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80화 (80/333)

< 80. 이사 대작전(4) >

#80

파아앙! 자이파의 몸이 용수철처럼 펼쳐졌다. 하늘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있는 힘껏 꼬리를 움켜쥔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뭔, 씨발···!”

“아아아아아아!”

하마터면 목뼈가 부러질 뻔했다.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속도였다. 순식간에 작아진 숲이 먼발치에서 너울거리고 있었다. 파앙! 완만한 호를 그리며 떨어진 자이파가 땅을 딛고 재도약했다.

“갸아아아악!”

졸도했던 아셀이 깨어나며 비명을 질렀다. 침과 눈물이 궤적을 따라 뿌려졌다. 와이번들은 여전히 바이디안 산맥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자이파는 고작 일곱 번의 도약으로 와이번들을 따라잡았다. 그는 와이번의 무리가 곧 도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 멈춰 섰다. 너른 들판 한복판에 망루처럼 튀어나와 있는 바위였다.

“이제 내려라.”

“억!”

자이파가 튕기듯이 꼬리를 휘둘렀다. 두 소년은 거대한 채찍에라도 맞은 것처럼 나동그라졌다. 간신히 로난의 옆구리에서 벗어난 아셀이 바닥에 엎드린 채 오열하기 시작했다.

“우으으···너무해···이건 진짜 너무해···.”

더는 몸을 일으킬 힘도 없어 보였다. 로난은 질질 짜는 아셀을 내버려 둔 채 자이파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바위의 가장자리에서 팔짱을 낀 채 북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군.”

“그러게.”

와이번들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섬뜩한 포효를 내지르며 다가오는 와이번의 무리는 지옥에서 올라온 먹구름 같았다. 족히 백 마리는 넘을 머릿수를 본 로난이 혀를 내둘렀다.

“염병, 알뜰하게도 모았네. 와이번이 흔한 몬스터는 아닌데.”

“아깝군. 저걸 다 죽여야 한다니.”

자이파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와이번은 그리폰과 마찬가지로 길들여서 타는 것이 가능한 몬스터였다.

저 정도 수라면 그 가치는 천문학적일 터였다. 잠시 침묵하던 자이파가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따라온 거냐.”

“그냥 뭐, 조금 도와주려고. 검성 나리 실력도 볼 겸.”

“도와준다고?”

“그래. 혹시라도 놓치는 놈이 있으면 안 되잖아.”

“재미있군.”

자이파가 픽 웃었다. 기다란 꼬리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한참을 클클거리던 그는 아무런 전조도 없이 언월도를 휘둘렀다.

쉭! 단순히 날이 잘 들었는지 확인하는 듯한 평범한 동작이었다. 방향은 와이번들을 향하고 있었으나 검기 같은 것은 발사되지 않았다. 뭘 한 거지?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찰나 무리 중앙에 검고 거대한 선이 그어졌다.

“어?”

크라티르의 공간 마법에서나 볼 수 있던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직경이 족히 50m는 되어 보이는 선은 와이번의 무리를 완전히 양단하고 있었다. 자이파가 말했다.

“헌데, 뭘 도와주겠다는 거지?”

로난의 눈이 커졌다. 그때 검은 선이 붉게 물들며 피보라가 터져 나왔다. 불꽃 마법이 줄지어 폭발하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뒤늦은 파공음과 함께 와이번들의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키아아아악!”

“크에에엑!”

선혈의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토막난 살덩이가 대책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자이파는 연달아서 언월도를 휘둘렀다. 서걱! 다시금 검은 선이 무리를 가로지르며 스무 마리 정도 되는 와이번을 고깃덩이로 만들었다.

“이건···!”

로난은 그제야 언월도의 창날에 정체불명의 마나가 응축되어 있는 것을 눈치챘다. 분명 자이파의 오러일 터였다. 해가 뜨기 직전의 새벽처럼 시커먼 오러에서는 생전 본 적 없는 거대한 힘이 맥동하고 있었다.

‘완전히 괴물이군. 격이 달라.’

로난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나비로제가 패배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그때 학살당하던 와이번들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마구잡이로 뭉쳐 있던 무리가 열세 개의 편대로 분열하며 부채꼴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허?”

편대당 서너 마리씩 구성된 와이번들은 어디 한번 맞춰 보라는 듯이 어지러이 비행하며 로마이라 산맥으로 향했다. 살기 위해 자연스레 흩어지는 것이 아닌, 명백한 의도를 가진 전략적인 산개였다.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아직 술자가 죽지 않은 모양인데.”

“그런 것 같군.”

자이파는 당황하지 않았다. 남아있는 와이번의 수를 얼추 가늠한 그가 로난을 돌아보며 말했다.

“방해하지 마라.”

쾅! 쏘아지듯 도약한 자이파가 참격을 날렸다. 선두로 접근하던 와이번 네 마리가 아홉 토막으로 나뉘며 추락했다. 그가 공중에서 언월도를 휘두르자 저 멀리 날아가던 와이번 편대 두 개가 피구름으로 변모했다. 다시 한 번 쏟아진 붉은 비가 숲을 적셨다.

“미친놈.”

자이파는 도약과 착지를 반복하며 학살을 자행했다. 하나의 편대가 전멸하는 꼴을 본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괜히 수인들이 여유롭던 것이 아니었다. 저 기세라면 와이번들은 로마이라 산맥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몰살당할 터였다.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로난의 표정은 영 개운하지가 않았다.

‘뭔가 이상해.’

네뷸라 클라지에 특유의 반짝이는 마나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눈에 힘을 주고 주변을 살펴도 마찬가지였다.

‘틀림없이 주변에 있을 텐데.’

네뷸라 클라지에는 교활했다. 설령 와이번을 다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조직원을 잡지 않는 이상 안심할 수 없었다.

와이번들의 정교한 움직임으로 미루어 보아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어딘가에 교묘히 몸을 감추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디냐. 어디에 숨었지?’

문득 로난의 시선이 비어 있는 하늘에 닿았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 아래 크고 작은 뭉게구름 몇 덩이가 흘러가고 있었다.

거지 같은 상황만 아니라면 자리를 깔고 앉아서 볼만한 운치 있는 풍경이었다. 불현듯 이질감을 느낀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으음?”

구름 하나가 유난히 낮게 날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었으나 문제는 방향이었다.

바람과 미묘하게 어긋난 각도로 흘러가는 구름은 정확히 로마이라 산맥을 향하고 있었다. 로난의 입이 나지막이 벌어졌다.

“찾았다.”

“히이이이익···.”

아셀은 하얗게 질린 채 자이파의 학살을 지켜보고 있었다. 검은 탄환이 공중으로 쏘아 올려 질 때마다 최소 세 마리의 와이번이 살해당하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핏방울이 그의 머리카락을 더욱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때 바위 가장자리에 서 있던 로난이 황급히 달려왔다.

“다 쉬었으면 슬슬 일어나라. 잡으러 가야지.”

“자, 잡으러 간다고···?”

“그래. 이 개새끼들, 잔머리 굴리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인 로난이 아셀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아셀과 어깨동무를 한 채 수상쩍은 뭉게구름을 검지로 가리켰다.

“저거 보이냐. 이상하게 낮게 날고 있는 구름.”

“으, 응.”

“저기까지 갈 거야. 할 수 있지?”

“너, 너무 멀어···! 던졌다가는 틀림없이 빗나갈 거야···.!”

“뭔 소리야. 너도 같이 갈 건데.”

“에?”

아셀은 금방이라도 자살해 버릴 듯한 표정을 지은 채 얼어붙어 버렸다. 로난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맨몸으로 날아가는 것보다는 뭐 하나를 붙잡고 가는 게 훨씬 안정적일 터였다.

“지지대 역할을 할 만한 게 있으면 좋을 텐데···어디 보자.”

돌덩이 위라 그런지 영 쓸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돌이라도 부숴서 타고 가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콰앙! 갑자기 와이번의 머리 하나가 아셀의 눈앞에 떨어졌다. 주저앉은 아셀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쳤다.

“끄아아아악! 끄아아악!!”

“뭐야?”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이파의 작품이었다. 광기로 물들어 있는 눈동자는 아직도 살아 있는 것처럼 끔뻑이고 있었다. 로난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 딱 좋아.”

크기도 적당하고 손잡이 역할을 해 줄 뿔도 있었다. 로난은 졸도하려는 아셀을 붙잡아 옆구리에 끼웠다. 와이번의 머리를 밟고 올라선 그가 아셀을 흔들며 말했다.

“출발.”

****

매미가 우는 계절이 찾아왔음에도 드높은 상공은 늦가을처럼 쌀쌀했다.

백색 구름이 사방을 자욱하게 뒤덮고 있었다. 그 안에서 와이번 두 마리가 소리 없이 비행하고 있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구름은 거친 날갯짓에도 흩어지지 않고 일정한 형태와 속도를 유지했다.

붉고 누런 비룡들의 등 위에는 하얀 로브를 입은 청년과 노인이 타 있었다. 그들은 벌써 몇 시간째 추위에 떨며 하늘 위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붉은 와이번에 타 있던 청년이 입을 열었다.

“얼마나 남았지?”

“이제 금방이야. 늦어도 삼십 분 정도면 도착할 걸세.”

“그거 다행이군. 제기랄, 멍청한 계집 하나 때문에 기껏 모은 와이번을 다 잃게 생겼어.”

청년이 투덜거렸다. 그는 이번 작전을 위해 와이번을 모으고 조종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함께 조종을 맡은 동료가 갑자기 진형을 이탈하는 탓에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인이 끌끌거렸다.

“어차피 미끼 용으로 모은 건데 뭘 그러나.”

“그래도 아까운 걸 어떡해.”

“자이파에게 들키지 않을 것만으로 감사히 여기게나. 황급히 조처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위험했네.”

“···영감 말이 맞아. 그 괴물에게 걸렸으면 우리도 다 죽었겠지. 젠장, 어떤 미친놈이 썩은 생선 냄새를 퍼트린지는 몰라도 꼭 뒈졌으면 좋겠군.”

“끌끌···목적만 달성한다면 그렇게 될 걸세.”

일이 틀어지기는 했지만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몬스터들을 광분 사태에 빠트린 것도, 세 자릿수가 넘어가는 와이번 떼도 모두 시선을 돌리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다. 청년이 불안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잘 가지고 있는 거 맞지? 지금 떨어뜨리면 정말 끝이라고.”

“염려 마시게. 떨어뜨리더라도 땅에 닿기 전에 내가 가져올 테니까.”

수염을 매만지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타고 있는 와이번의 발톱에는 재질을 알 수 없는 금속으로 만든 구체가 들려 있었다.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고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구체의 표면을 뒤덮고 있었다. 구체를 힐긋 쳐다본 청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알리브리헤 님은 대단해. 저 작은 구체에 서른 개의 마법이 각인되어 있다니.”

“괜히 고위 간부가 아니지. 그야말로 별의 은총일세.”

“내 말이. 참, 브리기아 님이 빠지면서 생긴 자리에 영감이 들어갈 수도 있다는데, 진짜야?"

“그렇다네. 내가 감히 그분의 강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우와, 그럼 교주님의 축복도 받았어?”

노인은 대답하는 대신 껄껄 웃었다. 그 의미를 눈치챈 청년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노인의 강함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지부장의 자리까지 도달할 줄은 몰랐다. 청년이 흥분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뭘로 받았수? 엉?”

“허허, 그건 말해줄 수 없지. 다만 저 물건을 산맥에 떨어뜨리고도 우리를 구해줄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만 알려 주겠네.”

청년이 탄성을 흘렸다. 이미 뭘 받았는지 다 말해준 거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조금 무서웠는데 이제 마음을 놓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부터 제국은 동맥 경화에 시달릴 것이다.

로마이라 산악도로에서 일어나는 대폭발은 잊지 못할 악몽이 되어 무지몽매한 이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좋아, 그럼 일단···”

청년이 뭔가 말을 이으려던 차였다. 촤아악! 갑자기 눈앞의 구름이 갈라지며 와이번의 머리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세뇌가 풀린 개체가 덤벼드는 줄로만 알았다. 헌데 와이번의 머리 뒷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청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머, 머리?!”

“썅, 더럽게 오래 걸렸네. 고생했다 아셀.”

“으, 응···! 그나저나 정말 사람들이···!”

게다가 와이번의 머리 위에는 사람이 타 있었다.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애새끼 두 명이. 줄곧 평온을 유지하던 노인이 당황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는 뭐지···?”

“두 명이네. 하나는 죽여도 되겠어.”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리는 이미 충분히 좁아져 있었다. 그는 주저 없이 와이번의 머리를 박차며 노인에게 도약했다. 칼집에서 뽑혀 나온 라만차가 구름을 찢으며 쇄도했다.

“오호.”

노인이 눈썹을 으쓱였다. 소년의 참격은 미처 대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날아왔다. 반격이나 회피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노인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여기서 보여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아깝구먼.”

노인의 몸 주위로 둥그런 방어막이 펼쳐졌다. 익숙한 모습에 로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나 실드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는 기괴한 장막, 별의 가호였다. 로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듯이 말했다.

“와 씹. 좆될 뻔 했네.”

“으음?”

라만차는 그대로 별의 가호를 썰면서 호를 그렸다. 스각! 주름진 목에 붉은 선이 생겼다. 로난이 그의 가슴을 걷어차며 착지함과 동시에 노인의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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