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42화 (142/333)

< 142. 봄이여 오라(7) >

#142

하늘이 맑았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공기가 부둣가에 팽배해 있었다. 담뱃대를 한껏 빨아들인 로난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귀한 풍경이군.’

꽁꽁 얼었던 바다가 녹고 있었다. 부스러기 같은 유빙이 물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쿠구궁···! 해수면을 찢고 솟아난 거대한 얼음 가시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와는 달리 햇살은 따스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공기도 꽃을 피워낼 수 있을 정도로 덥혀질 터였다. 픽 웃은 로난이 연기를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봄이구만.”

전대미문의 탈옥 사태가 일단락된지도 벌써 한 시간 가량이 지났다. 마녀의 얼음은 아셀의 의식이 끊어지기가 무섭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담뱃재를 털어낸 로난이 몸을 돌렸다. 상단부가 완전히 박살나 분화구처럼 변한 로돌란 요새가 눈에 들어왔다. 아셀과 이타르간드의 합동 작품이었다.

아마 저걸 고치려면 솜씨 좋은 대지 마법사가 수십 명은 있어야 할 듯했다. 석공이나 목수도. 수많은 사람이 암초를 깎아 만든 부둣가를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기, 이것 좀 옮겨줘!”

“네. 아흐자입니다. 3층의 죄수들은 모두 제압했습니다. 아직까지 탈옥수는 없어 보입니다.”

“흐흐, 이제 그 멍청한 털옷을 안 입어도 되겠군.”

그 난리를 겪었음에도 사람들의 행색은 전체적으로 활기를 띠었다. 새삼 마녀가 불러왔던 일 년의 겨울이 얼마나 끔찍했는지가 실감되었다.

다만 모든 것이 잘 풀렸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아직 가장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로난이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담요로 어깨를 감싼 에르제베트가 그에게 다가왔다.

“로난 님.”

“왔냐.”

안색이 한결 나아져 있는 걸 보니 몸을 추스리고 온 모양이었다. 쫄딱 젖어서 미역처럼 변해 있던 머리카락도 다 말라 있었다. 그녀가 자신이 두르고 있는 것과 같은 담요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덕분에 살았어요. 매번 신세만 지네요.”

“별 거 아니었어.”

“아니긴요. 도대체 2년 동안 무슨 일을 겪으신 거예요···?”

에르제베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직도 그 지옥에서 살아나온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로돌란에서 가장 깊은 곳. 마녀의 얼음 아래.

방어막 덕에 익사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마녀가 바닷물을 얼려 버리자 그들은 빛도, 공기도 없는 얼음 속에 갇히게 되었다.

그때 느낀 한기는 이루 묘사할 수 없었다. 만약 만년설화 진주를 먹지 않았다면 분명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동사했을 터였다.

그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던 것은 전적으로 로난의 덕이었다. 탈출의 순간을 떠올린 에르제베트가 어깨를 움츠렸다.

- 비켜.

로난은 그 한 마디만을 남기고 검을 휘둘렀다. 물보라를 연상케 하는 검기가 얼음을 깨부수던 장면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뒤로는 정신을 차린 이타르간드를 타고 탈출할 수 있었다. 2년 동안 자신도 제법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차원이 달랐다.

무슨 일이라. 심상 세계에서 겪은 일을 회상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녔어.”

“이번에도 그렇게 넘어가실 셈인가요?”

“여기서 설명하긴 좀 길어서. 일단 살았으니 됐잖아.”

“···그건 그렇죠. 아셀 님은요?”

로난의 미간이 잠시 일그러졌다. 말없이 고개를 돌린 그가 턱끝으로 발치를 가리켰다.

“여전해.”

기절한 아셀이 얌전히 누워 있었다. 아셀이 마녀에게 빙의당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눈치채기 전에 몰래 빼돌려 온 것이었다. 여전히 새하얀 머리카락을 본 에르제베트가 입매를 비틀었다.

“머리 색···아직 안 돌아왔네요.”

“그치. 저 아줌마를 진짜 어떻게 뽑아내냐···.”

앞머리를 쓸어넘긴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절시킨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마녀의 영혼을 어떻게 분리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에르제베트와 이타르간드, 실력 좀 있어 보이는 마법사들에게 자문을 구해 봐도 딱히 이렇다 할 답이 나오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일이 커지기 전에 해결하고 싶은데.’

물론 본격적으로 로돌란의 소식이 알려지면 답을 아는 사람들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셀의 인생은 상당 기간 동안 풍파에 휘말리게 될 터였다.

남은 시간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빨리 해결해 버리는 편이 나았다. 그때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여기 계셨군요.”

“카라카?”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카라카가 뒷짐을 진 채 다가오고 있었다. 새부리 가면을 쓴 간수 한 명이 그의 옆을 나란히 거닐고 있었다.

두 사람은 로난의 앞에 멈춰 섰다. 피해 규모를 파악하고 온다더니 아무래도 어느 정도 가늠이 끝난 모양이었다. 올 것이 왔군. 심호흡한 로난이 입을 열었다.

“얼마나 죽었어요?”

“일곱 명입니다. 모두 탈옥을 시도하다가 심문관들에게 맞아 죽었죠. 고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참 한심한 죽음이었습니다.”

“···엥? 그게 다에요?”

“그렇습니다. 저도 놀랍더군요”

카라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로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돌란을 위아래로 관통하는 아셀의 염력 펀치에도 사망자가 전무한 것은 기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물론 로난 님이 경고해 주신 것도 큰 도움이 됐지만, 사망자가 이리 적은 건 하늘이 도운 것이라 볼 수밖에요. 운이 정말 좋았습니다.”

“젠장, 그건 진짜 다행이네요.”

“대신 부상자는 천 명에 가깝고 물적 피해는 헤아릴 수가 없더군요. 분명 비명의 요새가 존립한 이래 최악의 하루로 기록되겠죠. 허허허.”

“시발.”

카라카가 수염을 매만지며 껄껄댔다. 그는 로돌란의 지하층이 대부분 바닷물에 침수된 상태라는 말도 덧붙여 알려주었다. 착잡한 눈빛으로 아셀을 바라보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이 자식에게도 책임을 물을까요?”

“글쎄요. 마녀를 분리하지 못한다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빌어먹을···.”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이것이 겨울의 마녀를 어떻게든 아셀에게서 끄집어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조종당한 건데 통으로 묶여서 벌을 받게 생겼으니.

몸도 빼앗겼는데 범죄자 신분으로 다시 로돌란에 온다면 그건 너무 슬픈 일 아닌가. 그가 턱을 매만지며 침음을 흘리던 와중이었다. 카라카가 말했다.

“그래도 아주 희망이 없는 건 아닌 것 같더군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카라카는 대답하는 대신 옆의 간수에게 눈짓을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간수가 가면을 벗었다. 웬 소녀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알고 있어요.”

“으음?”

어디서 많이 본 소녀였다. 강하지를 연상케 하는 순한 이목구비와 건강한 갈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에르제베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벨린?”

“안녕하세요 에르제베트 선배님. 제가 폐를 너무 많이 끼쳤죠.”

소녀가 어색하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로난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마녀의 그릇이었던 이벨린 드로자였다. 얼음에서 막 꺼냈을 때에 비해 혈색이 워낙 좋아진 탓에 잠시 알아보지 못했다.

“조금 전에 깨어났는데, 괜히 시끄러워질 것 같아 위장을 시켰습니다. 겨울의 마녀를 친구분의 몸에서 꺼내는 법을 알고 있다는군요.”

카라카가 말했다. 로난이 잠시 헛숨을 들이켰다. 그가 이벨린의 양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게 사실이야? 꺼낼 수 있다고?”

“네.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해도 할 수 있어요. 그···어깨.”

이벨린이 고통스러운 듯 눈가를 떨었다. 그제야 로난은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손을 뗐다.

“미안.”

“아니에요. 저를 얼음에서 꺼내주신 분이죠?”

“뭐, 그렇지.”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감사합니다.”

이벨린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로난이 손사래를 쳤다. 예의범절이 바른 것이 상당히 괜찮은 애 같았다.

인간 자체의 분위기가 선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리 마녀에게 빙의 당했었다고는 해도 이런 소녀가 그런 범죄자가 되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마녀가 그릇으로 골랐던 이유가 있었군. 강해.’

마법사로서의 기량 또한 상당해 보였다. 에르제베트에게는 미안한 소리였지만, 딱히 마녀 때문에 입학식 대련에서 패배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녀에게 빙의당한 시기, 그녀를 가둔 사람들···이벨린이 깨어나면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 속속들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로난이 물었다.

“그래서 방법이라는게 뭐야?”

“간단해요. 제가 다시 그릇이 되어 마녀님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미 한 번 그릇이 된 적이 있으니 훨씬 수월할 거예요.”

이벨린은 영혼을 건드리는 마법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다 자신했다. 한때 흑마법사였던 그녀의 아버지 덕이었다. 뭔가 찜찜하기는 했지만 가능성이 열렸으니 일단은 호재라고 할 수 있었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로난의 머릿속을 스쳤다.

“잠깐. 그런데 저 아줌마가 또 날뛰는 거 아냐? 다시 인격을 빼앗기고 마녀가 되면 어떡해?”

“네. 그러니까 옮기자마자 저를 봉인하시면 돼요. 평생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 강력한 봉인술로. 그러면 모든 게 해결돼요.”

이벨린이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벙쪄 있던 로난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안 돼.”

“어라? 어째서죠?”

“젠장, 안 된다면 안 되는 알아. 얘가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요리 조언이나 할 법한 표정과 말투로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나 싶었다. 결국 자신이 아셀의 죄까지 뒤집어쓰겠다는 소리였는데 그따위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다른 방법은 없어?”

“음···아마도요. 마녀님을 감당할 만한 그릇을 찾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라서···.”

“사람 말고 물건은 안 돼?”

“이론적으로는 가능해요. 그런데 마녀님을 봉인할 만큼 강력한 기물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벨린이 침음을 흘렸다. 그녀는 애초에 빙의체를 분리하는 방식 자체는 비슷하지만 겨울 마녀의 힘이 워낙 강대한 것이 문제라고 했다.

어중간한 그릇으로 옮겼다가는 그릇이 깨지거나 마녀가 곧바로 풀려날 수 있었다. 또다른 희생자만 늘리는 꼴이었다. 그릇, 그릇이라. 불현듯 로난의 머릿속에 한 줄기의 섬광이 스쳤다.

“하나 있잖아.”

“네?”

이벨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난이 아셀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갑자기 아셀의 로브를 구석구석 뒤적이기 시작했다. 에르제베트가 당황하며 물었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기다려 봐. 화장실에 갈 때도 들고 다니던데···.”

분명 해주에서 돌아온 뒤에도 들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머지않아 로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의 손이 로브 깊숙한 곳에서 빠져나왔다.

“찾았다.”

로난의 손에는 새카만 책 한 권이 쥐어져 있었다. 두 여자의 눈이 커졌다. 전대미문의 금서인 파괴의 바쥬라였다. 로난은 이벨린에게 바쥬라를 건네며 말했다.

“어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냐?”

한때 무수히 많은 나라를 멸망시켰던 사악한 영혼이 깃들었던 책이었다. 애초에 낱장마다 마법사들의 영혼이 봉인되어 있다는 소문도 있었으니 그릇이 되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바쥬라를 훑어보던 이벨린이 감탄을 흘렸다.

“이건···가능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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