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백수제(6) >
#106
“뒈져라!”
붉은 기운이 아론데일의 몸을 뒤덮었다. 카가각! 수십 획의 참격이 그의 전신을 가로질렀다. 얼린 고기를 베는 듯한 촉감이 로난의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더럽게 단단하네.”
생소한 감각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경도가 몇 배는 올라간 것 같았다. 뼈까지 닿지 못한 칼날이 애꿏은 근육만 헤집어 놓고 있었다.
‘귀찮군. 신체 강화 계열인가.’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하필이면 가장 까다로운 유형의 능력이었다.
마법으로 형성된 방어막 같은 것은 종잇장처럼 베어낼 수 있었지만, 육신 자체를 강화하는 경우는 나름의 공략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베이면서 힘을 모으던 아론데일이 정권을 내질렀다.
“애송이가!”
후우웅! 대포를 연상케 하는 주먹이 로난의 면전으로 날아들었다. 군더더기 없는 일격은 음속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막 참격을 날리던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씨발···!”
피하기에는 늦었다. 로난은 라만차를 배면으로 눕히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뻐억! 직격당한 로난의 몸이 들소에 치인 것처럼 날아갔다.
“크으!”
파앙! 뒤늦은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트윈 헤드 오우거의 주먹도 이처럼 강력하지는 않았다. 그는 땅에 라만차를 박아넣으며 날아가던 몸을 멈춰 세웠다.
“···엿 같은 멧돼지 새끼.”
삼거수라는 직위를 돈으로 산 것 같지는 않았다. 시커먼 검신 가운데 둥그런 금이 가 있었다. 몸에 맞았다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즉사였다.
“커윽.”
별안간 검붉은 핏덩이가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방어는 했지만 아무래도 속을 좀 다친 듯했다.
퉷! 로난은 머금고 있던 피를 그대로 라만차에 뱉었다. 금이 메꿔지며 아지랑이 같은 예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상처를 살피던 아론데일이 분노와 감탄이 반반씩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날카롭군. 정체가 뭐냐.”
“뭐긴 뭐야. 학생이지.”
“웃기지 마라. 일개 학생이 오러를 두른 내 몸에 상처를 냈다고?”
“보다시피.”
건재한 아론데일의 모습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넝마가 된 의복 틈새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대부분 가벼운 부상일 뿐이었다.
유효타라 칭할만한 것은 처음에 검기로 낸 상처뿐이었다. 길고 깊은 자상이 그의 어깻죽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벌어진 피부 안쪽으로 새하얀 뼈가 드러나 있었다.
유일하게 오러를 발현하기 전에 먹인 것이었다. 침음을 흘리던 아론데일의 입에서 한층 낮아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카리볼로에 들어올 생각은 없나? 내 이름을 걸고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지. 황제도 부럽지 않을 부를 누리게 될 거다.”
“내 좆이나 빨아.”
“안타깝군.”
화르륵! 한층 강렬해진 오러가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안그래도 거대한 몸이 부풀어 오르며 거의 웨어울프에 가까운 체격으로 변모했다. 아론데일이 로난을 내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럼, 죽어라.”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기세만 봐서는 네뷸라 클라지에의 지부장들과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았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로난이 칼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켰다. 스아아···기묘한 숨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새나왔다. 붉은 기운이 다시금 라만차의 검신을 타고 차오르기 시작했다.
“빨리 끝내자.”
“그렇게 될 거다.”
아론데일이 다리를 넓게 벌리며 자세를 잡았다. 꼴을 보아하니 발카르의 투사들에게 전승되는 권법이었다.
로난이 미간을 찌푸렸다. 백수제고 지랄이고 다 때려 부수게 생길 판이었다. 몸을 웅크린 아론데일이 막 로난을 향해 도약하려는 순간이었다.
“너를 기억하겠···음?!”
푹! 불현듯 섬뜩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창 같은 것이 살을 꿰뚫을 때 나는 소리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아론데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
말뚝만한 전갈의 독침이 어깻죽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유일하게 오러에 뒤덮여있지 않던, 로난의 검기에 직격당한 그 자리였다.
보랏빛 독액이 꿀렁이며 상처 안쪽으로 주입되고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론데일이 비명을 터트리며 독침을 뿌리쳤다.
“크하아악!”
아론데일은 황급히 몸을 뺐지만 이미 많은 양의 독이 몸으로 스며든 뒤였다. 상체를 뒤덮은 오러가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숨을 몰아쉬던 그의 입에서 양동이로 퍼올린 듯한 핏물이 터져 나왔다.
“커헉!”
“이게 왜···.”
로난은 독침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길고 두꺼운 꼬리는 아론데일과 충돌하며 벌어진 쇠창살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어느새 깨어난 만티코어가 아론데일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르르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원래 황색을 띠어야 할 만티코어의 눈동자는 탁한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설마.’
로난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데샨이 엎드린 채 손을 뻗어 만티코어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만티코어에게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로난.”
“아데샨.”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아데샨은 분명 만티코어를 조종하고 있었다. 아직 수면 가스의 여파가 남아 있는지 눈꺼풀이 계속해서 감기고 있었다.
“······어서.”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동시에 만티코어가 벌렁 드러누웠다. 재차 코 고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거거거걱!”
아무래도 그림자의 마나로 잠을 깨웠던 것 같았다. 쓰러진 아데샨을 바라보던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비록 한순간에 불과해도 만티코어를 조종하다니, 말이 안 되는 발전 속도였다. 그때 고통에 신음하던 아론데일이 로난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아악! 크아아!”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아론데일의 얼굴에서 아까의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지옥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만티코어의 독을 저만큼 주입 당하고도 죽지 않은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그의 몸은 끔찍한 몰골로 변해 있었다. 독침을 맞은 자리가 시퍼렇게 부풀어 있었다. 온몸의 혈관이 피부를 찢고 나올 것처럼 울룩불룩하게 팽창해 있었다.
주체할 수 없이 흘러넘치는 오러가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로난은 그가 남아있는 생명력을 불사르며 덤벼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로난이 요격하듯 검기를 쏘았다.
“산송장 새끼가!”
콰앙! 거대한 검기가 아론데일의 몸에 직격했다. 동시에 뛰쳐나간 로난이 재차 수십 획의 검격을 날렸다. 하지만 오러로 강화된 아론데일의 육신은 대부분의 공격을 튕겨냈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다···!”
아론데일은 미친 원숭이처럼 날뛰며 사방에 주먹질을 해댔다. 콰앙! 짧게 도약한 아론데일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폭발한 흙먼지가 천장까지 솟구쳤다.
“젠장, 다 죽어가는 게.”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대로 방치만 해도 알아서 죽을 터였지만 그렇다고 계속 날뛰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죽여야 했다. 하지만 오러로 강화된 육신을 베어낼 방법이 없었다. 순간 로난의 머릿속에 한 줄기의 섬광이 번득였다.
‘그 기술이라면.’
될지는 모르지만 시도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로난은 바쥬라로 만들어진 코어로 동력원을 전환했다. 붉은빛을 띠던 라만차의 검신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흐아악!”
불현듯 아론데일이 수직으로 도약했다. 콰직! 붉게 달아오른 육신이 천장을 찢으며 날아갔다. 뻥 뚫린 구멍 너머로 별빛이 쏟아졌다. 이윽고 멀어졌던 아론데일의 기척이 빠르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기회는 한 번.’
두 번째 심장이 빠르게 맥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로난은 허리를 숙이며 발도 자세를 취했다. 동시에 금빛 잔상이 로난의 오른팔을 감쌌다. 미약하게 번득이는 잔상은 바렌의 것을 꼭 닮은, 맹수의 앞발과도 같은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크으으으으···!”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감각에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생전 경험하지 못한 괴력이 부풀어 오른 팔 속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당신 진짜 대단한데···바렌.”
“크아아악! 죽어라!!”
그때 저 하늘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몸을 오러로 휘감은 아론데일이 양 주먹을 앞세운 채 로난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붉은 꼬리가 뒤따르는 것이 꼭 유성을 보는 것 같았다.
“와라.”
피할 수 없었다. 피할 마음도 없었다. 아론데일과의 거리가 한 걸음 정도로 좁혀지는 순간이었다. 로난의 팔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섬전과도 같은 검격이 아론데일의 얼굴 깊숙이 파고들었다. 괴력으로 휘둘러진 검은 멈추지 않고 나아가며 유려한 반원을 그렸다. 아론데일의 눈이 커졌다.
“허어억···!”
“밀렵꾼에게 어울리는 죽음이지?”
로난이 픽 웃었다. 서걱. 아론데일의 몸에 새하얀 선이 그어졌다. 정수리부터 고간까지 이어진 직선은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로난과 충돌하려는 찰나였다. 촤아아악! 몸뚱어리가 세로로 양단되며 피와 내장이 쏟아졌다. 쾅! 쾅! 길게 절단된 반신이 로난의 양쪽 발치로 떨어지며 튕겨 나갔다.
“헉···! 허어어억···!”
로난이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팔을 휘감고 있던 금빛 기운이 사라지며 격통이 찾아왔다. 무리해서 힘을 끌어 쓴 대가였다. 가만히 숨을 고르던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성공했다.”
미약하기는 했지만 어찌됐든 성공은 성공이었다. 방금 자신의 팔을 휘감았던 것은 틀림없는 바렌의 오러였다. 완전히 비어버린 코어에서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로난이 다시 동력원을 전환했다. 뒤늦게 아데샨의 존재를 깨달은 그가 몸을 돌렸다.
“젠장, 선배.”
그녀는 아론데일의 피를 뒤집어쓴 채 엎드려 있었다. 비틀거리며 다가간 로난이 그녀를 안아서 일으켰다. 다행히도 곤히 잠들어 있을 뿐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신세를 졌군.”
만티코어의 기습이 아니었다면 일이 많이 틀어졌을 것이다. 질 가능성이 훨씬 컸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긴다 하더라도 천막을 다 박살 내고 나서야 결착이 났을 터였다.
부드럽게 미소지은 로난이 아데샨의 볼에 묻어 있던 피를 닦아 주었다. 문득 이곳에 왔던 이유가 뇌리를 스쳤다.
‘···도플갱어는?’
로난이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누워 있는 도플갱어가 눈에 들어왔다. 아데샨을 부드럽게 눕힌 로난이 바렌의 형상을 취한 도플갱어에게 다가갔다.
“얌마, 일어나.”
-크으···크으으···.
로난은 왼손으로 도플갱어의 목에 칼을 겨눈 채 오른손으로 따귀를 때렸다. 신음하던 도플갱어가 눈을 떴다. 로난과 마주친 그가 갈기를 곤두세우며 버둥거렸다.
-허어억! 로난?!
“진짜 바렌 같네. 개수작 부리지 말고 같이 가자.”
로난은 라만차를 깊게 들이밀었다. 머지않아 도플갱어의 몸이 거품처럼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다시금 자신으로 변한 도플갱어의 모습에, 로난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역시···그때의 나군.’
도플갱어는 전생의 자신과 완벽하게 닮아 있었다. 정확히는 아하유테를 잡았던, 최후의 전장에서의 자신의 모습이었다. 로난의 시선이 몸 곳곳에 들러붙어 있는 그림자로 향했다.
‘이건 저주들인가.’
심상세계에서 본 저주와 동일한 형태였다. 그림자의 형상을 취한 저주들은 도플갱어의 몸을 착실하게 갉아먹고 있었다. 그때 가만히 로난을 응시하던 도플갱어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어.
“···나도 알아.”
로난이 쓴웃음을 지었다. 왜 아하유테가 나오지 않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가 진정 증오하고 있던 것은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자기 자신이었다. 한심한 짓거리로 시간과 재능을 낭비하던.
도플갱어는 기력이 다했는지 더는 도망치려 들지 않았다. 한참이나 침묵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열심히 하고 있잖아.”
“여, 여기 누가 있으십니까?!”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천장에 난 구멍을 통해 착지했다. 소란을 듣고 온 바렌 파나시르였다. 로난에게서 받은 쪽지가 그의 왼손에 쥐어져 있었다.
“밀렵꾼이라니 도대체 이게···허어억!”
참상을 목도한 바렌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피와 내장이 사방에 흩뿌려져 있었다. 반 토막 난 시체가 발밑에 나뒹굴고 있었다.
“도, 도대체 무슨 일이···!”
지옥을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백수제에 나갈 동물들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바렌이 주위를 둘러보던 와중이었다. 낯익은 소년이 지옥의 한복판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문제는 똑같은 얼굴을 한 청년이 그의 아래 깔려 있다는 점이었다. 바렌이 당혹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로, 로난? 다른 한 명은···.”
“조금 늦었네요 바렌.”
도플갱어를 누르고 있던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우리, 이제 축제 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