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두 번째 심장(2) >
#99
“···아?”
백색을 띠는 마나가 칼날을 휘감고 있었다. 반짝반짝. 네뷸라 클라지에의 것과 완전히 동일한 모습에 로난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드디어 내가 죽을 때가 됐나 보군.”
로난이 헛웃음 쳤다. 잠은 비공정에서 충분히 잤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집중을 풀자 검신의 빛이 사그라졌다.
‘그럴 리가 없잖아.’
로난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금 라만차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종양에서 뽑혀 나온 마나가 칼자루를 타고 흘러들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일 초. 이 초. 삼 초를 기다린 로난이 조심스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파아앗! 눈부신 섬전이 망막을 찔렀다.
“씨발.”
시커멓던 검신은 어디 파티 같은 곳에서 조명으로 써도 될 정도로 화려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몇 번을 시도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한참이나 제자리에 서 있던 로난이 발걸음을 돌렸다.
‘좆됐다.’
지금 바쥬라고 지랄이고 알 바가 아니었다. 왜 이따위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야 했다.
로난은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무예과의 본관인 갈레리온 관으로 향했다. 자로딘은 수업이라도 하는 중인지 자리에 없었고, 세크리트의 집무실은 가는 법을 몰랐다.
그래도 전대 검성인 나비로제라면 뭔가 알고 있을 터였다. 끼이익. 제1투기장의 문을 열자 생소한 풍경이 펼쳐졌다.
“다 왔으면 시작하겠다···음?”
대련을 하고 있어야 할 학생들이 무기를 내려놓은 채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학생들의 앞에 선 나비로제는 거대한 이동식 칠판에다가 무언가를 분필로 그리고 있었다.
대포알에 가슴을 관통당한 원숭이 같았는데, 정확히 뭘 그린 건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로난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고개를 까닥였다.
“오랜만이군. 로난. 여명 마탑은 잘 다녀왔나?”
“···방금까지는 잘 다녀온 줄 알고 있었죠.”
로난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비로제의 반응으로 봐서 여명 마탑에서 무슨 일을 저지르고 왔는지는 아직 모르는 듯했다.
모여 앉은 학생 중에는 아데샨도 포함되어 있었다. 로난을 발견한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코어와 오러에 관해 수업하려는 참이었는데 마침 잘 됐군. 어서 앉아라.”
“코어···타이밍 한번 죽이네요.”
터덜터덜 걸어온 로난이 아데샨의 옆에 앉았다. 그림자의 마나를 각성해서 그런지 저번보다 훨씬 안색이 좋아 보였다. 로난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 있는 것을 본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오랜만이야. 표정이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어?”
“난 끝났어요 선배.”
“으응···?”
“나도 그 대머리 숭배자들과 다를 게 없는 머저리가 되어 버렸어요···.”
“대, 대머리?”
영문 모를 소리에 아데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난이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폐를 뱉었다가 다시 삼키는 것처럼 깊은 한숨이었다. 나비로제가 수업을 재개했다.
“좋아. 코어에 대해서는 이미 다들 알고 있겠지만 한번 더 짚고 넘어가지. 로난 네가 대답해 봐라.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그릇에 물을 따르면 어떻게 되겠나?”
“···줄줄 새겠죠?”
“그래. 코어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심장이 바로 그런 거다.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심장이지. 마나를 순환시키는데는 별 문제가 없지만, 그 이상으로 활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데샨은 그녀가 말하는 것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로난은 여기 모인 학생 중 코어를 형성하지 못한 것은 자신과 그녀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비로제는 열심히 그림을 그려 가며 코어에 관해 설명했다. 실전에만 강할 줄 알았는데 이론 수업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결국 코어를 만든다는 것은 심장의 재질을 바꾸는 일이다. 최소한 나무나 도기 수준은 되어야 너희는 비로소 마나를 심장에 축적하고, 그것을 동력원 삼아 활용할 수 있지. 자, 이 기사를 봐라.”
“···기사?”
처참한 그림 실력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로난은 가슴에 대포를 맞은 원숭이의 정체가 코어를 운용하는 기사를 그린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충격에 빠졌다. 나비로제는 원숭이 기사의 몸 곳곳을 짚어가며 코어의 운용법을 설명했다.
“코어를 만드는 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내가 권장하는 것은 훈련을 병행하며 심장을 꾸준히 마나로 자극하는 거다. 가장 기본적이고 부작용이 없는 방식이지.”
요컨대 꾸준한 단련으로 ‘기존’의 심장을 개조하는 것이 코어를 생성하는 기본적인 원리였다. 나비로제는 몇 번씩 코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그것이 오러를 개화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고유한 마나인 오러를 개화하는 방법은, 흡수한 외부의 마나를 코어나 서클에 축적하면서 변화화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머지않아 나비로제가 말을 맺었다.
“노력 없이 주어지는 건 없다. 지푸라기를 한 가닥씩 강철로 바꾼다 생각하며 수련에 정진해라.”
이론을 빠르게 끝낸 그녀는 언제나와 같은 실전 수업에 돌입했다. 로난과 아데샨을 제외한 나머지는 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대련하도록 지시받았다.
아직 코어가 없는 두 사람만이 외진 구석에서 허수아비를 향해 검을 휘둘러야 했다. 나비로제가 말했다.
“너무 불쾌해하지 마라. 너희 둘은 경우가 특별하니까. 큰 그릇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투자한다고 생각해라.”
“알아요. 그런데 교관님, 나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뭐지?”
“혹시 하나의 코어에서 두 가지 마나가 발현될 가능성은 없나요?”
“없다.”
베일 듯이 날카로운 단언이었다. 입술을 짓씹은 로난이 재차 질문했다.
“절대로요? 어떤 일이 있어도?”
“정확히는 여지껏 알려진 바가 없다. 심장이 두 개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지.”
로난이 눈을 감은 채 침음을 흘렸다. 역시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군요. 제기랄···그런데 이건 무슨 일일까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저···코어가 생긴 거 같아요.”
“뭐라?”
나비로제의 눈이 커졌다. 독립한 딸이 임신 소식을 알려도 저렇게 놀랄 것 같지는 않았다. 로난은 대답하는 대신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종양에서 배어나온 마나가 검신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이건···!”
“그런데 또 심장에서 나오는 건 아니란 말이죠. 저는 이제 동물원에 팔려가는 건가요?”
“마나의 성질이 완벽히 달라졌군.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냐.”
“그러니까요. 아, 혹시 반짝거리는 거 보여요?”
“반짝이다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로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네뷸라 클라지에를 구별할 수 있는 섬전은 그의 눈에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로난의 가슴 위에 손을 얹은 나비로제가 흥미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이군. 동력원의 기능을 하는 무언가 심장 옆에 자리를 잡았어.”
“코어일까요? 썩 좋은 계기로 만들어진 건 아니라 솔직히 좀 무섭거든요.”
“보면 알겠지. 잘못될 낌새가 보이면 수습해줄 테니, 한번 휘둘러 봐라.”
나비로제가 턱 끝으로 허수아비를 가리켰다. 혀를 한번 찬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잡았다.
‘그래 젠장. 알고 있었어.’
무모하게 들리는 말이었지만, 그 역시 직접 부딫히는 것만이 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라만차가 한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서걱! 수십 토막이 난 허수아비가 무너져 내렸다.
“빠르다···!”
아데샨이 탄성했다. 경지에 오른 쾌검이었다. 그림자의 마나로 동체시력을 강화한 상태에서도 검로를 쫓아가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로난과 나비로제는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존에 마나를 먹여서 베는 검격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속도였다.
“이렇게 보면 잘 모르겠군. 검기를 한번 발현해 봐라.”
“그럴까요.”
스아아- 로난의 입술 사이로 기묘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검기였다. 그가 정신을 집중하고 검을 휘두르자 초승달 형상의 검기가 검로를 타고 발사되었다.
콰아앙! 직선으로 날아간 검기가 허수아비의 목에 꽂히며 폭발했다. 돌가루와 함께 나비의 분진 같은 섬전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젠장.”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위력이나 사거리 면에서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몸의 이변을 느낀 로난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헉···허어억···뭐야?”
“안색이 안 좋군. 괜찮나?”
“잠깐만요···허억, 뭔가 이상한데···.”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있었다. 평소에 검기를 쏘았을 때보다 배는 더 많은 기력이 소모된 것 같았다. 별안간 다리에 힘이 풀린 로난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확 나빠진 안색을 본 아데샨이 당황하며 외쳤다.
“로, 로난···! 기다려 봐. 물 가져올게.”
아데샨이 사무실로 달려갔다. 검신의 빛이 꺼졌다. 로난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동력원을 다시 기존의 심장으로 바꾸어 보았다. 호흡이 천천히 바로잡히며 다리에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이게 뭐 하는 짓인지···.”
“기존의 코어와는 별도로 운용되는 건가. 흥미롭군.”
나비로제가 흥미롭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로난은 입속말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현재로서는 기존에 저주 걸린 심장과의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되려 더 구렸다.
기존의 심장과 마나통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이래서는 그냥 가용 마나의 총량이 약간 늘어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연회에서나 사용할만한 요란한 걸로. 점진적으로 분노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니미, 그냥 반짝이는 게 끝이야? 더 힘들기만 하고?’
“일단 다른 학생들을 봐 주고 오겠다.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시도해 보고 있도록.”
로난을 관찰하던 나비로제가 등을 돌렸다. 엄연한 수업 시간인지라 그에게만 신경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숨을 고르던 로난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납득할 수 없었다.
‘분명 뭔가 더 있을거야.’
정체모를 동력원은 아마 바쥬라의 영향으로 만들어졌을 터였다. 선하건 악하건 엄청난 힘을 지녔던 존재에서 기인한 코어인데, 고작 이게 끝일 리가 없었다.
로난은 다시 동력원을 바꾸었다. 몸이 무거워짐과 동시에 반짝이는 마나가 검신을 타고 올라왔다.
상급 허수아비 앞으로 이동한 로난이 자세를 잡았다. 폐기된 마공학 기사로 만들어진 상급자용 허수아비는 일반적인 허수아비보다 열 배 정도 더 단단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대부분의 훈련은 슐리펜과의 대련과 체력 단련 위주로 이루어지는 탓에 이걸 두드려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허수아비를 올려본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허수아비가 입고 있는 갑옷에는 그랑시아 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 그랑시아 측에서 지원품으로 받은 모양이었다.
영문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랑시아의 갑옷을 입은 기사. 이윽고 기억을 인양해낸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수 개월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자식을 닮았군. 놀란이었나.’
눈앞의 상급 허수아비는 그랑시아 공작의 호위 기사였던 돌란 콘체스토 경을 꼭 닮아 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첩자였던 그는 한밤중에 기숙사로 잠입해서 로난을 죽이려 들었다. 불현듯 돌란이 싸우던 방식을 떠올린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오러를 발현하는 방식이 특이했지.’
“로난, 이제 괜찮아? 여기 물···.”
수통을 든 아데샨이 뒤쪽에서 다가오고 있었지만 로난은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별생각 없이 다리를 들어 올린 로난이 오른발로 바닥을 찍었다.
‘이렇게 했던가.’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반짝이는 마나의 파장이 퍼져 나갔다. 수통을 들고 오던 아데샨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꺄악!”
“선배?”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넘어지고 있는 아데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황급히 몸을 날린 로난이 그녀와 허공을 날고 있는 수통을 동시에 붙잡았다.
“고, 고마워···.”
“뭐에 걸려 넘어진 거예요?”
“그, 그러게? 뭐지?”
아데샨이 당황 섞인 목소리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평한 돌바닥에 걸려 넘어질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문득 바닥을 훑던 로난의 시선이 아데샨의 다리에 닿았다. 챙그랑. 라만차가 그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로난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새나왔다.
“이런 시발.”
“왜 그래?”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아데샨의 다리에, 정확히는 발목 부근에 머물러 있었다. 별안간 쪼그려 앉은 로난이 그녀의 종아리를 붙잡았다.
“뭐, 뭐 하는 거야?”
“이건···!”
당황한 아데샨이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로난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는 매미라도 된 것처럼 들러붙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가느다란 나무뿌리 같은 것이 그녀의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반짝이는 마나로 이루어진 뿌리는 돌란의 오러와 매우 흡사했다.
‘빌어먹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정황상 자신이 발현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짙어지는 의문으로 머릿속이 새해얘지던 와중이었다.
촤아악! 별안간 두 사람 바로 옆의 공간이 뒤집혔다. 수염을 기른 노신사가 품위 있게 걸어 나왔다.
“오랜만이네. 로난 군.”
“크, 크라티르 님?!”
“자네를 찾고 있었다네. 괜찮다면 함께···음?”
아데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필레온 아카데미의 교장 크라바 크라티르였다.
모두의 이목이 쏠리고 있었으나, 로난은 그러거나 말거나 아데샨의 발목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뒤늦게 두 사람의 행색을 본 크라티르가 미간을 좁혔다.
“···혹시 이 늙은이가 중요한 순간을 방해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