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여명을 향해 쏴라(5) >
#92
왜 사라졌다는 사람이 여길 돌아다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로난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사박사박. 먼지를 즈려밟는 듯 나지막한 발소리가 그녀를 뒤따랐다.
‘미행에는 영 소질이 없는데.’
때아닌 야밤의 산책이었다. 불규칙하게 솟아난 기둥 형태의 책장들은 원시림의 거목을 연상케 했다.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한기가 서가를 떠돌고 있었다.
‘···유령 들린 숲 같군.’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오늘의 도서관은 어딘지 모르게 으스스했다. 책을 만들기 위해 살해당한 나무들의 원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달빛조차 부패한 주검처럼 어스름한 청빛을 띄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여인을 미행하던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어디까지 가는 거야?’
족히 이십 분은 넘게 걸은 것 같은데도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로난의 전신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조용하게 걷는 데 온 신경을 기울인 탓이었다. 그때 여인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드디어.’
로난은 숨을 죽인 채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우두둑! 갑자기 그녀의 상체가 뒤로 젖혀지며 창백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통수가 허리에 닿아 있는 것을 본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
인간이라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자세였다. 여인의 두 눈동자는 온통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벌어진 입에서 기괴한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아아아···아.”
로난은 재빠르게 기둥 뒤로 숨었다. 심장이 가슴을 찢고 나올 것처럼 뛰고 있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지거리를 삼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녔다.
‘씨팔, 내가 뭘 본 거야?’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에 가까운 몰골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괴한 음성이 끊어졌다. 심호흡한 로난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여인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디 갔지?’
구둣발 소리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로난은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그녀가 서 있던 자리로 다가갔다.
찬찬히 주위를 살폈지만 어디서도 그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먼지만이 남아 음산한 월광 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로난은 온 신경을 집중한 채 사방을 관찰했다. 책이 빈틈없이 꽂혀 있는 원기둥 형태의 책장, 이름 모를 하얀 석재로 이루어진 바닥, 여인이 이곳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극미량의 마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문득 며칠 전에 아이레와 비밀 공간에 들어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책을 뽑는 것으로 비밀문을 열었었다.
혹시 여기도? 로난이 다시 한번 책장을 더듬었다.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춰섰다. [뒷걸음질] 이라는 제목이 적힌 책등 위에는 여인의 마나가 지문처럼 남아 있었다.
‘찾았다.’
로난은 책을 조심스레 뽑아들었다. 예상과는 달리 책장이 뒤로 밀려나거나 바닥이 가라앉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른 책인가? 의아함을 느낀 그가 책장에 손을 대는 순간이었다. 손이 책장을 그대로 통과하며 쑥 들어가 버렸다.
“허?”
로난의 눈이 커졌다. 팔을 이리저리 휘저어 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책장의 실체가 사라지고 껍데기뿐인 환영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상당한 공을 들이셨군.’
굉장히 수준 높은 마법이었다. 안쪽이 텅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한 그가 책장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래로 향하는 좁고 기다란 계단이 눈앞에 드리워 있었다.
‘···뒈지기야 하겠어.’
로난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4층과 3층 사이에 있는 공간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의외로 경계나 방어 마법 같은 것은 갖춰져 있지 않았다. 한참을 내려가던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두워.’
달빛조차 들지 않는 통로에서는 한 점의 빛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난다고 적응할 수 있는 수준의 어둠이 아니었다.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오른 로난이 라만차를 뽑아들었다. 정신을 집중한 지 머지않아 검신을 타고 붉은빛이 올라왔다.
‘이거지.’
횃불을 대신하기에는 부족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이윽고 계단이 사라지며 기다란 복도가 나타났다.
폭은 고작 두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 좁았지만 높이는 거진 4m에 이르는 기묘한 구조였다. 그는 라만차를 치켜든 채 발걸음을 옮겼다. 뚜벅. 뚜벅. 뚜벅. 여인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도대체 뭐 하는 곳이지?’
떠오르는 가설은 많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마법사들의 건물이란 워낙에 비밀을 많이 품고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던 와중 로난의 눈앞에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젠장, 미로 형식인가.’
로난이 혀를 찼다. 가장 귀찮은 유형의 구조물이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별안간 음산한 속삭임이 로난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저주에 걸렸구나.]
“씨발!”
이번에는 참지 못했다. 로난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쐐액! 횡으로 그어진 검격이 어둠 속에 붉은 잔상을 남겼다.
베는 감촉을 느끼지 못한 로난이 재차 검을 겨누었다. 아무도 없었다. 다시금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야. 너를 옭아매고 있는 저주를 풀고 싶지 않으냐?]
“뭐?”
성별을 분간할 수 없는 중성적인 음성이었다. 잘 들어보니 목소리는 귓가가 아닌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저주라는 말을 들은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서 말하고 있는 거야?”
[나를 찾아와라. 그게 무엇이든 간에 네가 원하는 걸 줄 테니. 오른쪽이다.]
목소리가 끊어졌다. 한순간 느꼈던 충격과 공포가 빠르게 분노로 변모하고 있었다.
“···지랄하네, 진짜.”
바닥에 침을 뱉은 로난이 오른쪽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답답한 짓거리도 할 만큼 했다. 도대체 누가 이따위 장난을 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손을 봐줄 생각이었다.
[왼쪽.]
[가운데.]
[그래, 조금만 더 가까이···왼쪽이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아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난은 그가 시키는 대로 방향을 틀었다. 내부가 상당히 복잡한 것이 여인이 여기에 숨었다면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막다른 길이 나타났다.
이제 어디로 가냐? 로난이 짜증스레 질문하려는 차였다. 벽 앞에 세워진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허리 높이까지 오는 목재 단상이었는데, 웬 책 한 권이 그 위에 놓여 있었다.
“저건···?”
베개로 써도 될 만큼 두꺼운 서적이었다. 정체 모를 가죽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표지에서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로난의 얼굴이 굳었다. 줄곧 품어왔던 심증이 확신으로 변했다.
‘금서.’
여기가 바로 아이레가 경고했던 금서 구역이었다. 사악한 도서들이 봉인되어 있다는 금단의 영역. 책을 바라보던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왜 그렇게 조심하라 했는지 알겠군.’
존재만으로 강렬하고 유혹적이었다. 책을 읽는 순간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홀린 듯이 걸어간 로난이 책 앞에 섰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저주를 푸는 일이었다.
‘좋아.’
이윽고 결심한 로난이 표지를 넘겼다. 제목으로 보이는 글귀가 휘갈겨져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문자로 적혀 있어서 읽을 수는 없었다.
‘다른 나라의 문자인가?’
로난은 다음 장을 넘겼다. 아까와 같은 문자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 사이사이 기괴한 형상의 마법진들이 대여섯 개 정도 그려져 있었다.
“이건···?”
그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는 순간이었다. 별안간 글씨와 마법진이 환하게 빛나더니 시커먼 촉수들이 책에서 튀어나왔다.
“윽?!”
[흐하하하, 걸려들었구나!]
촤아악! 촉수들은 순식간에 로난의 몸을 머리만 남기고 휘감아 버렸다. 섬뜩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금 전까지 길을 안내한 것과 같은 목소리였다.
그제야 로난은 지금껏 말을 걸어왔던 존재가 이 책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상황을 파악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금서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게 이런 뜻이었던 것이다.
[이미 늦었다. 저항해도 소용없으니 순순히 이 랑그지움 님의 인형이 되어라!]
“씨발.”
촉수에 휘감긴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주에 대한 집착으로 흐려졌던 판단력이 빠르게 돌아오고 있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듯이 질문했다.
“저주를 풀 수 있다는 건···처음부터 거짓말이었냐?”
[어리석기는, 내게 저주에 관한 이야기 따위는 쓰여 있지도 않다.]
“그래···그렇단 말이지.”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는데 역시나였다. 그 순간 촉수들 위에 붉은 선 수십 가닥이 그어졌다. 촤아악! 보라색 피분수가 선을 따라 솟구쳤다. 토막 난 촉수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당황 섞인 외침이 울려 퍼졌다.
[어, 어떻게?]
“종이쪼가리 주제에 나를 속여?”
로난이 으르렁거렸다. 자유를 되찾은 그의 손에는 붉게 점멸하는 라만차가 쥐어져 있었다. 애초에 촉수 따위는 몸을 휘감기 전에 이미 베어 놓은 뒤였다.
로난은 그대로 책을 향해 검을 내리꽂았다. 푸욱! 검 끝이 낱장 깊숙이 파고듦과 동시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크아아아악!]
“꼴에 통증도 느끼나 보네.”
[해, 해치워라!]
“뭐?”
그가 마무리를 위해 칼을 뽑아드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책이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별안간 사방이 밝아지며 뒤통수가 뜨거워졌다. 로난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화염으로 이루어진 파도가 복도를 가득 메우며 밀려오고 있었다.
“이건 또 뭔···!”
상당한 수준의 마법이었다. 하지만 상대하지 못할 건 없었다. 자세를 다잡은 로난이 수직으로 검을 세웠다. 촤아아악! 불의 파도가 반으로 갈라짐과 동시에 그의 양옆으로 흘러갔다. 벽면을 타고 다시 합쳐진 화염의 급류가 책을 덮쳤다.
[크악! 크아아악!]
불길에 휩싸인 책이 다시금 비명을 토해냈다. 비공정을 향해 날아드는 파이어 볼을 막을 때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신경을 쓴 것이었다.
비명소리가 서서히 잦아들더니 이내 적막이 찾아왔다. 그와 동시에 불길이 멈췄다. 복도 맞은편에 서 있는 여인을 본 로난이 검을 내렸다.
“그렇게 된 거였구만.”
“아···아아아···.”
로난을 향해 뻗은 그녀의 손에서 불꽃의 잔상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커멓게 물들어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원래의 색을 되찾고 있었다.
“아아···.”
신음하던 여인이 바닥에 쓰러졌다. 서둘러 달려간 로난이 그녀를 부축했다.
‘책에게 조종당하고 있었군.’
인형이 어쩌고 했던 걸로 봐서 그와 비슷한 맥락으로 몸을 빼앗긴 것이 분명했다. 아마 다른 실종자들로 이런 식으로 사라졌을 터였다. 고개를 돌리자 완전히 전소해 버린 금서의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병신.”
참으로 멍청한 최후였다. 알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일단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로난이 쓰러진 여인을 들쳐멨다.
“젠장, 정신 차려요.”
“아으···아아···.”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서둘러 치료를 받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미리 길을 기억해두고 있어서 돌아가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가 막 계단을 빠져나오는 순간이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환한 조명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젠장, 뭐야?”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창밖이 어두운 걸로 봐서 아직 개장 시간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웅성임이 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불이라도 났나···?”
소란의 크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그가 막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차였다. 지옥처럼 낮은 목소리가 도서관 전체에 울려 퍼졌다.
【재미있구나.】
로난이 제자리에 멈춰섰다. 형용 못할 소름이 전신을 타고 내달렸다. 가늠할 수 없이 사악하고 강대한 무언가가 그의 뒤에 있었다.
‘무슨···!’
고개를 돌리기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단번에 베어야만 승산이 있었다. 라만차를 뽑아든 로난이 몸을 돌렸다. 퍼석! 사선으로 날아간 칼날이 책장 깊숙이 박혔다.
“헉, 허억···!”
잘려나간 책들이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로난이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금서고로 향하는 입구는 원래의 책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뭐···지?’
사악한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가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업혀 있던 여인이 재차 신음했다.
“아으으···윽.”
“아, 젠장. 미안해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로난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머지않아 아이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허공을 둥둥 떠다니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난이 외쳤다.
“아이레!”
“로난 님! 지금까지 어디 계셨던 거예요? 그분은?”
“실종자예요. 여섯 명 중에 한 명.”
“네에?!”
“어서 데려가요.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아요.”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난은 아이레에게 여인을 넘겨 주었다.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아이레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서, 설명이 필요해요...!"
“나중에 얘기해 줄게요. 아이레. 이상한 목소리 같은 거 못 들었어요?”
“목소리요?”
“네. 개좆같···아니, 엄청나게 낮고 갈라지는. 아무튼 끔찍한 목소리요.”
“그런 건 못 들었는데요···?”
아이레가 고개를 내저었다. 도저히 못 들을 수가 없는 크기였음에도 이러는 걸 보면 이번에도 랑그지움 때처럼 자신만 들은 것 같았다.
우선 지금의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심호흡으로 감정을 추스린 로난이 재차 입을 열었다.
“후···그나저나 무슨 일이에요? 한밤중에 불도 다 켜놓고.”
“비공정 사건의 범인이 잡혔어요.”
“아하, 안 그래도 얼굴 한번 보고 싶었는데 잘 됐네. 뭐 하는 놈이에요?”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잠시 주저하던 아이레가 무겁게 입을 뗐다.
“···그랑시아 가의 삼녀요.”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