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88화 (88/333)

< 88. 여명을 향해 쏴라(1) >

#88

짙푸른 파랑 아래로 새하얀 뭉게구름이 미끄러지듯 흐르고 있었다. 훈련을 마친 로난은 동아리 건물로 돌아갔다.

우연히 시간대가 겹쳤는지 부원 전원이 모여 있었다. 마르야와 브라움은 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팔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으으윽···그아아아아앗!!”

브라움은 저러다가 핏줄이 두피를 찢고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힘을 줬으나 결국은 마르야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콰앙! 그의 몸뚱이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아자!”

“부···분하다!”

승리의 탄성을 지른 마르야가 테이블 위에 쌓여 있던 은화를 쓸어담았다. 불법 도박의 냄새가 풍겼지만 로난은 딱히 제재하지 않았다. 그래야 나중에 낄 자리가 있을 테니까. 아셀은 저 구석 자리에서 슐리펜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 동생도 마법사다.”

“그, 그런가···요?”

“그래. 언젠가는 필레온에 입학하기 위해 연수를 받고 있지. 이건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고향에서 자란 네 식견으로 보았을 때 이릴 양은 도자기와 유리로 된 잔 중에 뭘 더 좋아할 것 같나?”

오필리아는 보나 마나 2층에서 잠을 자고 있을 터였다. 왁자지껄한 광경을 본 로난이 픽 웃었다. 처음 왔을 떄만 해도 폐가나 다름없었는데, 이제는 제법 활기가 도는 것이 썩 나쁘지 않았다.

“나 왔어요. 바렌.”

로난은 종이 한 장만 챙겨서 건물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바렌 파나시르 교수가 있는 필레온 13탑이었다.

문을 열자 정장을 입은 웨어라이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자신의 거구를 완전히 파묻고도 남을 거대한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시타의 부모 되는 꿈새 마르페즈가 그의 무릎에 웅크린 채 자신의 푸르고 풍성한 깃털을 손질하고 있었다. 로난과 눈이 마주친 바렌이 책을 덮으며 인사했다.

“오오, 로난. 간만에 뵙는군요. 제 과제는 잘 하고 계신가요?”

“아뇨. 나는 뭘 기르는데 소질이 없나 봐요. 이걸로 벌써 다섯 개째에요.”

로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난 수업에서 바렌이 내 준 과제는 수많은 환상종의 먹이가 되는 식물인 빵 알로에를 기르는 것이었다.

햇볕과 물만 제때 주면 쑥쑥 자라는 기르기 쉬운 식물이었지만, 로난은 빈번히 화분을 빵 알로에의 관짝으로 만들어 버렸다. 바렌이 갈기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하하,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포기하지 말고 하다 보면 언젠가 성과가 나올 겁니다.”

“으음?”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투에서 묘하게 흥겨움이 묻어나는 것이 평소의 바렌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무고한 생명의 죽음에 슬퍼하며 추모사라도 늘어놨을 터였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티가 나나요?”

“엄청요.”

“허허, 들켰군요. 이걸 한 번 드셔보시겠습니까?”

몸을 일으킨 바렌이 차를 내왔다. 평소와 같은 홍차가 아니었다. 푸른빛을 띠는 액체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향취가 풍겼다. 막 한 모금을 마신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이건···!”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바렌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차에서는 예전에 사란테가 대접해 줬던 것과 같은 맛이 났다. 주변에 떠다니는 마나가 평소보다 선명하게 느껴졌다. 안구에 쌓여 있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설마 재배에 성공한 거예요? 그러기 전까지는 안 먹을 거라고 했었잖아요.”

“그렇습니다. 생각보다는 일찍 성공했어요.”

벌써 세 달 전의 일이었다. 로난은 바이디안 산맥에서 가져온 약초 대부분을 바렌에게 넘겼다. 개중에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종도 제법 있었는데, 바렌은 그것을 곧장 먹는 대신 길러 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창가에 놓여 있는 화분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지맥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도 대단합니다. 시중에 판매되는 약초보다 훨씬 효능이 좋은 것들이 태반이더군요. 어쩌면 포션 업계에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조만간 돈방석에 앉겠네요 바렌. 축하해요.”

“당분간은 연구에만 사용할 생각이지만요. 이것도 가져가시죠.”

바렌은 작은 나무상자 하나를 로난에게 내밀었다. 상자를 열자 가지런히 늘어선 유리병 아홉 개가 눈에 들어왔다. 오묘한 색의 액체가 병 안쪽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이게 뭐죠?”

“처음에 재배를 성공한 약초로 만든 포션입니다.”

“허, 뭐 이런 걸 다 주고 그래요.”

“애초에 로난 학생에게 주려고 준비해 놓은 물건입니다. 요긴하게 사용해 주세요.”

병뚜껑이 사자 머리 모양인 걸 본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문득 극심한 자괴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누구는 멍청한 빵 알로에 하나 제대로 기르지 못해서 똥을 싸고 있을 동안, 이 털북숭이는 학계에 알려지지도 않은 희귀 약초의 재배에 성공한 것으로도 모자라 포션까지 제조한 것이다. 찻잔을 단번에 비운 로난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고마워서 어째. 나도 선물 있어요.”

“이게 뭐죠?”

“동아리 활동 계획서요.”

“허어억!”

하마터면 바렌은 찻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튀긴 찻물에 맞은 마르페즈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바렌이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이번에는 또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어째서···.”

“누가 보면 파병이라도 가겠다는 줄 알겠네. 거기 다 적혀 있으니까 읽어 봐요.”

“아···아아아···.”

바렌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난번에 일방적으로 통보 당한 동아리 활동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었다. 무단 유령마 대여, 와이번 대량 학살과 검성 자이파와의 칼부림. 심호흡한 바렌이 종이를 집어들어 읽기 시작했다.

“···으음? 웬일로 이번에는 정상적이군요.”

“당연하죠. 날 뭘로 보는 거예요.”

“여명 마탑이면 도서관이 유명한 곳이죠. 혼자 가십니까?”

“네. 여러명 끌고 갈 일도 아니라.”

바렌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으쓱였다. 로난은 단순히 외출 시간을 늘리기 위해 동아리 활동서를 제출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찬찬히 계획서를 살피던 바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문제가 될 만한 사항은 없었다.

“좋습니다. 허가하지요. 다음에도 이렇게만 해 주시면 좋겠군요.”

“에이, 결과적으로 보면 지금까지 문제는 없었잖아요. 차 잘 마셨어요.”

로난이 집무실을 떠났다. 그가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던 바렌이 마르페즈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번에야말로 별일 없을 거야. 그렇지 않니?”’

- 피이잇.

후루룩. 바렌이 남아 있는 차를 비웠다. 그의 시선이 우연히 찻잔의 바닥에 닿았다. 약초가 가라앉은 침전물이 해골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지나치게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바렌이 눈을 감은 채 혼잣말했다.

“···부디.”

****

로난은 일정은 길게 잡되 딱히 아무도 데리고 가지 않았다. 고리타분한 자료 조사를 하는데 굳이 동료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는 이유였다.

이틀이 지나 출발일이 되었다. 그는 간단히 짐을 챙겨서 제도 북부에 위치한 하늘부두로 향했다.

여명 마탑까지 가는 그리폰 비공정을 타기 위해서였다. 동아리 활동 계획서에는 말을 타고 갈 것이라 적어 놨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언제나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퓌요오오옷!

-푸히힝!

비행형 교통수단을 운용하는 하늘부두는 드넓은 활주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움닫기를 마친 페가수스들이 마차와 함께 날아오르고 있었다. 비행을 마치고 온 그리폰이 구석에서 고기를 뜯고 있었다.

“살다보니 내가 이런 걸 타는 날이 오는군.”

로난은 자신이 타고 갈 비공정을 보며 중얼거렸다. 로돌란의 죄수 호송 마차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웅장했다. 바퀴를 달아 개조한 소형 선박을 그리폰 여덟 마리가 들어서 나르는 방식이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탑승권의 가격은 유령마를 대여하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로난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값을 지불했다. 필레온 아카데미의 차용증을 받아주지 않을 상인은 적어도 제도에는 없었다.

로난이 비공정에 탑승했다. 내부는 주 고객인 상류층을 겨냥한 듯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크고 둥근 창문을 통해서는 바깥 풍경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모든 좌석은 창문 앞에 자리해 있었다. 고급스러운 소파 두 개가 테이블 하나를 가운데 두고 서로를 마주보는 식이었다. 테이블마다 한 병씩 놓여 있는 포도주를 본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돈이 좋긴 좋아.”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손님이 타 있었다. 복도를 따라 걷던 로난은 마침내 자신의 자리를 발견했다.

맞은편 소파에는 이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고양이를 닮은 검보랏빛 머리의 소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에르제베트?”

“어머, 로난 님?”

창밖을 보고 있던 에르제베트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 또한 적잖게 놀라는 눈치였다. 소파에 앉은 로난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너가 여기 왜 있어? 가출이라도 했냐?”

“가출이라뇨, 무슨 그런 말씀을!”

에르제베트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물론 자신과 마찬가지로 교복 차림인 걸로 봐서 가출일 리는 없을 터였다. 낄낄거리며 담뱃대를 꺼내든 로난이 승무원에게 저지당했다.

“손님. 흡연은 갑판에서 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 갑판에 올라갈 수 있어요?”

로난은 담뱃대를 도로 집어넣었다. 헛기침한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흠흠, 이번에 여명 마탑으로 답사를 가게 됐거든요.”

“답사라고?”

“네. ‘중급 화염 마법’ 수업을 듣는 수강생 중에 우수자들만 뽑아서요. 역대 최고의 화염 마법사들을 배출한 곳이니까.”

그제야 로난은 승객들 중 마법과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제법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족히 열 명은 넘어 보이는 것이 역시나 돈이 많은 아카데미였다. 학생들을 쭉 훑어본 에르제베트가 입을 가리며 쿡쿡거렸다.

“후후, 이 중에서 1학년은 저밖에 없다고요? 다들 한심하기는.”

“대단하네. 염력만 잘 다루는 줄 알았는데.”

“사실 염력은 없다시피 한 수준이죠. 가장 자신 있는 속성은 불이에요.”

에르제베트는 그리 말하며 검지 끝에서 작은 불꽃을 피어 올렸다. 잠시 잊고 있었다. 눈앞의 소녀는 세 가지 속성을 다룰 줄 아는 천재라는 사실을.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비공정이 이륙에 돌입했다. 제복을 입은 승무원들이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이야기했다.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비공정은 도움닫기가 필요 없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이미 지면은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로난이 다리를 꼬며 입을 열었다.

“뭐, 심심한데 잘 됐다. 이야기나 하자.”

“좋아요. 안그래도 저 양떼들하고는 어울리고 싶지 않았거든요.”

에르제베트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의 동녘 끝에 자리한 여명 마탑까지는 비공정을 타고도 열 시간이 넘게 걸렸다. 말동무가 생긴 것은 어찌됐든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너 친구는 있냐? 어째 매번 혼자 있는 거 같다.”

“쓰, 쓸데없는 참견하지 마세요.”

에르제베트는 아픈 곳을 찔린 사람처럼 얼굴을 붉혔다. 로난은 픽 웃으며 테이블에 놓여 있던 포도주를 잔에 따랐다.

꾸준히 상승하던 비공정은 머지않아 구름 위까지 도달했다. 열여섯 쌍의 날개가 퍼덕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창밖이 어두워진지도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 비공정 아래로 검푸른 구름이 융단처럼 깔려 있어서 지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비행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달마저 저문 새벽임에도 로난은 여전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얼큰하게 취한 채 헛소리를 지껄여 대고 있는 에르제베트 탓이었다.

“으히, 아데샨 언니는···정말 완벽하지 않아요? 예쁘고, 멋지고···아으, 결혼하고 싶다.”

“넌 다시는 술 마시지 마라.”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아무리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꼴이 귀여웠어도 포도주를 마시게 해 줘서는 안 됐다. 로난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한 잔도 아니고 한 모금으로 그렇게 되냐. 너 취한 척 하는 거지?”

“히이···맞아요. 아칼루시아의 영애가 고작 이런 걸로 취할 리가 없잖아요···끅! 제가 신기한 거 보여 드릴까요?”

별안간 에르제베트의 몸에서 보랏빛 기운이 올라왔다. 그녀만의 고유한 힘 오러였다. 동시에 불로 이루어진 작은 사자 한 마리가 테이블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사색이 된 로난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젠장, 당장 멈추치 못해.”

이게 그가 잠들 수 없는 이유였다. 잠깐 졸다가 깼는데 비공정이 추락하고 있다면 틀림없이 이 계집애 탓일 터였다. 로난은 에르제베트를 데리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이히히, 시원해. 여기가 어디에요···?”

강풍이 머리카락을 온통 헝클어트리고 있는 와중에도 에르제베트는 깔깔 웃어댔다. 여전히 술에서 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로난은 그녀를 객실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뱃머리 부분으로 데리고 갔다.

“됐으니까 아데샨 얘기나 해 봐. 어쩌다가 그렇게 친해진 거야?”

“그건 얼마든지 얘기해줄 수 있죠···! 히, 어디부터 듣고 싶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아하! 일가견이 있으시네요···!”

로난은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서서 담뱃대를 빼물었다. 이걸로 벌써 다섯 번째 듣는 거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만취한 그녀는 아데샨 이야기를 할 때만 귀신같이 얌전해졌다.

“그러니까요오···제가 입학 초반에 도서관을 가는데에···.”

이윽고 에르제베트의 입술 사이로 흐리멍텅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내용만 놓고 보자면 별 게 없었다. 그냥 친구가 한 명도 없어서 도서관도 못 찾고 있던 자신을 아데샨이 도와줬고, 그때부터 친해졌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요···히히, 그 머리카락 봤어요? 밤하늘로 짜낸 비단 같은···저는 거기에 목이 졸려 죽어도 좋을 것 같아요···.”

다만 아데샨을 예찬하는 부분이 길어서 시간을 제법 오래 끌 수 있었다. 중간마다 질문을 넣어 주면 더욱 효과가 좋았다. 문득 정말로 궁금한 질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데샨한테만 그렇게 잘해주는 이유가 뭐냐? 넌 능력이 없으면 거들떠도 안 보잖아.”

“언니를···다른 양떼들하고 비교하지 마세요. 끅. 언니는 달라요.”

“그러니까 뭐가 다른 거냐니깐.”

“아이 참, 그러니까···”

별안간 에르제베트가 말꼬리를 끌었다. 문득 어깨가 무거워진 것을 느낀 로난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에르제베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이 나지막이 들려오고 있었다. 에르제베트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가만히 어깨만 들썩이고 있었다.

로난은 뒤늦게야 그녀가 잠들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로난은 그리 읊조렸지만, 딱히 에르제베트를 깨우거나 하지는 않았다. 또 일어나서 난리를 치는 꼴을 보는 것 보다는 어깨에 침 좀 묻고 끝내는 편이 나았다.

그 상태를 유지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서서히 뱃머리가 가리키는 쪽의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비공정의 고도가 낮아졌다.

두터운 구름층을 뚫고 나오자 저 멀리 거대한 구조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드높이 솟은 탑 주변으로 원형의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모두 24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원기둥은 차라리 하늘과 땅을 잇는 기둥처럼 보였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로난이 무언가에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여명 마탑.”

마탑의 뒤편으로는 검푸른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대륙의 동쪽 바다인 여명해였다.

머지않아 완만한 호를 그리는 지평선 너머로 붉은 해가 머리를 드러냈다. 쏟아지듯 몰려온 서광이 세상을 주홍색으로 물들였다.

문득 로난은 이 상황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여명해에서 떠오르는 여명을 받는 여명 마탑. 수준 낮은 농담에 혼자서 낄낄대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그리폰들이 요란스레 울어대기 시작했다.

-휘요오오오!

-케엑! 케엑!

“뭐야?”

로난이 미간을 찌푸렸다. 불길하게 느껴질 정도로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그 순간 여명 마탑이 있는 방향에서 붉은 빛무리가 연쇄적으로 점멸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뭐지? 눈을 가늘게 뜬 채 살피던 로난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새나왔다.

“씨발.”

족히 일곱 개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화염구가 비공정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화염이 대기를 불사르는 섬뜩한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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