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43화 (143/333)

< 143. 봄이여 오라(8) >

#143

바쥬라를 훑어보던 이벨린이 감탄을 흘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건 가능할 것 같아요···! 에르제베트 님, 저를 도와 주실 수 있으세요?”

“도와 달라고요?”

“네. 영혼을 성공적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준비가 좀 필요하거든요.”

이벨린은 마녀의 영혼을 분리하기 위해서는 매우 많은 양의 마나가 필요하다고 했다. 어째 말만 들으면 에르제베트 뿐만이 아니라 다른 마법사들도 잡아와야 할 판이었다. 설명을 늘어놓던 그녀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기···일이 커지는걸 지양해야 하는 건 알지만···저 분만큼은 섭외할 수 없을까요?”

“누구?”

“저기···절벽에 서 계신 분···.”

그녀의 시선은 어느 청년에게 머물러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사내의 어깨에는 물에 젖은 모피 코트가 걸쳐져 있었다. 이벨린이 재차 감탄을 흘렸다.

“강대한 마나가 여기서도 느껴져요···하이 엘프일까요? 아니, 이건 그 이상의···.”

과연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청년의 어깨 위로 일렁이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로난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벨린의 착각은 둘째치고 저게 왜 여기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상처가 도질 수 있으니까 바로 돌아가라 했는데, 왜 아직도 죽치고 있는 거지? 로난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기다려봐. 내가 데리고 올게.”

청년은 공허한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타고 왔던 배의 이물이 수면 위로 삐죽 솟아나 있었다. 로난이 청년의 옆에 나란히 섰다.

“아직 안 갔네. 이타르간드.”

“···너인가.”

“너가 아니라 로난. 여기서 뭐 하냐?”

“생각을 좀 하고 있었다.”

이타르간드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기존의 오만함은 보이지 않았지만, 넋이 나가 있는 것이 이건 이거대로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생각?”

“나는 어쩌면···약할지도 모른다.”

“허.”

로난이 반사적으로 헛웃음을 쳤다. 우스워서가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였다. 살다 살다 드래곤의 입을 통해 저런 자아 비판적인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로돌란에 와서 받은 충격이 어지간히도 큰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끝내 그 얼음을 녹이지 못했다. 네 도움이 없었다면 마녀를 이기지도 못했겠지. 아니, 이기기는커녕 그 차디찬 지하에서 죽었을 것이다.”

“이성적이군.”

“어머니는 언제나 나를 강하다고 치켜세웠다. 하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어. 내가 성인식 때 뿜었던 화염은 그냥 재롱에 불과했던 거다···.”

이타르간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다 못해 지하실을 파고 들어간 것이 느껴졌다. 잠시 고민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강해지고 싶냐?”

“그렇다. 헌데, 방법을 모르겠다.”

“내가 알려 줄까.”

이타르간드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장부터 싸움을 걸어온 것도 그렇고, 이미 강한 주제에 강함을 추구하는 것도 그렇고 어쩐지 슐리펜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재수 없기는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이타르간드가 물었다.

“그게 뭐지?”

“별 거 없어. 인간처럼 노력하면 돼.”

“인간···? 그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먼저 날 도와주면 알려줄게. 따라와.”

로난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 이타르간드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뒤따랐다. 이타르간드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이벨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

준비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타르간드의 마나량이 워낙 많아서 딱히 다른 이들까지 섭외할 필요는 없었다.

의식은 요새의 뒤편에서 이루어졌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이런 곳도 있었네.”

“겨우 찾았어요. 몰래 흑마법을 펼치기에는 최적의 장소죠.”

이벨린이 웃었다. 원체 좁고 구석져서 다섯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울퉁불퉁한 바닥에는 그녀가 분필로 그린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두 개의 동그라미가 나란히 겹쳐 있는 구조였는데, 원의 중심에는 각각 아셀과 바쥬라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벨린은 겹친 부분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에르제베트와 이타르간드는 가만히 그녀의 등에 손을 얹은 채 마나를 전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로난의 역할은 망을 보는 것이었다. 심호흡을 한두 차례 한 이벨린이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할게요.”

나머지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벨린의 입술이 벌어졌다. 노래를 부르는 듯한 영창이 물 흐르듯 흘러나왔다. 에르제베트와 이타르간드의 몸이 마비되었다. 갑자기 아셀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어윽···!”

“에이 씨발, 깜짝이야.”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셀은 지면에서 1m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멈춰섰다. 불현듯 그가 온몸을 사납게 뒤틀기 시작했다.

“캬아아악! 아으, 아아악...!”

“염병, 이거 괜찮은 거 맞아?”

로난이 질색하며 물었다. 꼭 간질에 걸린 환자가 발작하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의 색이 수시로 변하고 있었다. 하얬던 부분이 붉어지고, 붉었던 부분이 하얘지고 있었다.

“제어권을 얻기 위해 싸우고 있는 거예요.”

“제어권?”

“네. 마녀의 영혼이 바쥬라로 옮겨가면서 아셀 님의 인격이 다시 위로 올라오는 거죠. 좋은 현상이에요.”

이벨린이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에르제베트와 이타르간드의 마나가 빠른 속도로 그녀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이제 조금 집중할게요. 미리 말씀드렸지만, 절대로 방해받으면 안 돼요···!”

이벨린이 말했다. 뭐 아는 게 없으니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고 있네. 좋은 현상은 무슨.”

“엉?”

로난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목소리가 다시 앞쪽에서 들려왔다.

“뭔 짓거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멈추는 게 좋을 걸요.”

“에이, 깜짝이야. 넌 뭐야?”

시선을 내린 로난이 어깨를 움츠렸다. 웬 쬐깐한 애새끼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턱을 괴고 있었다.

기껏해야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가 의문이었다. 소년은 로난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저건 영혼을 파괴하는 마법이니까.”

“···뭐?”

“마나를 공급하고 있는 두 명도 아마 정신에 손상이 갈 거예요. 숙주가 된 아이가 대단하네요. 드래곤의 마나를 빌려서 찍어 누르고 있는데도 저항하고. 제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요.”

로난의 눈이 커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정확히는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 소년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고개를 들자 여전히 몸부림치고 있는 아셀이 보였다. 입술을 한번 짓씹은 로난이 공중에 떠있는 아셀을 확 낚아챘다.

“젠장, 당장 멈춰!”

“꺄아악?!”

이벨린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녀에게 마나를 공급하던 두 사람도 눈을 떴다. 그들은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내가···기절했었나?”

절대로 마나 공급이 끊기기만 한 사람이 보일 만한 반응이 아니었다. 로난이 이벨린을 노려보았다. 줄곧 푸근하던 그녀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거의 다 됐었는데!”

“이 개 같은 년아, 내 친구들한테 뭐 하려 했어?”

아셀을 바닥에 눕힌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그는 라만차를 이벨린의 목에 겨누며 으르렁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년이 흥미롭다는 투로 말했다.

“그쪽도 감이 좋네요. 보통은 헛소리하지 말라며 제 머리를 쥐어박았을 텐데.”

“너, 너는···?”

뒤늦게 소년의 존재를 눈치챈 이벨린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들쥐가 골목길을 돌자마자 살무사와 마주치면 보일 법한 반응이었다. 그녀와 아셀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소년이 몸을 일으켰다.

“영체로 오랜 시간을 살아온 존재들은 자신의 영혼을 나눠서 그릇에 담을 수 있어요. 저 소녀가 그 증거죠. 완전히 버리고 갈아타기에는 아까웠던 거예요.”

“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어떻게?”

“새로운 그릇을 너무 좋은 걸로 골랐어요. 제가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짝! 별안간 소년이 손뼉을 쳤다. 스아아···아셀과 이벨린의 코와 입에서 하얀 안개 같은 것이 스멀거리며 흘러나왔다. 아셀에게서 나온 안개가 훨씬 양이 많았다.

“허억···!”

로난과 에르제베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풀썩. 안개를 전부 뱉어낸 이벨린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눈을 까뒤집은 채 누워 있던 아셀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흐야아악! 저, 저리 가!”

“아셀?!”

로난의 눈이 커졌다. 새하얗게 탈색되어 있던 아셀의 머리카락이 빠른 속도로 단풍이 들고 있었다. 벽에 기대 선 채 숨을 몰아쉬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로, 로난···? 에르제베트?”

“너 인마, 괜찮은 거야?”

주변을 둘러보던 아셀이 자신의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손발이 자신의 의사대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그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얘, 얘들아···나, 나는···!”

“재회의 기쁨은 조금 있다 나누자고요.”

아셀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말허리를 자른 소년이 턱끝을 들어 안개를 가리켰다.

두 사람에게서 흘러나온 안개는 꾸물꾸물 합쳐지며 특정한 형체로 변해 가고 있었다. 로난의 눈이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저건···.”

마침내 안개가 변형을 멈췄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나풀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인의 몸은 정령처럼 반투명했다.

로난은 본능적으로 그녀가 겨울의 마녀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눈을 뜬 여인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여, 여긴···!】

“간만이예요. 휴가는 잘 보냈어요?”

【기, 기다려라. 나는 아직 돌아갈 수 없다.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

“일이 있어서 좀 늦었어요. 어서 돌아가죠.”

짝! 소년이 재차 박수를 쳤다. 마녀의 형체가 다시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소년이 박수를 한번 더 치자, 안개는 그가 차고 있는 팬턴트 속으로 빨려들어 사라졌다.

【아아아아···!】

나지막한 비명이 바닷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마녀의 기척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네 사람은 벙찐 채 소년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건은 이타르간드였다.

“너···강하군.”

“네? 음···그런 편이죠?”

“어쩌면 어머니보다 더···.”

이타르간드의 숨소리가 거칠어져 있었다.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하던 그가 픽 웃었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니죠. 나바르도제 님에 비하면 아직 모자라요.”

한순간 로난의 뒷목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저건 단순한 어림짐작이 아니라 정교한 계산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불의 어머니와 자신을 같은 저울에 올린다고? 손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낸 로난이 입을 뗐다.

“너. 정체가 뭐야···?”

“잠시만요. 먼저 할 일부터 끝낼게요.”

그리 대답한 소년이 땅을 짚었다. 파아아···! 영창으로 추정되는 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나옴과 동시에 마나의 파장이 로돌란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쿠구구궁! 굉음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든 에르제베트가 기겁하며 외쳤다.

“마, 맙소사!”

비명의 요새가 복구되고 있었다. 무너진 천장이 움직이며 스스로를 접합하고 있었다. 동파되어 무너진 암초 곳곳에 새 살이 올라오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로난 역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희대의 대지 마법사 자로딘이 세 명쯤 있어야 해치울 일을 혼자서 저지르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쿠구구구!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세상을 들어 뽑는 듯한 굉음과 함께 로돌란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공황 상태에 빠져 있던 아셀이 절벽 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떠, 떠오르고 있어!”

“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황급히 가장자리로 달려간 로난의 눈이 튀어나올듯 커졌다. 정말로 로돌란이 공중에 떠오르고 있었다.

유빙마저 거의 녹아 사라진 바다와 도열해 있는 선박, 마녀가 남긴 얼음 송곳이 빠르게 멀어져 가고 있었다. 소년이 말했다.

“듣자하니 아래 부분은 완전히 침수되었다 하더라고요. 그럴 바에 이 편이 낫지 않나요? 죄수들도 탈출하지 못하고.”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로돌란은 십 분 정도를 상승하고 나서야 멈춰섰다. 한층 맑아진 공기가 폐를 적시고 있었다.

“이건···정말로···.”

양떼 같은 뭉게구름이 눈앞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고도가 높아지니 더 먼 곳을 볼수 있게 되었다. 지평선 저 멀리 작은 굴뚝 같은 것이 솟아나 있었다.

원래는 보이지 않던 여명 마탑이었다.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던 소년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아, 죄수를 배로 나를 때가 문제긴 하네요. 조치를 취해 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 사람은 이제 모두 경외 어린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현듯 로난이 실소했다. 이 정도면 슬슬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대마법사께서 여긴 무슨 일이에요?”

“오호? 역시 감이 좋네요.”

세상에 이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년이 히죽 웃었다.

“들었잖아요. 이진느가 새 그릇을 너무 좋은 걸로 골랐다고. 그녀도 붙잡을 겸 그릇 구경 좀 하러 왔어요.”

“대, 대마법사라면···.”

아셀의 입에서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에르제베트는 석화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굳어 있었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소년이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반가워요. 황혼 마탑의 탑주 로르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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