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계절은 봄을 넘어 여름으로(1) >
#84
나비로제의 눈이 커졌다. 심호흡으로 감정을 가라앉힌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 노괴와 있었던 일을 모조리 설명해라. 하나도 빠짐없이.”
눈빛이 매서웠다. 자이파와 연관되어 뭔가 있기는 한 것 같았다. 못 해줄 건 없었지만 아무래도 대로변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런데, 저희 집에서 얘기하죠.”
“고향과는 꽤 거리가 있다 하지 않았나?”
“네. 오늘 이사 왔어요. 누구 때문에 첫날부터 난민이 될 뻔하기는 했는데.”
“흠흠.”
나비로제가 헛기침했다. 구름을 갈라 버린 주제에 양심은 있는 모양이었다. 로난은 두 여인을 새로운 집으로 안내했다. 얼떨결에 따라가게 된 아데샨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저, 정말 나도 가도 되는 거야?”
“당연하죠. 선배도 들을 자격 있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이파의 이야기였다.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그들은 삼 분도 걸리지 않아 집에 도착했다. 막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차였다. 앞치마를 두른 이릴이 마중을 나왔다.
“아, 왔구나 로난! 손님을 데리고 왔네?”
“엉. 잠깐 지하실 좀 쓸게. 그 자식들은?”
“아셀은 널 찾겠다며 막 나갔고, 슐리펜 님은 아직 식사 중이야. 불러줄까?”
“···됐어. 많이 먹으라 그래.”
로난이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마 솥단지가 비거나 배가 터져 죽을 때까지 먹을 생각인 것 같았다. 이릴을 본 아데샨이 헛숨을 들이켰다.
“···우와.”
살면서 이토록 아름다운 존재를 본 적이 없었다. 일전에 본 오필리아도 굉장한 미인이었지만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쓸데없이 키만 큰 자신 따위는 벼락 맞은 전나무처럼 볼품없는 존재로 느껴졌다. 갑자기 저릿한 불안감이 고개를 처들었다.
‘···둘이 무슨 관계지?’
아데샨은 로난과 이릴을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가족이라기에는 머리카락 색도 그렇고 외모가 너무 달랐다.
설마.
순간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경우의 수가 그녀의 머릿속에 번득였다. 문득 아데샨의 옷차림을 본 이릴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앗, 저희 동생과 같은 아카데미에 다니시나 봐요!”
“동생···이요?”
“네. 로난의 누나인 이릴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아데샨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안도의 한숨을 너무 크게 내쉰 것을 깨달은 그녀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핫···! 저, 저는 무예과 2학년 아데샨이에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나비로제입니다. 필레온 아카데미 무예과의 상급 교관을 맡고 있습니다.”
아데샨과 마찬가지로 잠시 벙쪄 있던 나비로제도 이릴에게 악수를 건넸다. 교관이라는 말을 들은 이릴이 눈을 빛내며 손을 맞잡았다.
“와, 선생님이었군요! 우리 로난은 어때요? 잘 배우고 있나요?”
“···여러 가지로 괄목할만한 학생이죠.”
나비로제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로난은 마실 건 필요 없다는 언질을 남긴 채 지하실로 향했다.
비상시에 대피처로 사용할 수 있는 지하실에는 각종 보안 설비가 되어 있었다. 두꺼운 철문이 닫히기 무섭게 나비로제가 입을 열었다.
“이제 말해라. 자이파 터르겅과 무슨 일이 있던 거지?”
“그...이게 진짜 어이없이 벌어진 일인데···”
로난은 엊그제부터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네뷸라 클라지에를 추적하다 자이파를 만났다는 것. 와이번을 학살해 가며 폭탄 테러를 막은 것. 자이파와 그 부하들이 누이의 이사를 도와줬다는 사실까지. 나비로제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큰일날 뻔 했군. 설마 놈들이 로마이라를 노리고 있었을 줄이야.”
“네. 빌어먹을 놈들이 갈수록 대담해지고 있어요.”
다시 생각해도 아찔했다. 로마이라 산악도로가 파괴될 경우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세상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겨울의 마녀가 단번에 제국 최악의 범죄자로 등극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고생했다. 교장님께는 내가 별도로 보고하지. 헌데 그 말이 사실이냐?”
“어떤 거요?”
“자이파가 네 이사를 도와줬다는 것 말이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비로제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차고 다니던 칼이 갑자기 말 정도는 걸어 줘야 나올만한 반응이었다.
“네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나 보군. 인간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다니.”
“음, 저를 좋아하는 것 같기는 했어요.”
“미리 경고하지. 자이파와 너무 가까워지지 마라. 그 늙은이는 위험하다.”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에요?”
“그래. 어쩌면 네뷸라 클라지에라는 조직보다 더. 송곳니의 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송곳니의 밤이라는 말에 아데샨이 어깨를 움츠렸다. 나비로제는 그녀의 손을 살짝 쥔 채 말을 이었다.
“당시에 자이파가 죽인 제국군만 천 명이 넘는다. 그래서 그가 황제의 부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모두가 귀를 의심했지.”
“···많이도 죽였네요.”
로난이 턱을 매만졌다. 그 역시 자이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들은 바가 있었다. 북부의 학살자. 원래대로라면 진작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제국의 추격을 받고 있어야 할 인물이었다.
자이파가 이끄는 수인 연합은 변경백령 바르사를 사흘만에 점령했다. 모두가 그들이 제도까지 진격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자이파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선택을 했다. 잠시 기억을 반추하던 나비로제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 고양이는 알고 있던 거다. 끝까지 가면 결국 패배할 것이라는 사실을.”
자이파는 끝까지 맞서 싸우는 대신 이미 점령한 변경백령과 자신의 목을 걸고 협상에 나섰다. 군사를 물리고 부하가 될 테니 북부의 수인들을 내버려 두라는 조건이었다.
그의 능력과 패기를 높게 산 황제는 제안을 승낙했다. 그 결과 북부의 수인들은 자유와 땅을 되찾았고, 황제는 제국에서 가장 날카로운 검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런 뒷배경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로난이 헛웃음 쳤다.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 작자였네요. 싸움만 잘 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더 위험하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나비로제는 자이파가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로난은 그녀의 의견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주시할 대상이 늘었다는 생각에 옅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어째 갈수록 일이 많아지는군.’
자이파는 여타 강자들과 마찬가지로 최후의 전장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불안 요소를 내포한 인물이라면 더욱 주의를 갖고 지켜봐야 할 터였다. 나비로제가 말했다.
“일단 돌아가지. 수업이 예정되어 있으니.”
“그러죠. 동아리 활동 보고서도 작성해야 하니까. 네뷸라 클라지에 관련된 이야기만 빼고 싹 적으면 되겠죠?”
“···바렌 교수님도 가엾군. 네가 알아서 해라.”
대화를 마친 세 사람은 곧장 필레온으로 향했다. 이릴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들을 배웅했다.
“두 분 다 안녕히 가세요! 로난 너도 잘 다녀오고 주말에 봐!”
“신세 졌습니다.”
“다, 다음에 뵈요···!”
나비로제가 짧게 묵례했다. 아데샨 또한 황송하다는 듯이 허리를 숙였다. 어딘가의 성녀라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로난은 이들을 집에 데려오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이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도와줄 사람이 늘어났다는 소리였으니. 나비로제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검기를 발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네. 조촐하게나마.”
“자로딘 그 한심한 놈이 그래도 밥값을 한 모양이군. 왜 진작 찾아오지 않았지.”
“그 전에도 워낙에 일이 많아서···피곤하니까 조금만 자고 갈게요.”
“그렇게 해라. 보아하니 조금만으로는 안 될 것 같군.”
“크, 들켰네요.”
나비로제가 혀를 찼다. 피로에 찌든 로난의 얼굴은 영 봐줄 만한 것이 못 됐다. 문득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린 로난이 질문했다.
“그런데 아침부터 두 분은 뭐 하고 있던 거예요? 주말도 아닌데.”
“아아, 그, 그게···.”
별안간 아데샨이 나비로제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의 속도만 높였다. 애매한 반응을 본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하기 싫으면 안 말해도 돼요.”
“아냐. 그럼 불공평하지. 나도 그런···귀중한 이야기들을 들었는데.”
아데샨은 이번에 처음으로 네뷸라 클라지에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자이파에 대한 모르는 정보도. 로난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댄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근처에 있는 제국군 주둔지에 다녀왔어.”
“주둔지요?거기는 왜?”
“교관님이 그쪽 간부에게 전해줄 물건이 있으니 들어 달라 하셨거든. 결국 못 전해 드렸지만.”
“많이 무거운 거였어요?”
아데샨은 어색하게 웃으며 안주머니에서 편지봉투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아무리 봐도 누가 대신 들어줘야 할 것 같은 물건은 아니었다.
나비로제는 봉투를 누구한테 줘야 하는지 깜빡했다는 이유로 그녀와 함께 주둔지를 두 시간 동안 천천히 돌았다고 했다. 아데샨은 그동안 병사들이 아침 훈련을 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아데샨이 뺨을 긁적이며 되물었다.
“이해했어?”
“네. 확실히요.”
하여튼 좋은 사람이었다. 봉투는 단순히 핑계고 군인이 꿈인 아데샨에게 안목을 쌓게 해 줄 셈이었겠지. 나비로제는 이미 저만치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난이 픽 웃었다.
‘필레온에 오기 잘 했어.’
그들은 머지않아 교문을 넘었다. 두 여인과 갈라진 로난은 곧장 기숙사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검의 제전이 뭔지 물어보는 걸 깜빡했네.’
자이파가 남긴 말이었다. 상당한 궁금증이 들었지만, 지금 가장 급한 것은 검의 제전도, 멍청한 동아리 활동 보고서도 아닌 수면을 취하는 일이었다. 연달아 사건이 터진 덕에 그는 거의 나흘 가까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일 만나서 물어봐야지. 그리 생각하며 문을 열자 책상을 행주로 닦고 있는 루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로난이 말했다.
“안녕 루시.”
“어머. 요즘들어 바쁘시군요. 며칠간 못 뵈었는데 무슨 일이라도···”
“안녕 루시···.”
풀썩. 무너지듯 쓰러진 로난이 바닥에 엎어졌다. 루시의 손에서 행주가 떨어졌다.
“로, 로난 님?!”
황급히 달려온 그녀가 로난의 어깨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천박한 잠꼬대만 중얼거릴 뿐 눈을 뜨지 않았다. 이윽고 코 고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루시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도대체가···.”
건강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루시는 낑낑거리며 로난을 침대에 눕혀 놓았다. 그녀는 커튼을 치고, 이불을 덮어 주고, 양말까지 벗긴 뒤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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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난이 다시 1 투기장에 찾은 것은 이틀이 지난 뒤의 정오였다. 딱히 게으름을 피운 것은 아니었고, 그냥 일어나서 씻고 밥 먹은 다음에 바로 오니 이 시간이 되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한 로난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흐아아암···제기랄, 이러면 키 안 크는데···.”
그래도 푹 자니 몸이 한결 가벼웠다. 곳곳에서 학생들이 대련을 하거나 검술을 연습하고 있었다. 저 멀리 뒷짐을 지고 있는 나비로제의 모습이 보였다. 학생들의 자세를 봐 주던 그녀가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로난. 드디어 왔나.”
“네···오래 기다리셨죠.”
“알긴 아는군. 바로 수업을 시작할 테니 저기 빈 곳에 가서 서라.”
나비로제는 손가락을 뻗어 훈련용 허수아비가 늘어선 구역을 가리켰다. 로난은 그렇게 했다. 기지개를 쭉쭉 켜 가며 노곤한 잠기운을 떨치고 있자니 그녀가 다가왔다.
“먼저 실력을 봐야겠다. 허수아비에게 검기를 봐라.”
“좀 먼데요.”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허수아비와의 거리는 족히 서른 걸음은 되어 보였다.
“못 맞춰도 괜찮으니 쏴 봐라.”
“그렇다면야.”
로난은 정신을 집중하고 검을 휘둘렀다. 쐐액! 기력이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초승달 형상의 검기가 전방으로 쏘아졌다. 그의 예상대로 허수아비에는 닿지 않았다. 아홉 발자국 정도를 날아가고 사라지는 검기를 본 나비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나쁘지 않군.”
“젠장, 이게요? 노친네 오줌발처럼 시원찮은데.”
“가끔 있지. 너처럼 차근차근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놈들이. 너는 유저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소드 익스퍼트 단계에 이른 것이라는 걸 명심해라.”
나비로제는 로난에게 조급해하지 말 것을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마나혈을 막고 있는 저주를 긁어내기 위해서는 하루가 두 배라도 부족했다.
얼른 검기 운용법을 알려 달라고 그녀를 채근하려는 차였다. 불현듯 고분에서 발자크와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스쳤다.
“참.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검기의 형태를 바꿀 수도 있나요?”
“가능하지. 크기 조절 정도는 어느 정도만 숙달돼도 할 수 있다.”
“아뇨, 크기만 변하는 게 아니라 막 물보라처럼···그러니까, 검기 같아 보이지도 않게요.”
“자세히 말해봐라.”
물보라처럼 뿌려진 검기는 일반적인 검기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을 선보였다. 로난은 손짓 발짓을 해가며 발자크가 발현한 검기를 묘사했다. 갑자기 라만차의 검신이 붉게 물들었다는 사실도. 이야기를 들은 나비로제가 눈썹을 으쓱였다.
“흐음. 도론 장인께서 네 무기를 만들 때 상당한 공을 들이셨나 보군.”
“무슨 뜻이에요?”
“검을 이리 줘 봐라.”
어째 묘하게 신이 난 목소리였다.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로난이 라만차를 건넸다.
나비로제가 칼자루를 가볍게 쥐는 순간이었다. 촤아아악! 피처럼 붉은 마나가 칼날을 타고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