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83화 (83/333)

< 83. 이사 대작전(7) >

#83

조명이 켜져 있지 않은 2층은 고즈넉한 달빛에 휩싸여 있었다. 이릴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와아아아···!"

넓찍한 발코니 너머로 필레온 아카데미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부지를 둘러싼 성벽 탓에 시야가 제한되었지만, 동문과 마주 보고 있는 이 집에서는 아름다운 교정을 감상할 수 있었다.

“나가서 보자.”

“어어? 응···!”

로난은 이릴을 데리고 발코니로 나갔다. 선선한 밤바람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높아진 시야에서는 평소보다 많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학생들이 오가는 대로가 보였고, 길의 양옆으로 늘어선 가로등이 보였고, 하늘을 찌르는 첨탑들과 부지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강이 보였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임에도 필레온 아카데미의 곳곳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별안간 검지를 치켜든 로난이 교정 한구석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그가 머무는 기숙사인 나바르도제 관이었다.

“난 저기서 살아.”

“와아, 진짜 가깝네...! 저번에 편지로 알려 줬던 곳이구나?”

거리를 확인한 이릴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실제로 나바르도제 관과 새로운 집까지의 거리는 뛰어서 1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로난이 이 집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다섯 겹으로 인챈트 되어 있는 침입자 방지 마법도, 지하실의 비밀 대피소도 좋았지만. 결국 최고의 안전책은 가까운 거리였다.

무슨 일이 생겨도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고, 정 급하면 시타를 보내면 됐으니까. 시타의 속도로 미루어 보았을 때 기숙사 창문에서 여기까지는 수십 초면 충분할 터였다.

동생이 지내는 곳을 언제나 볼 수 있게 됨으로써 누이가 얻는 심리적 안정감은 덤이었다. 야경을 감상하던 이릴이 별안간 메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고마워 로난. 진짜로.”

“그래서 집은 마음에 들어?”

“응. 엄청···!”

이릴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감격의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괜스레 콧잔등이 시큰해진 로난이 시선을 회피했다. 빠르게 눈가를 닦아낸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해결했군.’

필레온에 입학할 때부터 목표 삼았던 일이 끝났다. 이제야 마음을 놓고 싸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독한 향수병이라도 발병하지 않는 이상 머나먼 님버튼까지 돌아갈 일이 사라진 것이다.

문득 슐리펜과 머리를 맞대고 집을 고르던 나날을 회상한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의도야 어떻건 이런 좋은 집을 구한 데는 그 자식의 역할이 컸다.

슐리펜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이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난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황급히 딴청을 피웠다. 로난이 픽 웃었다.

‘알기 쉬운 새끼.’

가끔씩은 집에 초대하거나 이릴의 경호를 부탁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마 과할 정도의 동기부여가 되겠지. 그때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온 시타가 난간 위에 앉았다.

“뺘!”

“왔냐.”

로난의 지시에 따라 이사 도중 따라붙은 놈은 없었는지 정찰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이릴이 시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앗, 시타. 어디 갔다 왔어?”

“빠야아~”

“에헤헤, 새 집이 마음에 들어? 이제 님버튼이 아니라 여기로 오면 돼.”

시타는 별다른 보고 없이 이릴에게 애교를 떨었다. 다행히도 아무 일 없던 모양이었다. 로난은 이릴이 시타와 놀고 있는 틈을 타 실내로 돌아왔다. 그는 아셀과 슐리펜을 번갈아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고맙다. 덕분에 잘 끝냈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아, 아니야. 여러 가지···일이 있었지만, 도울 수 있어 기뻤어.”

아셀이 작게 덧붙였다.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낄낄거리던 로난이 무언가 생각난 듯 손가락을 튕겼다.

“참, 네 부모님도 모셔 와야지 아셀.”

“으응. 안 그래도 여름이 오기 전에 끝내려고.”

“그래 인마, 잘 생각했어. 다 잃고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이, 잃다니. 그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쨌든 무조건 도와줄 테니까 때 되면 말해.”

아셀이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님버튼에 있는 부모님을 데려올 준비를 착실하게 하고 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가 준동하는 지금은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었다.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슐리펜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짐은 언제 푸는 거지?”

“그건 좀 천천히 해도 되지 않냐?”

“난 너희같은 야만인의 안목을 믿을 수 없다. 지금 당장 시작하지.”

슐리펜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은 곧장 짐을 풀고 배치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아무리 가져온 게 적다고 해도 한 집의 살림살이를 적절한 위치에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슐리펜과 아셀이 있어서 일을 편리하게 해치울 수 있었다. 미적 감각이 뛰어난 슐리펜이 지시를 내리면 아셀이 염력을 이용해서 가구를 배치하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아니. 화분을 거기에 놓으면 미관을 해친다. 조금 더 오른쪽으로.”

“그, 그럼 여기 두면 될까···요?”

“적당하군. 이름이 뭐지?”

“아, 아셀이야···요.”

“그렇군 아셀. 이릴 양과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걸로 들었는데, 사실인가.”

“네에? 그, 그런데···요.”

어색하면서도 나름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그들은 해가 떠오를 무렵에 정리를 마쳤다. 님버튼에서 가져온 짐을 모조리 풀자 텅텅 비어 있던 집은 그나마 사람 사는 꼴을 갖추게 되었다.

“와아아, 끝! 다들 너무너무 고생 많았어! 밥 먹고 가!”

앳된 서광이 주방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만세를 부른 이릴이 아침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나섰다. 당장 있는 식재료가 감자밖에 없는 터라 메뉴는 자연스럽게 감자 스튜가 되었다.

“이걸. 정말 내가 먹어도 되는 건가.”

“주접 그만 떨고 팍팍 퍼서 먹어라.”

그들은 님버튼에서 가져온 지저분한 나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슐리펜은 고기도 안 들어간 감자 스튜를 황제가 내린 포도주라도 되는 것처럼 황송해 하며 먹었다. 그 모습을 본 이릴이 신이 나서 말했다.

“와아, 입에 맞으세요? 귀족분이라 이런 건 별로 안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아주. 맛있소. 아주 말이지.”

“에헤헤, 아직 많아요! 더 드세요!”

슐리펜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자 스튜를 다섯 그릇째 새로 받는 그의 얼굴에는 비장미마저 감돌고 있었다. 마룡 오르세와 맞서던 용사들도 저따위 표정은 안 지었을 것 같았다.

병신새끼. 그리 읊조린 로난이 스리슬쩍 2층으로 올라갔다. 발코니로 빠져나온 그가 품에서 담뱃대를 꺼냈다.

“이건 못 참지.”

이릴에게 걸리기 전에 얼른 빨아 둬야 했다. 그는 교정을 오가는 학생들을 보며 연기를 내뱉었다. 지금쯤이면 출근한 바렌 교수가 거품을 물고 있겠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로난의 귓가에 문득 한 줄기의 소란이 스쳤다.

“···안 돼요!”

“엉?”

“···님! 참아요!”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로난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사람들이 무언가를 구경하듯 둥그렇게 모여 있었다. 개중에는 자이파의 부하인 수인들도 밀밭의 허수아비마냥 솟아나 있었다.

‘저 털보들은 왜 저기 몰려 있어?’

로난이 발코니 바깥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인파의 중심에서는 세 명의 남녀가 서 있었다. 로난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이런 씨발.”

자이파와 나비로제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대태도 우루사가 나비로제의 손에 쥐어져 있는 걸로 보아 그다지 분위기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교복 차림의 아데샨이 그녀를 끌어안은 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교관님, 진정하세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하지만 너도 보았지 않느냐 아데샨. 저 늙은 고양이가 나를 도발하는 걸.”

“그냥 눈이 마주쳤을 뿐이잖아요!”

우루사의 검신을 타고 일렁이는 마나가 여기서도 보일 지경이었다. 욕지거리를 내뱉은 로난이 발코니 아래로 뛰어내렸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둘 중 한 명이라도 검을 잘못 휘두른다면 굉장히 재미없는 일이 벌어질 터였다. 금세 목적지에 도착한 로난이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는 수인들을 채근했다.

“이 자식들아, 뇌에도 털이 났냐? 일대가 날아가게 생겼는데 왜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어?”

“꼬, 꼬마야. 저 여자가 누군지 몰라? 전대 검성이잖아.”

“우리가 저길 어떻게 끼어들어? 부관님이라면 모를까···!”

“에잇, 쓸모없기는.”

로난은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나섰다. 머지않아 두 검성과 안절부절못하는 아데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묵묵히 그녀를 내려보던 자이파가 입을 열었다.

“불 같은 성미는 여전하군 나비로제. 교육자가 되었다길래 조금은 유해진 줄 알았거늘.”

“됐으니 검을 뽑아라. 기왕이면 그 이쑤시개 말고 네 검을 사용했으면 좋겠군.”

“호승심은 높게 산다만 알지 않나.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그 순간 나비로제의 검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로난과 자이파를 제외한 누구도 그 궤적을 보지 못했다. 후웅! 우루사가 허공에 반원을 그리는 순간 초승달 형상의 검기가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지름이 거진 200m에 이를 것 같은 거대한 검기는 머리 위를 표류하던 뭉게구름을 그대로 반으로 갈라놓았다. 구경꾼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이파의 입에서 흥미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미있군.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어.”

“이제 좀 해볼 마음이 생겼나?”

“가벼운 운동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르겠군.”

언월도를 쥔 자이파의 손에 힘줄이 솟았다. 수인들의 꼬리가 다리 아래로 말려들어 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포효하며 서로를 향해 달려들 것 같은 분위기가 두 검성 사이에 감돌고 있었다. 나비로제가 먼저 발을 내딛으려는 차였다. 인파 위로 도약한 로난이 둘 사이에 착지했다.

“젠장, 알만한 작자들이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로난?”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나비로제가 멈춰 섰다. 고조되었던 긴장감이 풀어지며 시간이 원래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김이 빠진 듯 헛웃음을 친 자이파가 언월도를 거두었다.

“...이사는 잘 마친 건가.”

“뭐, 그렇지.”

“잘 됐군. 나는 슬슬 가봐야 한다. 부관에게 말해 놓았으니 인근 경비대에서 현상금을 받아 가라.”

“현상금?”

“그래. 네가 죽인 네뷸라 클라지에의 노인이 제법 유명한 수배범이더군.”

자이파는 별의 가호를 쓰던 노인의 목에 상당한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또 의외의 소득이었다. 벙쪄 있던 나비로제가 검 끝으로 자이파를 겨누며 으르렁거렸다.

“네놈이 왜 내 제자와 함부로 대화하는 거냐.”

“말도 못 섞게 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아끼나 보군. 그럴 만하긴 하다만.”

“말을 돌리지 마라. 그리고 이사라니, 무슨 소리지?”

“그런 건 직접 들어라. 참, 이 아이와 제국의 샛별은 모두 내 인사를 받고 두 다리로 서 있었다. 좋은 제자들을 두었더군.”

“뭐라?”

나비로제가 미간을 좁혔다. 자이파가 뭐라 말을 이으려는 차였다. 인파가 양옆으로 갈라지며 부관 웨어라이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이파에게 경례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대장님. 황제 폐하께서 호출하셨습니다. 지금 즉시 황궁으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젠장, 이래서 얼른 뜨려 했던 건데···알았다.”

자이파가 혀를 찼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황제에게 별로 좋은 감정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피의 맹약으로 강제로 이어져 있는 관계였으니. 나비로제에게도 경례를 한 부관이 로난을 내려보며 말했다.

“체포에 협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상금은 꼭 수령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요.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자주 보는데 이름 한 번 들은 적이 없네.”

“황실 기사단 소속 네메아 소령입니다.”

“우와, 엄청 엘리트였네. 우리 교수 중 한 명이랑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소개해 줄까요?”

네메아가 당황한 듯 움찔거렸다. 덩칫값을 못 하는 행동을 본 로난이 픽 웃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던 자이파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난 가 보겠다. 검의 제전을 기대하고 있겠다, 로난.”

“검의 제전?”

생소한 이름에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이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네메아 부관을 비롯한 부하들과 함께 끌려가듯 황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실복실한 거인들은 한참이 지나서야 시야에서 사라졌다. 별안간 가만히 서 있던 아데샨이 다리에 힘이 풀린 듯이 휘청거렸다. 로난이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아···고마워.”

“뭐야. 갑자기 왜 그래요? 괜찮아요?”

“으응···그런데···실제로 보니 조금···긴장하고 있었다 해야 하나.”

아데샨의 호흡이 거칠어져 있었다. 뒤늦게 원인을 눈치챈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송곳니의 밤을 일으킨 자이파는 아데샨의 원수라고 볼 수 있었다.

“젠장. 뭐라 해야할 지 모르겠네. 고생했어요.”

“으응, 이제 정말 괜찮아. 도와줘서 고마워.”

아데샨이 부축을 풀며 일어났다. 한참을 마주치고 서 있었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비명을 지르거나 기절하지 않은 것이 대견할 지경이었다. 부모님과 오빠들이 죽은 원인을 직접적으로 제공한 인물이니. 그때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나비로제가 로난에게 다가왔다.

“로난. 그 고양이의 말이 사실인가.”

“네?”

“인사를 받고 두 발로 서 있었다는 것 말이다.”

“어···그렇죠? 인사가 그 지랄 맞은 기습을 얘기하는 거면 맞아요.”

나비로제의 눈이 커졌다. 심호흡으로 감정을 가라앉힌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 노괴와 있었던 일을 모조리 설명해라. 하나도 빠짐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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