덤덤했다. 책상 앞으로 발걸음을 옮긴 그가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머지않아 깃털 펜이 끼적대는 소리가 적막 속에 들려왔다. 필히 144번째 실패에 대해 작성하고 있을 터였다.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빌어먹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거창한 소재를 사용했지만, 이것 역시 무수히 많은 시도 중 한 번일 뿐이었다. 몸을 돌린 로난이 막 걸음을 내딛으려는 차였다. 별안간 이질적인 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부글.

“음?”

로난이 뒤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난은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 채, 보고서를 끄적이고 있는 자로딘을 불렀다.

“···자로딘?”

“왜 그러나.”

“이거 와서 봐야할 거 같은데요.”

자로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로난은 눈을 튀어나올 듯이 크게 뜬 채 유리관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수냐에게 닿았다. 쥐고 있던 깃털펜이 바닥에 떨어졌다.

“···맙소사.”

자로딘이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단번에 일어서지를 못했다. 그는 불과 다섯 걸음이 되지 않는 거리를 다가오는 동안 세 번을 넘어졌다.

이윽고 유리관 앞에 도달한 그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투명한 눈물이 쉴 새 없이 자로딘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유리관을 짚은 채 머리를 처박았다. 가냘픈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

수냐의 입가에서 기포가 올라오고 있었다. 발생하는 간격이 호흡처럼 안정적이었다. 납처럼 창백하던 몸에는 은은한 혈색이 감돌고 있었다.

****

로난은 41번탑을 빠져나왔다. 도저히 머무를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유리관을 붙잡은 채 오열하던 자로딘은 다시 미친 듯이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잘 된 거겠지. 지금까지와는 달랐으니까.’

144차 소생 시도는 실패가 아니었다. 수냐는 다시 살아 숨쉬기 시작했고, 생명체로서의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다만 의식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인지 눈을 뜨지는 못하고 있었다. 자로딘이 정말로 사람을 온전히 되살리는데 성공했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로난은 교정을 거니는 내내 자로딘과 수냐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참 사람 마음을 복잡해지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사랑해서 결혼했다라.'

로난은 그대로 기숙사로 돌아왔다. 어째 오던 잠도 달아난 것 같았다. 막 건물에 들어서려는데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난.”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키가 큰 소녀가 건물 벽면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무예과가 입는 외투가 한 벌 들려 있었다. 로난이 갸웃거렸다.

“아데샨?"

"응. 오랜만은 아니고...하루 만이네."

"여긴 무슨 일이에요?"

"제국의 샛별이 너를 찾아다니길래 혹시나 해서 와 봤어. 이사가 어쩌고 하던데."

"이사요?"

"응. 엄청 급한 일이라더라. 빨리 동아리 건물로 와 달랬어."

"이 빌어먹을 놈이 또 무슨...말해줘서 고마워요."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소재가 아니었다. 로난이 막 발걸음을 돌리려는 차였다. 벽에서 몸을 뗀 아데샨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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