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피는 모래를 적시고(9) >
#118
툭. 유리아의 머리가 떨어졌다. 한 박자 늦게 쓰러진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비로소 절단면으로부터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뭔···시발···.”
로난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유리아는 아직도 눈을 희번득하게 뜨고 있었다. 주인의 죽음을 감지한 표범이 슐리펜에게 달려들었다.
“크허어엉!”
슐리펜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검로를 따라 불어온 바람이 표범의 목덜미를 스치며 지나갔다. 캉! 금속으로 뒤덮인 목에 하얀 선이 생기며 머리가 떨어졌다.
“크륵?”
쿵. 경직된 표범의 몸뚱이가 옆으로 넘어갔다. 주위가 잠잠해진 것을 확인한 슐리펜이 검을 내렸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그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윽.”
“얌마, 너 괜찮냐?”
로난이 비틀거리며 슐리펜에게 다가갔다. 술을 진탕 마신 다음 날처럼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테라닐의 오러를 베끼는 데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마나가 소모되었다.
“후우우···.”
슐리펜은 대답하지 않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불안정한 숨소리가 새나오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한 것이 영 상태가 나빠 보였다. 문득 그의 검에 시선이 닿은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이건···!”
검신이 보이지 않았다. 피로 얼룩진 칼자루만이 슐리펜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때 나지막한 바람 소리와 함께 사라졌던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아아아···.
꼭 고드름이 빠르게 자라나는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소용돌이치며 모여든 기류가 푸르스름한 칼날로 변모했다. 검신에서 피어오르는 마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고 있었다.
‘차분해. 하지만 더 날카로워졌다.’
기존의 마나가 마구잡이로 몰아치는 센바람이었다면 지금은 잔잔한 바다 위를 달리는 순풍을 연상케 했다. 언제든지 대양을 휩쓰는 태풍으로 발전할 여지가 있는 그런. 로난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허.”
예상을 아득하게 벗어나는 성장 속도였다. 아무리 제국의 샛별이라도 벌써 이 경지까지 도달할 줄은 몰랐다. 오러 각성이었다.
“괴물 같은 새끼···.”
오러란 개인의 고유한 마나와 거기에서 비롯된 능력이다. 꾸준히 오러를 연마한 사람들은 어느 순간 능력의 급진적인 성장을 이루는데, 이를 오러 각성이라 칭했다.
대부분은 기존 오러의 범위나 위력이 증대되는 것에 그치지만, 간혹 번데기가 나비로 우화하는 수준의 터무니없는 변화를 겪는 이들이 있었다. 원래는 정전기나 일으키던 놈이 눈에서 벼락을 쏜다던가, 피부 경화가 주특기였던 놈이 몸에서 다이아몬드를 자라게 한다든가···
그 대표적인 예가 슐리펜이었다. 검을 바람의 형태로 해체하여 휘두르는 것. 이것이야말로 로난이 알고 있는 폭풍검의 본모습이자 대륙제일검 슐리펜의 상징이었다.
타인에게 일절 관심이 없던 전생의 로난이 진심으로 부러워하던 기술이기도 했다. 저것만 있었어도 하늘을 나는 거인들을 모조리 찢어 죽일 수 있었을 테니까.
‘제기랄, 다시 봐도 배아프네.’
폭풍검은 말 그대로 무궁무진한 운용이 가능했다. 한 곳에 바람을 압축하면 방금과 같은 일격필살의 비기가 되었고, 넓게 퍼트리면 군대와도 겨룰 수 있는 전략 병기가 되었다. 로난은 아직도 겨울의 마녀 한 명을 잡겠답시고 로마이라 산맥 전체를 폭풍으로 뒤덮던 슐리펜의 광기를 기억하고 있다.
전생의 위력에 비하면 아직 미약해 보였지만, 일단 각성의 경지에 발을 들인 이상 발전은 시간문제였다. 로난이 쓰러져 있는 슐리펜에게 포션을 내밀었다.
“받아라. 재수 없는 놈아.”
“······로난.”
“대단하던데. 뭐가 어떻게 된 거냐?”
“그게 무슨 뜻이지.”
“너 각성했어 인마.”
슐리펜의 눈이 커졌다. 아무래도 자신이 각성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것 같았다. 말없이 포션을 받아든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가. 이런 감각이군.”
“에잇, 누구는 오러 개화도 못하고 있는데. 비결 좀 알려줘 봐.”
로난이 툴툴거렸다. 어깨의 상처에 포션을 바르던 슐리펜이 입을 열었다.
“···바람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
“그래. 난폭하면서도 아주 부드러운···열한 살 이후 처음 들은 것이었지. 그걸 듣는 순간 저 여자를 벨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열한 살이라면 슐리펜이 오러를 개화한 나이였다. 그는 별의 가호가 사라지는 순간 유리아를 베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그게 전부다. 정말로 되더군.”
“미친놈 아냐 이거.”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애초에 정상적인 설명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래서 내가 천재가 싫어. 그리 읊조린 로난이 픽 웃었다.
“뭐, 잡았으면 됐지.”
로난이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 잘 된 일이었다. 옅게 웃은 슐리펜이 그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포션을 마셔서 그런지 안색이 여실하게 나아져 있었다.
“로난. 궁금한 게 있다.”
“엉?”
“그 방어막을 어떻게 뚫은 건가.”
그는 갖은 수를 썼음에도 결국 별의 가호를 파훼하지 못했다. 검성의 경지에 이르렀던 전생과 마찬가지로. 잠시 고민하던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몰라. 그냥 되더라.”
“···그런가.”
슐리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 못마땅해하는 눈치였지만 모르는 걸 안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분하겠지.’
미세하게 떨려오는 슐리펜의 목소리에는 억분함이 묻어났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휘청이는 와중에도 검푸른 눈동자는 투지로 타오르고 있었다. 로난이 말했다.
“그래도 뭐, 계속하다 보면 되지 않겠냐.”
해주와 더불어 풀어내야 할 또 하나의 과제였다. 다른 이들이 별의 가호를 파훼할 수 있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정 안되면 혼자 다 때려잡을 만큼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기지개를 켠 로난이 몸을 돌렸다.
“···끝났군.”
어찌됐던 전투는 끝났다. 전생한 이후로 가장 격렬하고 위험한 싸움이었다. 긴장이 풀리고 나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썩 운치 있는 풍경은 아니었다. 핏자국과 부러진 쇠붙이가 곰팡이처럼 산재해 있었다. 대리석으로 빚어낸 것처럼 매끈하던 유적은 전쟁을 세 번 정도 겪은 듯한 폐허로 변해 있었다.
“좆같은 새끼들.”
뻥! 갑자기 성질이 난 로난이 유리아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머리가 다인하르 마석 앞에 나동그라졌다. 로난이 마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저 지랄이 난 걸까?”
“···모르겠다.”
슐리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지간한 농가보다 거대한 마석은 여전히 사방에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과할 정도로 흘러나오는 마나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때 한 사람의 얼굴이 로난의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제자리에 멈춰선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썅.”
“로난?”
성난 돌풍이 보이지 않았다. 격전을 치르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슐리펜을 뿌리친 로난이 돌풍이 쓰러졌던 자리로 달려갔다. 우연히 계단을 내려다본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계단 아래쪽의 공간은 여전히 원주민들의 피와 시체로 메워져 있었다. 유적의 비밀을 품고 있다는 직육면체가 시체들 사이에 우뚝 솟아나 있었다. 성난 돌풍은 바로 그 직육면체 위에 엎어져 있었다.
“젠장, 돌풍!”
로난이 외쳤다. 그는 족히 삼백 칸은 넘어 보이는 계단을 단 세 번에 걸쳐서 뛰어 내려갔다. 쾅! 쾅! 쾅! 순식간에 돌풍에게 도달한 로난이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빌어먹을. 정신 차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열 개의 버튼 위로 붉은 손자국이 덕지덕지 남아 있었다. 정황상 돌풍이 조작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크···으으으···.”
다행히도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로난은 가지고 온 포션을 모조리 돌풍의 몸에 들이부었다. 치이익···! 외상이 빠르게 아물었으나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무래도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모양이었다.
“죽지 마.”
순간 사란테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유적을 지키던 늙은 엘프는 끝내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멍청한 돌멩이로 변해 버렸다.
두 번씩 그딴 일을 겪을 수는 없었다. 계단 위쪽을 올려본 로난이 있는 힘껏 소리쳤다.
“시타!!!”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정확히 삼 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새카만 그림자 하나가 계단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로난을 발견한 시타가 날개를 접으며 강하했다.
“뺘앗!”
“이쪽이야, 빨리!”
로난이 죽어가는 돌풍을 부축하며 외쳤다. 로난의 어깨 위에 착지한 시타가 곧바로 치유의 마법을 시전했다.
파아아···붉은 빛무리가 돌풍의 몸을 감쌌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다시 몸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로난이 뒤틀린 팔다리를 바로잡고 박혀 있던 쇠붙이를 뽑아내자 돌풍의 안색은 빠르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손가락을 움찔거리던 그가 눈을 떴다.
“···로난?”
“제기랄, 정신이 들어?”
“괴물···그 이상한 놈들은···?”
“나랑 얘가 다 죽였어. 그것도 존나 확실하게.”
로난이 슐리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돌풍의 눈이 커졌다. 로난은 방금까지 벌어졌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테라닐과 유리아가 이곳에 찾아온 목적과 강함, 그들의 비참한 최후까지. 이야기를 들은 성난 돌풍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하···대단하다. 너희는 진정한 전사다.”
“얌마, 상처 벌어지니까 웃지 마. 저건 네가 한 거야?”
로난이 턱 끝으로 계단 위를 가리켰다. 마석으로부터 쏘아진 빛줄기들이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성난 돌풍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 규율 어겼다. 너희 위험해 보여서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규율?”
“모든 부족민 이거 다루는 법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다루지 않는다. 오직 약속의 날에만 손댈 수 있다.”
역시 돌풍이 한 짓이었다. 그는 직육면체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성난 돌풍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부터. 아무튼 엄청나게 오랜 옛날부터 이 장치를 조작하는 법을 전승받아 왔다고 했다.
언제나 목숨을 걸고 지키되 결코 마음대로 만져서는 안 되며, 조작이 허용되는 것은 약속의 날 뿐이라고 말했다.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약속의 날이 뭔데?”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이 오면 저절로 알 수 있을 거라 했다.”
“기가 막히는군.”
로난이 헛웃음쳤다. 고작 그런 막연한 약속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성난 돌풍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규율을 어겼으니까 죽으면 영원히 빨간 물에서 헤엄쳐야 한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넌 죄 없어 인마. 용암에 던져야 하는 건 그따위 저주를 퍼부은 작자들이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나 이제 다 나은 것 같다.”
“낫기는 지랄. 얌전히 누워 있어. 혹시 모를 생존자는 나랑 이 자식이···”
로난이 뭐라 말하려는 찰나였다. 쿠구구구궁! 별안간 공간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들었던 인위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안 시스템 활성화까지 앞으로 3분 남았습니다. 시스템 활성화 시, 식별 코드가 없는 모든 대상을 추방한 이후 본 작업에 들어갑니다.]
“어엉?”
영문 모를 헛소리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에도 생경한 단어가 너무 많았다.
“보안 시스템에 식별 코드···저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느낌이 좋지 않군.”
“대충 3분 지나면 쫓아낸다는 것 같은데···빌어먹을.”
뭘 어떻게 추방시킬지는 모르겠지만 느낌이 왔다. 진동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마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도 슬슬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농도가 짙어지고 있었다. 무언가 일이 벌어질 것은 분명해 보였다. 몸을 일으킨 로난이 슐리펜과 시타를 돌아보며 말했다.
“서두르자 얘들아. 아무래도 좆된 것 같으니까.”
3분. 마석 하나쯤 챙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아무래도 영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했다. 칼을 뽑아든 로난이 막 뛰어가려는 차였다. 별안간 성난 돌풍이 그의 손목을 덥썩 붙잡았다.
“기다려라. 은인 이대로 못 보낸다.”
“뭐야?”
“어차피 나 죽어서 빨간 물 들어가는 거 확정이다. 내가 시간 늘려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