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비명을 찾아서(3) >
#126
“선배?”
로난의 눈이 커졌다. 마차에서 내린 것은 단텔 남작의 싹수없는 아들놈이 아니었다. 긴 머리칼을 한번 쓸어넘긴 여인이 표독스레 쏘아붙였다.
“선배라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데샨이 그곳에 서 있었다. 다만 얼굴만 같을 뿐 자신이 아는 아데샨과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났다.
몸에 걸쳐진 멍청하리만치 고급스러운 정장이라든가, 평소의 사근사근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오만한 태도라든가. 짙은 속눈썹 사이로 엇비치는 눈동자에는 차디찬 경멸이 묻어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벙쪄 있던 로난이 간신히 입을 뗐다.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하, 감히 거지 따위가 내게 함부로 말을 걸다니.”
아데샨이 코웃음 쳤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가 다짜고짜 로난의 뺨을 후려쳤다. 철썩! 화끈한 통증과 함께 얼굴이 옆으로 젖혀졌다.
“네가 정녕 죽고 싶은 것이더냐?”
“···허.”
기가 막혀서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터진 입술에서 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별안간 마차 안쪽에서 경악 어린 외침이 들려왔다.
“서, 선배님···?!”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부산스러운 소리와 함께 마차에서 네 명이 더 내렸다. 이번에도 다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면면을 본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이건 너무하잖아.”
마차에서 내린 것은 특급 모험 동아리의 부원들이었다. 아셀과 마르야, 오필리아와 슐리펜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건달이나 입을 법한 껄렁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전생에서 자신이 썰어 버린 밀렵꾼들이 입고 있던 옷이었다. 아셀이 당황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로, 로난···괜찮아?”
“아니.”
로난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아무리 저주라고 해도 이건 도를 넘었다. 창백하게 질린 아셀이 뒷걸음질쳤다.
“히이익! 지, 진정해···!”
“닥쳐. 이 가짜들아. 너네는 뭔데 내 친구들 흉내를 내고 있어?”
“로난. 우리는 가짜 같은 게 아니야.”
마르야가 아셀을 거들었다. 아데샨은 로난의 뺨을 후려치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내내 씩씩거리고 있었다. 짝! 손뼉을 쳐서 이목을 끈 마르야가 아데샨을 향해 외쳤다.
“선배님. 이제 그만 정신 차려요!”
“주제넘는 소리 마라! 천한 밀렵꾼들 주제에 맞먹으려 드는 거냐!”
“지나치게 몰입했어···.”
상황을 지켜보던 오필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슐리펜도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데샨과는 달리 나머지 네 사람의 성격은 딱히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잽싸게 몸을 날린 마르야가 아데샨을 뒤에서 붙잡았다.
“세크리트 교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너무 몰입하시면 안 돼요.”
“놔라, 이게 뭐 하는 짓이냐!”
“귀염둥이, 빨리 해.”
아데샨이 있는 힘껏 버둥거렸지만 마르야의 완력을 벗어나는 것은 무리였다. 주춤거리며 다가간 아셀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뭐라 뭐라 속삭였다.
음율로 보아하니 어떤 주문의 영창으로 추정되었다. 갑자기 아데샨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아데샨은 머리를 쥐어싸맨 채 고통 어린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일 분 정도가 지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독기에 차 있던 눈매가 부드럽게 누그러져 있었다.
“여, 여긴···?”
“로난의 심상 세계에요. 기억 안 나요?”
“내, 내가 또 정신을 잃었어?”
마르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리번거리던 아데샨의 시선이 로난에게 닿았다. 지저분한 뺨에는 손자국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 로난! 이걸 어쩌면 좋아···!”
반응을 보아하니 정황을 파악해낸 듯했다. 비틀거리며 다가온 아데샨이 로난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일그러진 그녀의 입술 틈새로 물기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됐어요.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그, 그게···.”
로난이 물었다. 그녀의 말투는 자신이 익히 아는 아데샨으로 돌아와 있었다. 고개를 푹 떨군 그녀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갑자기 마차에서 떨어졌던 마부가 몸을 일으켰다.
“으윽···내, 내가 왜···.”
얼굴을 전부 가리고 있던 모자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뒤였다. 마부의 얼굴을 본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익숙한 면상이었다.
“시발.”
“···로난?”
로난과 마주친 브라움이 입매를 뒤틀었다. 붉은 피가 그의 이마에서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로난이 던진 돌멩이에 직격당한 탓이었다.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 있는 발목이 눈에 띄었다. 마차에서 떨어지며 입은 부상인 듯했다. 가만히 서 있던 오필리아가 브라움에게 다가갔다.
“브라움···괜찮아?”
“크으으···버틸만 하오. 나도 과몰입을 한 모양이군.”
“조심해. 여기서 다치면···현실에서도 다친다고 했잖아.”
“뭐?”
로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옆에 있던 마르야의 양어깨를 움켜쥐며 물었다.
“저게 무슨 개소리야? 현실에서도 다친다니?”
“···말 그대로야. 그래도 돌아가면 고칠 수 있으니까.”
“이 미친 새끼들아.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
부원들을 둘러보던 로난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당장 칼부림이라도 부릴 기세였다. 어깨 위로 번져 나오는 살기에 구경꾼들이 몸을 움츠렸다.
“당장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내가···설명해 줄게.”
그때 아데샨이 앞으로 나섰다. 풀이 한껏 죽은 모습이 보기 안쓰러웠다. 가까스로 윽박을 삼킨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번 말해 봐요.”
“우리는 널 도우려고 왔어. 바깥에서는 벌써 세 달이 지난 거 알아?”
“···지금 농담하는 거죠?”
“정말이야. 너는 세파라치오에 계속 잠들어 있어. 세크리트 교수님은 심상 세계에서의 시간은 다르게 흐를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
로난의 얼굴이 굳었다. 저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상 세계에 진입한지는 기껏해야 몇 시간 밖에 안 지났을 텐데 세 달이라니.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우린 다같이 세크리트 교수님을 찾아갔어. 뭐 도울 방법이 없냐 물었지. 안된다고 하는 걸 삼일 밤낮으로 졸라댔고, 결국 여기에 들여보내 주셨어.”
“그딴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진실이다.”
슐리펜이 거들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설명이 이어졌다. 로난이 해주에 진입한지 보름째 되는 날, 세크리트는 타인을 심상 세계에 진입시키는 마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세크리트는 아직 온전하지 않은 마법이라며 만류했지만 부원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방금의 아데샨이나 브라움처럼 정체성 혼란을 겪을 수 있는 것, 심상에서 입은 상처가 현실의 몸에 그대로 남는 것이 대표적인 주의사항이었다.
단순한 임무임에도 여러 명을 보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한 명이 맛이 가면 다른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게 해 줘야 하니까. 주머니를 뒤적이던 아데샨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래도 너를 빨리 찾아서 다행이야. 자, 받아.”
“이게 뭔데요?”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작고 납작한 육면체였다. 유리판 안쪽에서 붉은 바늘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저주의 근원을 찾아내는 나침반. 세크리트 교수님이 마법으로 만드신 거야. 사실 이걸 전달해 주려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아데샨은 육면체의 바늘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면 저주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효과였다.
로난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나침반을 받아들었다. 그 순간 쉬지 않고 돌아가던 바늘이 갑자기 멈춰 섰다. 붉고 뾰족한 촉은 로난의 뒤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야?”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소녀가 죽어가는 시타를 끌어안은 채 울고 있었다.
설마. 속삭이듯 중얼거린 로난이 그들의 측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늘이 서서히 돌아가며 다시 소녀와 시타를 가리켰다.
“지랄.”
로난이 헛웃음쳤다. 아데샨의 말이 사실이라면 의미하는 바는 자명했다. 로난의 눈빛이 달라진 것을 느낀 소녀가 시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왜, 왜 그러세요···?”
로난은 대답하는 대신 소녀와 시타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움직일 때마다 회전하는 바늘의 끝은 계속 그 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한 바퀴를 돈 로난이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는 문득 소녀와 시타의 몸 위로 반짝이는 마나가 스멀거리며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비석처럼 굳어 있는 로난에게 부원들이 다가왔다.
“로난. 받아들여야 해.”
“다, 다들 걱정하고 있어···이대로 영원히 못 일어나는 거 아니냐고.”
아셀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예상보다 길어지는 해주 일자에 모두가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로난이 입술을 짓씹었다. 어느샌가 다가온 슐리펜이 검을 내밀었다.
“해야 할 일을 해라.”
로난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검을 받아들었다. 날이 잘 서 있는 것이 제법 괜찮은 검이었다.
슐리펜의 말이 맞았다. 영 내키지 않아도 베어야 했다. 고개를 끄덕인 로난이 소녀와 시타를 돌아보았다.
“···그래. 돌아가야지.”
“믿어 줘서 고마워.”
부원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옅게 한숨을 내쉰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서걱. 반원형의 참격이 아데샨을 제외한 네 사람을 그으며 지나갔다.
“허억···!”
저항할 새는 없었다. 네 개의 머리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촤아악!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피가 로난의 얼굴을 적셨다.
몸 잃은 머리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대로변 위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로난이 재차 검을 휘둘렀다. 검로를 따라 쏘아진 검기는 곧바로 브라움을 향해 날아갔다. 서걱! 발목을 다쳐 움직이지 못하던 브라움의 몸뚱이가 그대로 반 토막이 나며 쓰러졌다. 아데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로, 로난. 지금 무슨···!”
특급 모험 동아리는 전멸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아데샨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묵묵히 납도한 로난이 입을 열었다.
“실망스럽네.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정보를 뱉을 줄 알았는데.”
“다, 다 죽었어···왜···!”
“적당히 해. 이 가짜야. 애초에 날 속일 생각이었으면 저 자식은 데려오지 말았어야지.”
로난은 턱 끝을 치켜들며 슐리펜의 머리를 가리켰다. 앉은 채로 뒷걸음질치던 아데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저 새끼는 재수는 좀 없어도 괜찮은 놈이야. 누나를 지켜야 하는데 올 리가 없잖아.”
고작 세 달의 부재로 맹세를 어길 놈이었으면 부탁하지도 않았다. 로난이 천천히 아데샨에게 다가갔다. 마차까지 몰린 그녀가 겁에 질린 얼굴로 로난을 올려보았다.
“그리고···.”
“커억!”
말꼬리를 끌던 로난이 아데샨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발버둥쳤지만 로난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그는 이마가 닿을 때까지 얼굴을 들이댄 채 으르렁거렸다.
“모두 나랑 약속했단 말이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열심히 하겠다고.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로, 로난···!”
“감히 내 친구들을 모욕해?”
핏기가 사라진 입술 사이로 쇳소리가 새나오고 있었다. 로난은 끝내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버둥거리던 아데샨의 몸이 축 늘어졌다. 몸을 일으킨 로난이 침을 뱉듯 중얼거렸다.
“무엇보다···선배는 너처럼 못생기지 않았어.”
로난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손아귀에 붙들려 있던 사람이 바뀌었다. 아데샨은 어디 가고 느끼하게 생겨먹은 청년 하나가 혀를 쭉 빼문 채 죽어 있었다. 전생에 참살했던 단텔 남작의 아들이었다.
“병신들.”
머리가 잘린 부원들의 몸뚱어리도 당시에 보았던 밀렵꾼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청년을 내팽겨친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그 많던 건물과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길고 넓은 대로만이 남아 시야 너머까지 뻗어 있었다. 어느새 멀쩡해진 시타와 소녀가 로난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니들은 정체가 뭐야?”
로난이 말했다. 둘의 몸에서는 더이상 반짝이는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생글생글 미소짓던 소녀가 로난에게 배꼽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월!”
꼬리를 붕붕 흔들던 시타가 우렁차게 짖었다. 혀를 내밀고 헥헥대는 얼굴이 꼭 웃는 것처럼 보였다. 별안간 로난의 눈앞이 부옇게 변했다.
“멍청한 개새끼.”
원래 죽었어야 할 이들이 죽지 않았다. 예전의 과오를 만회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소매로 눈가를 문질러 닦은 로난이 입을 열었다.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로난이 다시 앞을 바라봤을 때 둘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길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제기랄···.”
로난은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한 게 없는데 전쟁이라도 치르고 온 것처럼 피곤했다.
아무리 가짜라는 것을 알아도 가까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바로 뒤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법이군.”
섬뜩한 소름이 전신을 타고 내달렸다. 다가올 때까지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로난은 칼자루를 잡아당기며 몸을 돌렸다. 소금쟁이를 닮은 거지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서 있었다.
“너는···!”
“올바른 결단을 내릴 정도의 안목은 생긴 모양이구나.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어.”
로난의 눈이 튀어나올듯 커졌다. 소금쟁이의 얼굴은 시커먼 그림자로 변해서 일렁이고 있었다. 일찍이 보았던 아버지의 그림자와 흡사한 모습이었다. 로난은 본능적으로 눈앞의 거지가 저주의 근원임을 알아차렸다.
“정말 많이 자랐어. 필멸자의 성장 속도란 봐도 봐도 감탄스럽기만 하군.”
“죽어라!”
로난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소금쟁이는 목을 비트는 것으로 가볍게 공격을 피했다.
연달아 참격을 남겨 봐도 몸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며 회피를 이어 나갈 뿐이었다. 카각! 그림자로 칼날을 붙잡은 소금쟁이가 입을 열었다.
“진정해라. 네가 베어야 할 건 내가 아니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야?”
“힘을 얻어서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려 주지. 다만, 그 전에 네가 보아야 할 게 있다.”
영문 모를 소리였다. 로난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폭발하듯 몸을 확장한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서 나갈 무렵에는 정해야 할 거다.”
“······!”
뇌를 핥는 듯한 섬뜩함에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육신이 액체의 형태로 융해되고 있는 것 같았다. 오감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청각마저 아득한 어둠 속으로 녹아내리려는 순간이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흑(黑)과 백(白)을 말이다.”
그림자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멀어지던 로난의 의식이 마침내 끊어졌다. 완전히 녹아버린 몸이 어딘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
“허어어억!”
로난은 튀어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사라졌던 오감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이질감을 느낀 그가 빠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긴···.”
수수한 방이었다. 자로딘의 집무실도 이거보다는 나을 지경이었다. 회백색 석재로 이루어진 공간에는 침대와 책상, 의자를 제외한 어떤 가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문득 시야가 훨씬 높아진 것을 눈치챈 로난이 손발로 시선을 돌렸다. 하얀 소매 바깥으로 빠져나와 있는 큼직한 손바닥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로난은 비틀거리며 책상 앞으로 향했다. 낡아빠진 나무로 만든 상판 위에는 양피지 몇 장과 깃털 펜, 자그마한 팬턴트 하나가 놓여 있었다. 펜턴트를 집어든 로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돌을 깎아 만든 투박한 팬턴트는 칠각성 형태를 띄고 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주교인 테라닐의 소매에 붙어 있던 뱃지와 같은 모양이었다. 불현듯 세크리트가 과거에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버지의 기억.’
그는 저주를 걸 당시 아버지의 기억이 흘러들어왔을수도 있다고 설명했었다. 실제로 이전에 해주할 당시에도 로난은 아버지의 기억을 기반으로 생성된 님버튼을 돌아다녔다.
그렇다면 지금 이것도? 로난이 갖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똑똑- 짧은 노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새하얀 로브를 입은 여인이 고개를 숙인 채 들어왔다. 어깨너비와 비슷하게 뻗어 있는 길고 뾰족한 귀가 그녀의 종족을 증명하고 있었다.
“구원자여. 괜찮으십니까?”
“···뭐?”
“비명을 듣고 왔습니다. 악몽이라도 꾸신 건지요.”
처음 보는 여인이었다. 다만 그녀가 입고 있는 로브만큼은 눈에 익었다. 재질이 조금 구린 것 외에는 네뷸라 클라지에의 신도들이 입던 것과 동일했다. 로난이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던 차였다. 멋대로 입술이 벙긋거리며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니. 괜찮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무슨 말을 덧붙이려 해봐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몸도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꼭 영혼이 몸뚱이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엘프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루비를 박아넣은 것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싱긋 웃어 보인 그녀가 문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가시지요. 오늘도 죄 없는 이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