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79화 (79/333)

< 79. 이사 대작전(3) >

#79

“자, 자이파···!”

“뭐?”

거대 와이번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폭발하듯 터져 나온 피가 하늘을 적셨다. 곧바로 몸을 돌린 웨어타이거가 로난과 여인의 목을 동시에 휘감은 채 낙하하기 시작했다.

“커억!”

저항할 새도 없었다. 혀를 깨물어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강철로 된 비단뱀이 목을 조이는 것 같았다.

“젠···장···놔라!”

추락은 상승보다 훨씬 빨랐다. 라만차를 역수로 고쳐 잡은 로난이 수인의 목을 찌르려 들었다. 채찍처럼 날아온 꼬리가 로난의 손목을 휘감았다.

“무슨···!”

저지당한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 순간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굉음이 울려 퍼졌다. 점멸하는 의식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사로군. 기절하지 않았나.”

산맥처럼 깊고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로난이 세차게 어깨를 뒤틀었다. 헐거웠던 속박이 풀리며 몸이 자유를 되찾았다.

“빌어먹을!”

빠르게 몸을 뺀 로난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검을 겨누었다. 주변 풍경은 어느새 하늘에서 숲 속으로 바뀌어 있었다. 분열되어 있던 시야가 하나로 합쳐지며 아까 본 웨어타이거의 모습이 나타났다. 로난의 입이 나지막이 벌어졌다.

“···자이파.”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국제일검이 눈앞에 있었다. 두 다리로 서 있는 흑호의 모습은 힘이라는 개념 자체를 형상화한 것 같았다.

살짝이라도 건드리면 폭발하며 주변의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것 같은 그런 종류의. 호박색으로 타오르는 두 개의 눈동자는 태고의 야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옆구리에는 로브를 입은 여인이 축 늘어진 채 끼워져 있었다. 등이 천천히 부풀었다 꺼지는 것을 반복하는 걸로 보아 죽은 것은 아니었다. 로난이 말했다.

“그년은 나랑 선약이 있는데.”

자이파는 대답하지 않았다. 쏴아아- 붉고 뜨거운 액체가 머리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와이번의 피로 이루어진 장대비였다.

뒤이어 토막난 고깃덩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핏물이 온몸을 적시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로를 응시했다. 마침내 여인을 내려놓은 자이파가 입을 열었다.

“너는 아니군.”

“뭐?”

“인사나 하지. 칼을 들어라.”

한순간 자이파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성이 아닌 본능이 로난의 몸을 움직였다. 칼자루를 양손으로 움켜쥔 그가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사라졌던 자이파가 눈앞에 나타남과 동시에 두 개의 날붙이가 격돌했다. 콰아아앙! 벼락을 연상케 하는 파열음이 숲을 흔들었다.

“크억!”

로난의 몸이 튕겨 나갔다. 어깨뼈가 살을 뚫고 나오는 것 같았다. 제비를 돌며 균형을 잡은 로난이 자세를 다잡았다. 자신이 두 발로 일어서 있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찔한 충격이 아직도 몸 안을 맴돌고 있었다.

‘무슨 힘이···!’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은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으나 예상과 달리 두 번째 공격은 날아오지 않았다. 언월도를 세워든 자이파가 눈썹을 으쓱였다.

“익숙한 기술이군. 그 뱀의 제자라도 되는 건가.”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간단한 인사다.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합이 서로를 파악하기에 적합한 법이지.”

자이파는 언월도를 휘둘러 칼날에 묻어 있던 피를 털어냈다. 그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있는 로난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시커먼 털로 뒤덮인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이파 터르겅이다.”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행동거지는 둘째치고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로난은 한참동안 자이파를 노려보았다.

“······”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와중에도 그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피의 비가 그쳤다. 결국 칼자루를 놓은 로난이 악수에 응했다.

“···로난.”

“명료해서 좋군. 전사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야.”

자이파가 옅게 웃었다. 아무래도 자신을 죽이거나 잘게 찢어서 샌드위치에 끼워 먹을 의사는 없는 것 같았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로난이 입을 열었다.

“됐으니 그 여자나 내놔. 내가 거의 다 잡아 놓은거 봤을 거 아냐.”

“거절한다.”

“젠장, 검성이면 남의 사냥감을 가로채도 되는 거냐? 북부에서 왔으면 그게 얼마나 비겁한 일인지 알고 있을 텐데.”

“네뷸라 클라지에라는 조직에 관해 알고 있나?”

예상치 못한 답변에 로난의 눈이 커졌다. 그가 에두온과 시릴라를 로돌란에 처넣은 이후 제국 전역에 소식이 퍼졌다 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로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그렇다면 설명이 빠르겠군. 그 얼간이들을 잡는 것이 내 임무다.”

“임무라고?”

“그래. 황제께서 새로이 맡기신 과업이지.”

자이파는 영 귀찮다는 듯이 꼬리로 바닥을 탁 탁 내리치고 있었다. 불현듯 나비로제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교단을 상대하기 위한 조직이 신설을 앞두고 있다 했었다. 설마 자이파가 연관되어 있을 줄이야. 문득 의문 하나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 여자가 네뷸라 클라지에인 걸 어떻게 안 거지?”

중요한 문제였다. 그가 알기로 금제를 이용한 취조는 더는 통하지 않았다. 자이파가 뭐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숲 저편에서 쩌렁쩌렁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대장님-!!!”

로난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인간의 성대로는 낼 수 없는 크기였다. 고개를 돌리자 숲 위로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다가오는 그림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이 모두 자이파와 같은 수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그들 중 한 명이 로난의 앞에 착지했다. 온몸이 금빛 털로 뒤덮인 웨어라이온 여성이었다. 갈기는 없었지만 그 위용은 결코 바렌 교수에게 뒤지지 않았다. 로난과 여인을 번갈아 쳐다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멀리서 봤습니다. 이 두 명인가 보군요.”

“여자만. 소년은 아니다.”

“네? 그렇다면 왜 여기에···설마 민간인입니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쓰지 마라. 후속 조치는 어떻게 되어 가나.”

“아아, 몬스터들의 난동이 끝난 것을 확인했습니다. 위협이 될 만한 개체는 모두 제거했고, 투투 병장을 비롯한 일곱 명이 각 도로에서 대기 중입니다.”

“수고했다.”

암사자가 경례했다. 곧이어 다른 수인들이 하나둘씩 착지했다. 웨어타이거, 웨어라이온, 웨어베어···하나같이 대형 맹수를 기반으로 한 수인들은 모두 제국군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거대한 털북숭이들에게 둘러싸인 로난의 모습은 거목들의 틈새에 눈치 없이 자라난 독버섯 같았다. 로난의 존재를 눈치챈 수인들이 웅성거렸다.

“부관님. 이 꼬맹이는 뭡니까?”

“흐하하, 누가 싸 온 도시락 아냐?”

“몸집은 작지만 눈이 매섭군. 독수리의 눈이야.”

로난은 말없이 그들을 훑어보았다. 칼자루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감히 자이파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전원이 상당한 강자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특히 부관이라 불린 암사자의 기백이 심상치가 않았다. 별안간 자이파가 한심한 듯 혀를 찼다.

“웃지 마라, 이 덩치만 큰 멍청이들아. 그 소년은 내 인사를 받고도 두 다리로 서 있었다.”

“···네? 농담하시는 겁니까?”

“의심이 간다면 검을 맞대 봐라.”

수인들의 얼굴이 굳었다. 그들은 달걀을 깨고 나온 드래곤이라도 보는 눈빛으로 로난을 바라보았다.

“부관님을 제외하고는 처음 아니야?”

“말도 안 돼. 인간이잖아. 그것도 아직 어린.”

“전대 검성도 인간이기는 했지. 물론 나는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라 믿고 있지만.”

“···한 번 붙어보고 싶은데.”

아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웅성거림이 이어졌다. 허나 순수한 감탄만을 내비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곳곳에서 나지막한 으르렁거림이 새나오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호승심을 드러내는 수인들을 본 로난이 픽 웃었다. 이래서 짐승들이란. 한 놈 붙잡아 실력 행사를 해야 하나 고려하던 와중,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이익! 사, 살려주세요! 잡아먹지 마세요!”

“꼬마야, 괜찮다니까. 괜찮으니까 좀 진정해.”

“뭐야?”

뜬금없는 소란에 분위기가 풀어졌다.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새빨간 머리칼의 소년이 거대한 웨어베어에게 붙잡힌 채 발버둥치고 있었다. 로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아셀?”

“로, 로난? 살아 있었구나!”

아셀의 표정이 잠시나마 밝아졌다. 하지만 다른 수인들이 구경을 위해 머리를 들이밀자 다시금 계집애 같은 비명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웨어베어가 자이파에게 아셀을 내밀었다.

“지금 복귀했습니다. 어, 민간인 같기는 한데···혹시 몰라서 데리고 왔습니다. 한번만 봐 주시겠습니까?”

“아니다. 풀어 줘라.”

아셀을 훑어본 자이파가 단호하게 말했다. 웨어베어는 그를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아셀은 다리가 풀렸는지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로난에게 달려왔다. 큼직한 눈망울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네, 네가 내려오지 않길래 찾아다니고 있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아셀은 로난을 찾아 돌아다니던 중 붙잡혔다고 말했다. 황급히 몸을 공중으로 띄웠음에도 도망칠 수 없었다고 했다. 문득 끊어졌던 대화를 떠올린 로난이 자이파를 불렀다.

“맞아, 아까 하던 말 마저 해줘야지. 저 년도 그렇고, 이 꼬맹이도 그렇고, 네뷸라 클라지에를 어떻게 가려 내는 거야?”

“직감이다.”

“뭐라?”

“네뷸라 클라지에를 가려 내는 방법 말이다. 허황에 젖어 있는 놈들에게서는 역겨운 풋내가 나거든.”

부연설명은 없었다. 말의 의미를 곱씹던 로난이 헛웃음쳤다. 직감이라니. 이걸 방법이라 불러야 할지도 의문이었다.

“그럼 단순히 범인일 것 같으면 잡아들이는 셈인가?”

“일차적으로는.”

“그냥 마음에 안 놈들을 족친다는 말과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내가 죽이거나 잡아들인 놈들 중 무고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로난은 더는 묻지 않았다. 설명을 마친 자이파가 부관에게 말했다.

“목적은 파악했나.”

“네. 현재로서는 명확하지 않으나 인근에서 벌어진 몬스터들의 난동은 단순한 눈속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사료됩니다. 로마이라 산맥으로 향하던 와이번의 무리가 와해되는 것을 관측했다는 첩보로 미루어 보아, 아마 본 목적은 그쪽에 있던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럼 로마이라로 이동하지. 현 지역의 봉쇄를 풀라고 전달···”

“음?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자이파가 말꼬리를 끌었다. 부관의 질문에도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로난과 자이파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북녘 하늘을 향해 있었다. 아셀이 불안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 그래?”

“에이, 씨발.”

별안간 로난이 엎드려 있는 여인을 돌아보았다. 새하얗던 로브는 온통 피에 젖어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벅저벅 걸어간 로난이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서 거칠게 들어 올렸다.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하하···아하하하···!”

“젠장. 일 처리를 똑바로 해야 할 거 아냐.”

로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은 광기로 일그러져 있었다. 주변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제야 이변을 눈치챈 수인들의 시선이 북측으로 향했다.

“저건···!”

북녘 하늘에서 무언가 새카맣게 준동하고 있었다. 철새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은 단숨에 알아챌 수 있었다. 거대한 날개가 대기를 찢으며 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칙칙한 색을 띠는 와이번들은 족히 백 마리가 넘어 보였다.

“아하하! 그래 맞아 자이파. 일처리를 똑바로 했어야지!”

여인이 다시금 광소를 터트렸다. 와이번들은 로마이라 산맥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노림수를 깨달은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머지않을 미래에 겨울의 마녀가 저지를 범죄인, 로마이라 산악도로의 무력화였다.

“이 빌어먹을 년이.”

“가장 쓸만한 아이는 잃었지만 상관 없어. 어디 한 번 막아 봐!”

퍽! 로난이 칼자루로 여인의 뒷목을 내리쳤다. 의식을 잃은 몸뚱이가 축 늘어졌음에도 와이번들은 멈추지 않았다.

‘보통은 술자가 무력화되면 주술이 풀리기 마련인데···아예 죽여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던 차에 자이파의 발이 여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빠직! 벌레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붉은 꽃이 피어났다. 북녘 하늘을 힐끔 쳐다본 자이파가 덤덤하게 말했다.

“흠. 죽여도 멈추지 않는군."

“···술자가 더 있나봐. 아마 저 와이번들 사이에 있겠지.”

“그렇군. 합리적인 추론이다.”

“이제 어쩔 거야?”

로난은 얼굴에 튄 뇌수를 닦아내며 물었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이파와 수인들의 얼굴에서는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 수 있나. 다 죽여야지.”

옷이 더러워졌으니 아깝지만 버려야겠군. 딱 그 정도의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부관이 질문했다.

“혼자 가십니까?”

“그래. 오러를 사용할지도 모르니 민간인들을 대피시키도록.”

“알겠습니다. 모두 위치로!”

명령을 전달받은 수인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언월도를 한 바퀴 돌려 잡은 자이파가 몸을 웅크렸다. 그의 뒷다리가 거진 두 배로 팽창하며 몸을 쏘아 올릴 준비를 했다. 문득 꼬리가 묵직해진 것을 느낀 자이파가 고개를 돌렸다.

“뭐 하는 짓이지.”

“닥치고 출발해.”

로난은 오른손으로 자이파의 꼬리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왼쪽 옆구리에는 새하얗게 질린 아셀이 단단하게 붙들려 있었다. 아셀은 도마 위에 오른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며 곧 닥쳐올 미래를 부정하고 있었다.

“로, 로난?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지? 그치?”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헛웃음 친 자이파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한계에 다다른 아셀이 비명을 터트리는 순간이었다.

파아앙! 자이파의 몸이 용수철처럼 펼쳐졌다. 하늘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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