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여명을 향해 쏴라(6) >
#93
“···그랑시아 가의 삼녀요.”
“예?”
로난이 미간을 찌푸렸다. 한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랑시아 가의 삼녀라면 슐리펜의 여동생이라는 소리였다.
문득 동아리 건물에서 슐리펜과 아셀이 나누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필레온에 입학하기 위해 연수를 받고 있는 마법사 동생이 있다고 했었다. 연수를 받는 곳이 여명 마탑이었나?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걔가 뭐가 모자란다고 그런 짓을 해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정말로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이라.”
“젠장,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앗, 잠시만요!”
그는 아이레를 뒤로한 채 달려갔다. 웅성거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머지않아 도서관 중앙에 바글바글 모여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이 붉은 로브를 걸친 마법사였다.
“세상에, 시온 양. 어째서 이런 짓을···.”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오. 그랑시아 가에 정식으로 항의해야···어엇!”
“좀 지나갑시다.”
로난은 떠들어 대는 마법사들을 밀치며 앞으로 향했다. 인파의 한가운데는 웬 꼬맹이가 서 있었다. 기껏해야 열 살에서 열한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어린 소녀였다.
빗질이 되어 있지 않은 암청색 머리카락은 부스스하게 일어나 있었다. 실크로 된 펑퍼짐한 잠옷에는 단순화한 곰의 얼굴이 자수 되어 있었다.
“허.”
시온이라는 소녀의 얼굴을 본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아무리 남매라지만 저건 너무 닮아 있었다. 그냥 눈이 좀 똘망똘망하고 머리가 긴 슐리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순순히 자백하십시오, 시온 시니반 데 그랑시아. 신성한 지식의 전당에 방화를 저지르려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계, 계속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자다가 일어났더니 갑자기 도서관에 있었어요···!”
“또 시치미를, 비공정을 격추하려 했던 걸로는 모자랐던 건가!”
“저, 정말···정말인데···!”
하지만 성격은 많이 달라 보였다. 큼지막한 눈동자에 물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녀를 채근하는 마법사들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음?”
그때 익숙한 장미향을 맡은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검보랏빛 머리의 소녀가 자신의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시온을 노려보고 있었다. 로난이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에르제베트.”
“깜짝이야, 로난 님?!”
고개를 돌린 에르제베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습게도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서로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눈이 살짝 부어 있는 것이 그녀 역시 자다가 뛰쳐나온 모양이었다. 로난이 눈썹을 으쓱이며 물었다.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된 거냐? 아는 것 좀 있어?”
“···가증스러운 그랑시아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거죠.”
에르제베트가 혀를 찼다. 그녀는 도끼눈을 뜬 채 말을 이었다. 상황 설명을 들은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저 쥐콩만한 애가 비공정에 파이어 볼을 쐈다고? 방금 전에는 도서관에 불을 지르려 했고?”
“네. 조금 전에 마력 파장을 대조하는 걸 직접 봤어요.”
기가 막혀서 말도 잘 안 나왔다. 일이 터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삼십 분 전이었다. 잠옷 차림의 시온이 도서관에 화염 마법을 사용하려는 것을 수위가 발견해서 저지했다.
당연히 난리가 났고,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든 마법사들이 그녀의 마나와 비공정 사건 당시 검측된 마나를 대조했다고 한다.
결과는 놀랍게도 일치. 현행범으로 체포된 시온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두 가지의 범행을 모두 부정하고 있었다. 에르제베트가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돌아가는 즉시 가주님께 보고드려야겠어요. 이건 명백한 암살 미수에요.”
“저 애가 너를 노리고 쏜 거라 생각하는 거야?”
“그것 말고는 딱히 이유가 없잖아요. 저런 아이까지 알력다툼에 끌어들이다니, 정말이지 추악하기 짝이 없군요···.”
노기로 들끓는 목소리가 살벌했다. 당연히 그렇게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그랑시아와 아칼루시아는 앙숙 관계였고, 지금보다 관계가 좋지 않았던 과거에는 서로에게 암살자를 보내는 일도 허다했으니까.
‘일이 커지는군.’
자칫하면 대륙 전체를 뒤흔들 문제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그 와중에도 마법사들의 추궁은 이어지고 있었다. 지속적인 압박을 받던 시온이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흐아아앙! 진짜 제가 한 게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운다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잖소. 제대로 경위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더욱 영애에게 불리해질 뿐이오!”
그럼에도 마법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시온의 말 따위는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
로난은 조금 전에 금서고에서 벌어진 일을 떠올렸다. 시온은 아무리 봐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그가 인파를 가르며 앞으로 나섰다.
“거 적당히들 합시다.”
“다, 당신은 뭐요?”
“애가 아니라잖아요. 댁들은 조금 진정할 필요가 있어요.”
천천히 시온에게 다가간 로난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고개를 숙인 채 훌쩍이던 시온이 그를 올려보았다.
“누, 누구세요···?”
“허, 진짜 닮았네.”
그 재수 없는 놈과 닮았는데 귀엽게 느껴지는 것이 신기할 노릇이었다. 별안간 로난이 양손으로 그녀의 두 귀를 틀어막았다. 시온의 눈이 커졌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놓아 주세요!”
시온이 바동거렸으나 로난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그는 벙쪄 있는 마법사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댁들은 엉뚱한 곳에 똥을 싸지르고 있어요. 지금 잡아 족쳐야 할 것은 이 꼬맹이가 아녜요.”
“가, 갑자기 무슨 소리요?”
“지하에 있는 책들이 사람을 조종하고 있어요. 방금도 내가 뒈질 뻔했고요. 얘도 그 좆같은 종이쪼가리들한테 당했을 가능성이 커요.”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군, 외부인은 빠지시오!”
로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화가 잔뜩 난 마법사들을 설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다시 말을 이으려는 차였다.
“멈추시오.”
별안간 뒤쪽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장에 있던 모든 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운 필라가 복도 저편에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 옆에는 사색이 된 아이레가 공중에 뜬 채 따라오고 있었다.
“타, 탑주님?”
마법사들이 당황하며 물러섰다. 전투에 돌입했을 때나 볼 수 있는 거친 마나가 그의 어깨 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현장을 한번 훑어본 아운 필라가 입을 열었다.
“모두 해산하시오. 시온 양은 죄가 없소.”
“예···?”
“다만 다시 조종당할수도 있으니 4서클 이상의 마법사 두 명이 시온 양의 보호자가 되어 동행해 주시오. 자세한 상황은 곧 소집할 긴급회의에서 설명할 테니, 부디 아무것도 묻지 말고 따라 주시오.”
아운 필라가 재차 지시했다. 전시상황을 방불케 하는 비장한 어조에 마법사들은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흩어져 버렸다. 그가 로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로난, 잠시 동행해 주시겠소? 사서께 간략한 설명은 들었지만···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아운 필라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시온의 귀에서 손을 뗀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잘 됐네요. 나도 물어볼 게 있었거든요.”
****
시온 시니반 데 그랑시아에게는 구금이나 취조가 아닌 보호 조치가 취해졌다. 아운 필라는 도서관에 일시적인 봉쇄 조치를 내렸다.
로난과 아운 필라, 아이레는 곧바로 금서 구역의 입구로 향했다. 줄곧 침음을 흘리던 아운 필라가 입을 열었다.
“···우선 파르테 양을 구해 줘서 감사하오. 정신 침식이 상당히 진행되어 있어서 조금만 더 늦었어도 위험할 뻔했소.”
“다행이네요.”
파르테는 로난이 구한 실종자였다. 무사하다는 말을 들은 로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운 필라가 불안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방금 듣기는 했지만···한번 더 확인해야겠소. 정말로 그녀를 금서 구역에서 발견했소?”
“그렇다니까요. 웬 말하는 책한테 공격까지 당했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혹시 자세한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소?”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금 전에 겪었던 좆같은 사건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잠결에 깨어나 우연히 실종되었다는 여인을 목격한 것. 그녀를 따라 금서 구역에 진입한 것. 머릿속에 말을 걸어오는 책과 그 책에게 조종당하는 여인에게 공격당한 사실까지. 이야기를 들은 아이레가 기가 막힌다는 투로 말했다.
“말도 안 돼요.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보안에 문제가 없는 걸 확인했는데···! 통로를 지나는 중에 방어막이나 경보 마법 같은 걸 보지 못했나요?”
“그런 거 없던데요?”
로난이 어깨를 으쓱였다. 미로처럼 어지럽던 복도는 분명히 뻥 뚫려 있었다. 아이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운 필라가 입술을 비틀었다.
“···큰일이군.”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7서클 마법사조차 긴장시키는 무언가가 금서 구역에 있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그렇게 심각한 일이에요?
“그렇소. 금서 구역에는···나와서는 안 되는 존재가 있소.”
“그 바쥬라인지 뭔지 하는 책이요?”
“바쥬라도 위험하지. 하지만···.”
아운 필라가 말꼬리를 끌었다. 한참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기에 도서관에는 세 사람의 발소리만 울려 퍼졌다. 결국 그들은 침묵을 유지한 채 금서고의 입구에 도착했다.
“말하기 싫으면 나중에 말해요. 일단 들어가죠.”
로난은 주저 없이 책 한 권을 뽑아들었다. 입구를 여는 ‘뒷걸음질’이라는 책이었다. 마치 자기 방문을 여는 듯 경쾌한 동작을 본 아이레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다른 책으로 바꿔야겠네요.”
세 사람은 실체가 사라진 책장 안으로 들어갔다. 긴 계단을 한참 동안 내려간 그들은 이윽고 미로 같은 금서 구역에 다다랐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엥?”
두터운 마나 실드 수십 겹이 통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반투명한 막이 하도 많이 겹쳐져서 복도 너머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경계 마법이 각인된 마법진이 벽면과 천장, 바닥 위에 골고루 새겨져 있었다. 밟는 순간 큰 소리가 울려 퍼지거나 다른 곳으로 날려버리는 마법이었다. 아이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멀쩡한데요?
“···이럴 리가 없는데?”
로난이 오갔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가 단발성 치매를 앓은 것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방어 마법 따위는 없어야 했다. 그때 아운 필라와 나눴던 대화가 뇌리에 번득였다.
‘설마···?’
비공정 사태 당시 자신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 보이지 않던 파이어 볼이 나타났다고 했다. 광범위하게 펼쳐진 인식 저해 마법. 마나를 자르는 로난의 검격.
불현듯 칼자루를 잡아당긴 로난이 허공에 대고 검을 휘둘렀다. 서걱! 바람을 베는 감촉과 함께 겹겹이 늘어서 있던 마나 실드의 형체가 연기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건···!”
“역시.”
경계 마법진들 또한 서서히 사라졌다. 아무래도 환영 마법의 일종인 것 같았다. 아이레와 아운 필라 두 사람이 모두 눈치채지 못한 것을 보면 여간 강력한 마법이 아니었다.
처음에 들어왔을 때는 앞을 밝히기 위해 라만차를 뽑아드는 순간 마법이 해제된 것 같았다. 아이레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말도 안 돼, 도대체 언제부터···!”
“별로 상황이 좋아 보이지는 않네요.”
아이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어 주문이 풀렸다는 것은 유별나게 위험한 금서들에게 따로 행한 봉인들도 해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였다. 로난이 칼자루를 쥔 채 말을 이었다.
“그때 인식 저해를 걸었던 놈과 같은 놈이 한 짓이겠죠?”
“···그런 것 같아요.”
“다시 발동됐다는 건 아직 이 부근에 시전자가 있다는 소리고요. 빌어먹을.”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분명 주변에 장난을 치고 있는 놈이 있을 터였다. 줄곧 침묵하던 아운 필라가 입을 열었다.
“···내가 모두에게 죄를 지었소.”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예요?”
“금서 구역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존재가 있다고 이야기했었지. 그건 탑주 라르단 님이요.”
로난의 눈이 커졌다. 그가 물어보려 했던 것이 바로 탑주에 관한 이야기였다. 설마 아운 필라가 먼저 말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이레가 당황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탑주라니···그게 무슨 소리죠?”
“그대를 속여서 미안하오 아이레. 탑주께서는 수행을 떠난 것이 아니오.”
“그렇다면···?”
아운 필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부모나 배우자의 임종을 알리는 듯한 참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탑주께서는 작년 겨울에 바쥬라에게 잡아먹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