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15화 (115/333)

< 115. 피는 모래를 적시고(6) >

#115

로난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뒷짐을 지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서 와라.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

일행이 얼어붙었다. 이웃에게 인사를 건네듯 다정한 목소리였다. 로난이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그들을 제외하고 딱히 말을 걸만한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미친 자식. 이걸 알아차렸다고?’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터무니없는 실력이었다. 긴 거리는 둘째 치더라도 저만한 마력의 집합체를 눈앞에 두고 인기척을 감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로난과 슐리펜의 탐지 능력은 다인하르 마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 때문에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호흡한 로난이 성난 폭풍을 돌아보며 말했다.

“안내해줘서 고맙다. 빨리 가.”

“하, 하지만···.”

“이 등신아. 약속을 지킨다면서?”

“···알았다. 간다.”

성난 폭풍이 뒷걸음치며 물러났다. 로난은 그가 입구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재차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료를 먼저 피신시키다니, 제법 의리가 있구나.”

“닥쳐. 잡아간 사람들은 어디 갔어?”

“성급하기는. 적어도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자꾸나. 아직 남아 있는 한 명도 같이.”

슐리펜이 미간을 좁혔다. 기습은 이미 글러 먹은 듯했다. 눈빛을 한번 교환한 소년들이 발걸음을 옮겼다. 사내는 그들이 다섯 발자국 이내로 들어오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반갑구나. 기운으로만 보다가 실제로 만나니 감회가 새로운걸. 이렇게 어릴 줄이야.”

“좆까.”

로난이 중지를 치켜들었다. 상대는 평범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수염을 기르지 않은 얼굴은 농부처럼 순박했고, 키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그는 네뷸라 클라지에 특유의 새하얀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다른 신도들과는 달리 소매 부분에 작은 별이 하나 달려 있었다. 가만히 로난을 지켜보던 그가 흥미롭다는 투로 말했다.

“의외로 바로 공격하지 않는구나.”

“난 병신이 아니니까.”

“영리하군. 그래, 아직 사람들이 살아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지.”

사내가 눈웃음쳤다. 협박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로난은 손이 칼자루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인자한 말투와 대비되는 간악함이었다.

‘역겨운 새끼.’

하지만 간격이 좁혀지자마자 칼을 휘두르지 않은 것은 딱히 인질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저히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죽상을 지은 채 그를 노려보는 슐리펜의 눈빛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문득 슐리펜과 마주친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그랑시아의 소공작이 아니십니까?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이야.”

슐리펜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내는 전혀 예상치 못한 행운을 목도한 사람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다시 로난에게 시선을 돌린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일단 좀 걷자꾸나.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별안간 사내가 걸음을 내디뎠다. 로난과 슐리펜이 그의 뒤를 따랐다. 불현듯 로난의 머릿속에서 의문 하나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를 알고 있다.’

사내는 슐리펜의 존재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정체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가 세 명 중에서 완벽하게 식별해낸 것은 로난뿐이었다. 기운으로만 봐왔다는 말 또한 마음에 걸렸다. 사내를 따라 걷던 로난이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날 어떻게 아는 거지?”

“개인적으로 조사를 좀 했단다. 나는 네게 관심이 많거든.”

“관심? 좆같은 호모 새끼였나?”

“그런 의미가 아니란다. 브리기아 양과 시릴라를 알고 있겠지? 참, 에두온과 아덴의 피바람도 있군.”

로난의 눈이 커졌다. 전부 그가 죽이거나 로돌란에 처넣은 네뷸라 클라지에의 신도들이었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전부 내 사람들이었단다. 하나같이 맡은 작전에 실패하면서 영 험한 꼴을 당했지. 처음에는 단순히 운이 나쁜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구나.”

“본론을 말해.”

“나는 사건이 벌어진 현장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마나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단다. 미약하지만 개성이 강해서 도저히 헷갈릴 수가 없는 흔적이었지. 그래, 네 마나란다.”

사내의 설명이 이어졌다. 요컨대 자기 부하들의 실패 원인을 조사하다가 로난의 마나를 발견했고, 그걸 조사하다 보니 알게 되었다는 소리였다.

“내가 여기 온 것도 진작 눈치채고 있었겠군.”

“물론이지. 네가 다인하르에 들어서기 전부터 알고 있었단다.”

사내는 로난의 마나라면 수 킬로미터가 떨어진 곳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고 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제지하지 않았지?”

“애초에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시는군. 너 말고도 내 엉덩이를 뒤쫓는 병신들이 더 있냐?”

“전혀. 교단은 네게 신경을 쓸 만큼 한가하지 않단다. 얼마 전 회의에서도 이야기를 꺼내 봤지만 교주님께 꾸중이나 듣고 끝났지.”

사내가 입맛을 다셨다. 그는 로난에 대한 뒷조사는 자신의 취미 같은 일이라고 설명했다. 아무리 봐도 호모가 맞는 것 같았지만, 로난은 그것과는 별개로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

오늘 이 자식만 죽이면 귀찮은 일이 확 줄어든다는 소리였다. 물론 그게 가능할 거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지만. 사내는 여전히 일말의 빈틈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브리기아를 부하로 둘 만 하군. 도대체 정체가 뭐야?’

그들은 계속해서 걸었다. 세 개의 발소리가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백색으로 뒤덮인 공간은 봐도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드워프조차도 이토록 금속을 유려하게 다루지는 못할 것 같았다. 아득히 높은 천장에서 빛나고 있는 광원 또한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불의 광채도, 마나가 모여 만들어낸 빛도 아니었다. 불현듯 사내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 알고 있니?”

“몰라.”

“아주 오래된 유적이란다.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될 비밀을 품고 있는.”

“비밀이라고?”

“그래.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교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비밀이겠지. 마석을 챙기고 이곳을 파괴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란다.”

영문 모를 소리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비릿한 피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원주민들을 데려온 것도 그걸 알고 싶어서였단다. 어차피 전부 날려 버릴 건데, 유적의 비밀 정도는 알아내고 부숴도 상관없을 테니까. 이래뵈도 내가 꽤나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거든.”

“아까부터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헌데, 도통 협조를 안 해주더구나.”

그때 사내가 멈춰섰다. 넓고 깊은 계단이 그들의 눈앞에 드리워 있었다. 혈향이 더욱 자욱해진 것이 느껴졌다. 계단 아래를 내려다본 로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전장의 시체 구덩이를 연상케 하는 풍경이었다. 족히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원주민이 떼죽음을 당해 있었다. 계단을 타고 흘러내린 검붉은 핏물이 맨 아래 고여 있었다.

붉은 저수지처럼 변한 계단의 끝에는 웬 낮고 넓은 직육면체 하나가 솟아 있었다. 복잡하게 생긴 쇠붙이들과 각기 색이 다른 버튼 열 개가 직육면체의 윗면에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한숨을 내쉰 사내가 고개를 내저었다.

“저걸 어떻게 만지면 될 것 같은데···다들 손도 안 대려 하더구나. 죽어도 못한다는 공약을 설마 전원이 지킬 줄은 몰랐어.”

생존자는 보이지 않았다. 정황상 비밀을 밝히는 것을 거부하다가 전부 살해당한 듯했다. 시체들 중에는 여자나 노인은 물론 아직 열 살도 안 되었을 것 같은 코흘리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체들을 둘러보던 사내가 픽 웃었다.

“뭐, 미개한 족속이긴 해도 근성 하나는 마음에 들더구나. 이걸 꼭 보여주고 싶었단다.”

“이 개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거의 동시에 슐리펜의 검이 뽑혀 나왔다.

인지가 불가능한 속도로 날아간 참격들이 사내를 향해 쏘아졌다.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의 입이 나지막이 벌어졌다.

“···광풍이 있을지니.”

파아아앙! 그 순간 로난과 슐리펜의 몸이 뒤쪽으로 튕겨 나갔다. 투포환처럼 날아가던 로난이 육각 기둥 중 하나에 충돌했다. 쾅! 금속으로 된 타일이 뒤집히며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실내를 밝히던 조명이 한순간 꺼졌다가 켜졌다.

“커헉!”

숨이 턱 막혔다. 척추가 모조리 부러졌다 해도 믿어질 충격이었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걸쭉한 핏물이 터져 나왔다. 기둥을 타고 미끄러진 로난이 바닥에 쓰러졌다.

“크으으으···!”

로난은 라만차를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자 코피가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튕겨난 충격만으로 코가 부러진 것을 눈치챈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이건···익숙한데.”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감각이었다. 우둑. 부러진 코뼈를 바로잡은 그가 사내를 노려보았다.

반투명하면서도 거대한 날개 한 쌍이 사내의 등에 자라나 있었다. 깃털로 뒤덮여 있는 날개는 틀림없이 과거에 본 기억이 있었다.

서서히 희미해지던 날개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로난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숙적의 이름을 읊조렸다.

“아하유테.”

틀림없다. 그 자식과 똑같이 생겨먹은 날개였다. 로난은 머지않아 날개의 질감이 별의 가호와 같은 기괴한 마나로 이루어진 것을 알아챘다. 로난을 향해 돌아선 사내가 빙긋 미소지었다.

“소개가 늦었군. 네뷸라 클라지에 남부 교구 주교, 테라닐이다.”

“주교···씨발.”

로난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어쩐지 좆나게 세다 싶었다. 저 이교도들의 조직 체계 따위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20위권에 들어갈 강자인 건 분명해 보였다.

“좆같은 새끼···이럴 거면 뭣 하러 주절주절 떠들어댄 거야?”

“저승길 선물이지···그리고 방금 확신했단다.”

테라닐이라 자신을 소개한 사내가 헛웃음을 쳤다. 기존에 없던 자상 두 개가 그의 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하나는 손등부터 팔꿈치까지, 하나는 허벅지부터 정강이까지. 칼날이 지나간 부분의 옷감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광풍이 완전히 발동되기 직전 로난과 슐리펜이 남긴 상처였다. 여유롭던 테라닐의 얼굴이 한순간 사납게 굳어졌다.

“너희는 여기서 죽어야 해.”

“해보던가.”

쾅! 로난이 땅을 박차며 달려나갔다. 동시에 저 먼 곳의 기둥에 처박혀 있던 슐리펜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쏴! 쉴 틈을 주면 안 돼!”

로난이 외쳤다. 날개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별의 가호와 같은 원리라면 연속해서 발동은 힘들 터였다. 양손으로 칼자루를 움켜잡은 슐리펜이 검을 휘둘렀다.

“흐읍!”

푸르스름한 검신이 호를 그렸다. 거대한 반달 형상의 검기가 테라닐을 향해 쏘아졌다. 직경이 최소 5m에 이르는 거대한 검기는 폭풍의 기운을 머금은 채 요동치고 있었다.

“허, 그런 것까지 아느냐?”

테라닐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과연 그는 날개를 꺼내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와 검기의 간격이 다섯 걸음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다. 쿵! 별안간 그의 눈앞에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착지했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엉?”

콰아아앙! 슐리펜의 검기가 그림자에 충돌했다. 하지만 폭발만 일어날 뿐 회오리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때 자욱한 연기 너머로 작살처럼 생긴 쇠붙이 수십 개가 로난과 슐리펜을 향해 쏘아졌다.

“니미···!”

카가각! 황급히 칼을 들어올린 두 사람이 쇠붙이들을 쳐냈다. 불똥이 튀길 때마다 잘린 쇠붙이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로난은 그것이 원주민들의 몸에 박혀 있던 것과 같은 물건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스아아아···이윽고 연기가 가라앉았다. 거대한 고슴도치의 모습을 본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뭐야 씨발.”

“그르륵.”

어지간한 물소보다 덩치가 좋은 고슴도치였다. 몸통은 온통 새빨간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등에서는 로난이 쳐낸 것과 동일한 쇠붙이 수천 개가 절그럭거리고 있었다. 여러모로 생물보다는 필레온의 마공학 기사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흐음? 그걸 다 막았어?”

유일하게 가시가 돋아 있지 않은 고슴도치의 머리 위에는 웬 사람 하나가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품이 굉장히 넓은 옷을 입은 데다가 기다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신원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때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베일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하아···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테라닐 주교.”

“뭐가 말인가, 유리아 지부장.”

“저한테는 그런 지루한 임무를 맡겨 놓고, 이런 재밌는 자리는 혼자서 즐기시다니.”

여인의 목소리였다. 일렁이는 장막이 그녀와 소년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익히 보아온 별의 가호였다.

‘훨씬 크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브리기아나 와이번에 타 있던 늙은이가 사용한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는 점이었다. 반구형으로 펼쳐진 별의 가호는 그녀와 고슴도치는 물론 테라닐까지 감싸고 있었다. 그녀의 투정을 들은 테라닐이 인자하게 웃었다.

“허허, 노여워하지 말게. 지금부터라도 같이 즐기면 되지. 남아 있는 원주민은 없던가?”

“씨가 말랐어요. 적당히 즐겼어야 하는데···뭐, 혹시라도 찾으면 두 아이가 데려올 거예요.”

아무래도 비밀을 풀어줄 원주민을 잡아오는 것이 그녀의 임무인 듯했다. 그녀는 이미 상황이 마무리된 것처럼 테라닐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긴장의 끈이 완전히 풀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별의 가호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이번에 잡아야 해.’

기회는 지금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찰나 로난과 슐리펜이 시선을 교환했다. 삼 초를 세고 뛰쳐나간 로난이 검을 휘둘렀다. 쐐액! 초승달 형상의 검기가 라만차의 검로를 따라 쏘아졌다.

“어라?”

붉은 검기는 그대로 유리아라 불린 여인을 향해 날아갔다. 고개를 돌린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맞다, 너희는 이거 모르지.”

“슐리펜!”

그러거나 말거나 로난이 외쳤다. 대기하고 있던 슐리펜이 검을 휘둘렀다. 파직! 그 순간 별의 가호와 로난의 검기가 충돌하며 동시에 소멸했다. 바로 뒤에서 날아오던 슐리펜의 검기가 괴물의 가슴팍에 직격했다.

-콰직!

“에?”

유리아의 눈이 커졌다. 테라닐이 뭐라 외치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콰아아아! 거대한 회오리가 두 사람의 형체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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