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37화 (137/333)

< 137. 봄이여 오라(2) >

#137

최소한 세 가지 이상의 초식이 겹쳐셔 새겨져 있었다. 몇 번 본 것이 고작이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창시자인 구원자의 검술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어?’

로난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치명상을 입은 채 불구덩이로 추락하던 구원자의 모습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리 읊조린 로난이 보다 면밀하게 검흔을 살피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의 미간이 옅게 좁혀졌다.

‘···거칠어.’

검로 자체는 구원자의 것과 일치했으나 드러나는 인상이 확연하게 달랐다. 겉모습만 같고 내포되어 있는 의도에서 차이가 난다고 해야 할까. 도저히 같은 인물이 행한 것이라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살의를 담아 휘두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지.’

칼잡이의 유형은 다양하다. 자신이 본 구원자는 분명 선의로 검을 휘두르는 작자였다. 무언가를 구하거나 지키기 위해서만 검을 휘두르는.

그런 놈들이 낸 칼자국에서는 살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차라리 벤 행위에 대한 미안함이 느껴진다면 모를까. 정말 드문 경우였기에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헌데 얼음에 새겨진 검흔은 정반대였다. 선 하나하나에서 상대를 기필고 죽이고야 말겠다는 살의가 풀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나마 자이파의 검이 가장 비슷했는데,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용의자는 금세 좁혀졌다. 애초에 이 검술을 재현할 줄 아는 사람은 둘 뿐이었다.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백발과 자신을 꼭 닮은 노을빛 눈동자가 잔상처럼 눈앞을 아른거렸다.

‘···그 자식이군.’

구원자를 배신했던 로브쟁이의 검이 딱 이랬었다. 로난은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서늘한 칼날이 목뼈를 자르며 지나가던 감촉이 아직도 선명했다.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대놓고 베낀 검술은 구원자에 대한 도발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무슨 의도로 이런 검흔을 새겨 놓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일부러 베지 않았어.’

검흔은 폭만 좁을 뿐 굉장히 깊숙하게 파고들어 있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얼음 기둥 따위는 산산이 조각내 버리고 마녀를 끄집어낼 수 있었을 터였다.

‘원하는 게 뭐냐.’

추가적인 의문이 속속들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로난이 재차 칼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몸이 저릿거릴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 등 뒤에서 덮쳐왔다.

“...뭐야?”

목의 솜털을 단번에 잡아뽑는 것 같았다. 로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텅 빈 복도에는 시커먼 암흑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다만 자신만 그 기운을 느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바, 방금 뭐였지?”

“젠장, 흉악수가 풀려난 거 아냐?”

몇몇 이들은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아셀과 에르제베트는 새하얗게 질린 채 대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보랏빛 마나가 에르제베트의 오른손에 맺힌 채 일렁이고 있었다. 바짝 긴장한 그녀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아셀 님. 느꼈죠.”

“으, 으응.”

아셀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시선 역시 복도 저편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쿠구궁···새부리 가면을 뒤집어 쓴 심문관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허억···카,카라카! 오셨습니다···헉, 이타르간드 님입니다!”

순식간에 일행의 앞까지 도달한 심문관이 헉헉거리며 말했다. 카라카가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 예상보다 빨리 오셨군요. 동행자가 있나요?”

“혼자 오셨습니다···헉,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면서···.”

“그나마 다행이군요.”

카라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청을 가다듬은 그가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 아무래도 예를 갖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흐르는 불 이타르간드께서 행차하셨다는군요.”

“이타르간드가? 그, 그게 오늘이었나요?”

에르제베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군중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타르간드가 누군데 이 난리에요?”

“나바르도제 님의 일족입니다. 이번 사태를 마무리 짓기 위해 아드렌에서 파견되셨죠. 이거 의외군요, 저는 틀림없이 이타르간드 님을 뵙기 위해 오늘 오신 줄 알았습니다.”

“제가 겨울잠을 좀 오래 자서요. 그나저나 나바르도제의 일족이면 용이라는 소린데···.”

불현듯 부둣가에서 봤던 거대한 배가 머릿속을 스쳤다. 도대체 어떤 배짱 있는 놈이 황제의 기함에 버금가는 배를 타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 이타르 뭐시기 하는 용이 타고 있던 모양이었다.

‘전생에는 들어본 적 없는 드래곤인데.’

생소한 이름에 로난이 턱을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 슐리펜이 황제와 나바르도제 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다시금 커져갈 무렵이었다. 대문이 있는 복도 저편에서 굉음이 작렬했다.

-콰아아아앙!

자리에 있던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하품하다 혀를 깨문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뭐야?”

환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육중한 문짝이 활짝 열린 채 삐걱이고 있었다. 먼젓번에 달려온 심문관이 경악하듯 외쳤다.

“이, 이타르간드 님!”

웬 청년 한명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성적인 느낌을 주는 미남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온 백금발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체격은 평범했으나 옷차림이 굉장히 화려했다. 견장 달린 제복 위는 사자 가죽을 통째로 사용하여 만들어진 코트가 걸쳐져 있었다. 얼음 기둥에서 불어오는 삭풍이 팔을 끼우지 않은 코트를 펄럭이고 있었다.

얼음 정령도 욕지거리를 퍼부을 추위 속에서도 청년은 태연했다. 로난은 본능적으로 그가 이타르간드라는 것을 눈치챘다. 존재만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기세는 어디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어린 놈이군.’

다만 이타르간드에게서는 앳된 티가 물씬 풍겼다. 본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직 뿔도 제대로 안 났을 것 같았다.

물론 레드 드래곤이니 강함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나바르도제가 이번 겨울 마녀 사태나 황제 중 하나를 우습게 여기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주테카를 쭉 훑어본 이타르간드가 언짢다는 듯이 한 마디를 뱉었다.

“자리를 비워달라 했을 텐데.”

공간을 울리는 목소리에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건조한 음성에는 드래곤 특유의 오만하고 고압적인 태도가 과할 정도로 묻어나 있었다. 심문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게 예상보다 빨리 오신지라···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금방 정리하겠습니다!”

“됐다. 비켜라.”

이타르간드가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군중에게 시선을 맞춘 그가 검지를 살짝 위로 굽혔다. 우웅! 머뭇거리던 사람들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모, 몸이···!”

“이건 또 무슨 개짓거리야?”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을 쥐고 있었다.

다만 아셀의 인비저블 핸드처럼 상냥하지 않았다. 신이 나서 개구리를 움켜쥐는 아이처럼 힘 조절이 무신경했다. 붙들린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했다.

“아윽!”

“아, 아파···!”

개중에는 아셀과 에르제베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로난의 얼굴이 급격하게 구겨졌다.

“이런 쥐톨만한 도마뱀 새끼가.”

로난은 칼을 한 바퀴 돌려서 자신의 속박을 끊어냈다. 동시에 두 사람을 향해 검기를 쏘았다.

서걱! 자그마한 검기 두 개가 그들을 묶고 있던 염력을 잘라냈다. 로난이 높게 도약했다. 그는 추락하는 아셀과 에르제베트의 허리를 양팔로 휘감으며 붙잡았다.

“흐약?!”

“로난 님···!”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로난이 바닥에 사뿐하게 착지하는 순간이었다. 이타르간드가 책장을 넘기듯이 검지를 옆으로 밀었다. 쿠당탕! 속수무책으로 날아간 사람들이 복도 한구석에 나동그라졌다.

“끄아아악!”

“저, 저리 비켜!”

퇴비 더미처럼 겹쳐진 사람들은 서로를 깔고 깔아뭉개며 버둥거렸다. 재수 없게 바닥에 피부가 붙은 사람들이 처절한 비명을 토해냈다.

“흐아아악! 떼, 떼어 줘!”

그러거나 말거나 이타르간드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마녀의 주변이 깔끔해진 것을 확인한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정확히 다섯 걸음을 내디디는 차였다.

“이봐.”

무언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타르간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와 시선을 맞춘 로난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용이면 좆대로 굴어도 되는 줄 아냐?”

“···너는 뭐지?”

“알 거 없고, 당장 저 자식들한테 사과해.”

로난이 엄지를 들어 아셀과 에르제베트를 가리켰다. 너무 놀라 다리에 힘이 풀린 아셀이 휘청거렸다. 염력으로 넘어진 사람들을 들어 올리던 에르제베트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로, 로난 님···!”

“허.”

카라카가 헛웃음을 쳤다. 허둥대며 몸을 일으키던 사람들도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만히 로난을 올려 보던 이타르간드가 입을 열었다.

“네가 누구한테 말을 거는지 알고 있느냐?”

“글쎄다. 겉치레만 신경 쓰는 헤츨링?”

“너 따위는 숨만 내쉬어도 잿가루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실현 가능성이 다분한 협박이었다. 로난은 회답하듯 바닥에 침을 뱉었다. 퉷! 줄곧 건조하던 이타르간드의 미간에 아주 옅은 주름이 잡혔다.

“네놈···.”

이타르간드의 어깨 위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로난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상하게 질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좌중의 분위기는 최악이라는 개념을 실시간으로 갱신해 나가고 있었다.

“허허, 두 분 다 진정하시지요.”

둘 중 하나가 불을 뿜거나 칼자루를 잡아당겨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때 카라카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심문관 카라카입니다. 이타르간드 님,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릴 테니···”

“죽고 싶으냐?”

이타르간드가 눈썹을 찡그렸다. 콰직! 동시에 카라카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로난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으려 했지만 카라카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카라카.”

“···부디 노여움을···푸십시오.”

카라카가 띄엄띄엄 말했다.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쥐어짜 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불의 어머니···나바르도제 님의···명을···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흥.”

잠시 움찔거린 이타르간드가 혀를 찼다. 짓누르던 힘이 사라졌다. 그대로 주저앉은 카라카가 맹렬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허어억···! 커억!”

“제기랄, 괜찮아요?”

로난이 달려왔다.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온 이타르간드가 두 사람을 지나쳤다. 카라카를 부축한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그런 말 마세요. 아주 멋졌습니다.”

카라카가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다행히도 큰 부상은 입지 않은 것 같았다. 흘러내린 가면을 고쳐 쓴 그가 로난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진심입니다. 설마 드래곤을 상대로 사과를 종용하는 인간을 보게 될 줄이야···.”

로난은 멋쩍게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해볼 만했다는 말을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저 철없는 드래곤이 듣기라도 했다가는 지랄이 날 터였으니.

지금 가장 급한 것은 마녀를 얼음 속에서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얼음 기둥 앞에 멈춰선 이타르간드가 입을 열었다.

“시체는 알아서 추려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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