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봄이여 오라(9) >
#144
“다들 반가워요. 황혼 마탑의 탑주, 로르혼이에요.”
로르혼이 히죽 웃었다. 역사에 전례가 없던 대마법사의 자기소개치고는 퍽 검소했다.
에르제베트는 딸꾹질을 시작했고, 아셀과 이타르간드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로난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를 가만히 내려보았다.
‘···이 작자를 여기서 보게 되다니.’
다만 무덤덤한 표정과는 달리 심장은 피부를 찢고 튀어나올 것처럼 뜀박질을 해대고 있었다. 살다살다 그 로르혼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게 될 줄이야.
로르혼.
여타 유명인들이 그렇듯이 로르혼 또한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음유시인이나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마법사들은 그를 무지를 밝히는 등불, 빛의 창조자, 오대 원소의 주인 등 혓바닥에 쥐가 날 것 같은 거창한 이름으로 불렀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냥 ‘대마법사’라는 단순명료한 호칭을 선호했다. 애당초 현시대를 살아가는 마법사 중 유일하게 9서클에 도달한 인물이었으니 다른 사람과 헷갈릴 일도 없었다.
로난 또한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먼발치에서나마 두 번 정도 본 기억이 있었다. 한번은 대륙을 방랑하던 시절 가뭄이 든 마을에 비를 내리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고, 다른 한번은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기 전 제국군 총회의에 참석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게 마지막이었지.’
과거를 떠올린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로르혼은 아하유테와 함께 강림한 두 거인 중 하나와 함께 동귀어진했다.
정확히는 자신의 영혼을 매개체 삼아서 영원히 봉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요새 너머에서 비명과 감탄이 산발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세, 세상에···! 지금 로돌란이 공중에 떠 있는 거야?!”
“이게 도대체 무슨···!”
전능하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능력이었다. 이토록 강한 마법사가 거인 하나를 처치하지 못하고 공멸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설령 그 개체가 아하유테보다 강했다 하더라도. 새삼 종말의 심각성이 느껴졌다.
‘그나저나···왜 이런 모습이지?’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앞의 애새끼가 로르혼임은 분명해 보였으나 기존에 자신이 알던 생김새와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적막은 일 분 정도 이어졌다. 간신히 딸꾹질을 멈춘 에르제베트가 입을 열었다.
“로, 로르혼···? 제가 아는 그···그 로르혼 님인가요?”
“음. 아마도 맞을 걸요. 왜 그러시죠?”
“아뇨, 그···제가 아는 모습은 조금 더···그러니까···.”
에르제베트는 말을 더듬으며 자신의 턱 주변을 만지작거렸다. 마침 로난 또한 같은 것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로르혼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렇군요. 그러니까 그쪽의 말은···.”
딱! 로르혼이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별안간 키가 쑥쑥 자라나기 시작했다. 매끈하던 피부에 세월이 새겨지고, 새카맣던 머리카락에는 서리가 내렸다.
순식간에 에르제베트를 뛰어넘은 로르혼의 정수리는 로난과 거의 차이가 없는 곳에서 멈춰 섰다. 옷이 몸과 함께 늘어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가 가슴께까지 흘러내린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왜 이 모습이 아니냐는 거겠지?”
“네, 네에···! 맞아요.”
잠시 벙쪄 있던 에르제베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로난도 익히 알고 있던 모습이었다. 불현듯 저 노친네는 수염으로 뒤도 닦을 수 있겠다며 징벌병 동기들과 낄낄대던 기억이 났다.
“하하, 대외적인 자리에서 애용하는 모습이란다. 대마법사라는 거창한 별칭에 꽤 어울리는 외모지. 이 수염 좀 보려무나.”
로르혼은 수염의 중간 부분을 붙잡고 장난스레 흔들어 댔다. 말투가 저절로 노친네처럼 변한 걸 보니 아예 작정하고 설정을 잡은 것 같았다. 문득 이질감을 느낀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일반적인 폴리모프와는 좀 다른 것 같네요.”
“호오, 그것까지 알아보았느냐?”
“네. 자세히 설명은 못 하겠는데 뭔가 더 자연스럽다 해야 하나···.”
“눈썰미가 좋구나. 그래, 어느 순간부터 내 몸에 흐르는 시간을 만질 수 있게 되었지. 이 모습은 무릎이 아파서 싫으니 다시 돌아가야겠구나.”
재차 손가락을 튕긴 그가 다시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로르혼은 신체의 노화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허무맹랑하게만 들리는 소리에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허.”
저주에 걸려 제멋대로 나이가 변하는 세크리트의 압도적인 상위 호환이었다. 한껏 쫄아 있던 아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시, 시간을 조작할 수 있다고요?”
“네. 오직 제 자신에게 한해서지만 말이지만요.”
“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죠? 분명히 ”
“하하, 탐구심을 보니 타고난 마법사군요. 이름이 뭐죠?”
“아···! 그, 그러니까···아셀입니다!”
아셀은 그제야 허리를 반으로 숙이며 인사를 했다.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긴 듯했다. 로르혼은 아셀을 위아래로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래요, 아셀. 당신은 이진느···그러니까 겨울의 마녀가 왜 당신을 탐냈다고 생각하나요?”
“네, 네에?”
“제가 지금 뭘 보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향후 수백 년은 크라티르 그 아이를 능가하는 재목이 나타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눈빛과 목소리가 진중했다. 아셀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 채 손을 배배 꼬았다. 로르혼이 뒷말을 잇지 않았기에 기묘한 대치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참다못한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저 애는 어떻게 되는 거죠?”
로난은 엄지를 들어 이벨린을 가리켰다. 벽에 기대앉아 숨만 들이내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꼭 실이 끓어진 목각인형 같았다.
게슴츠레 떠진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성큼성큼 다가간 로르혼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잠시 정신을 집중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거예요. 일 년 동안 최고위 정령과 영혼이 결합되어 있었으니 충격이 상당했겠죠. 원래도 충분히 뛰어난 마법사니 회복에 전념한다면 금방 나을 수 있을 거예요.”
“···최고위 정령?”
“아, 모르고 계셨군요. 이진느, 그러니까 겨울의 마녀는 원래 정령이었어요. 그것도 아주 격이 높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정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로르혼은 겨울의 마녀가 하이란이나 에델바체에 버금가는 최고위 정령이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일행의 눈이 커졌다.
‘그래서 그렇게 지랄맞던 거였군. 빌어먹을.’
어쩐지 지나칠 정도로 강하다 싶었다. 설마 바람의 황태자 하이란과 비견될 줄이야. 심상세계에서 하이란을 직접 본 로난은 그의 위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로르혼이 말을 이었다.
“만약 아셀 씨와의 결속이 더 진행되었더라면 지금처럼 쉽게 끝나지는 않았을 거예요. 다행스러운 일이죠.”
“둘이 도대체 무슨 관계에요?”
“으음···서로 생각하는 게 달라서 섵불리 말하기가 애매하네요. 저는 제 자신을 이진느의 명예를 지켜 주는 보루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녀는 저를 사악한 교도관 정도로 여기거든요.”
로르혼이 겨울의 마녀를 흡수한 팬턴트를 만지작거렸다. 겉이 투명한 정이십면체의 안쪽에서는 손톱만한 범위의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보루요?”
“네. 오늘처럼 추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보루. 그녀는 사랑에 빠진 이후로 격을 완전히 잃었거든요.”
로르혼은 그녀가 다시 위대한 정령으로서의 격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설명했다. 마녀가 타락한 것은 누군가에게 집착하게 된 이후였다.
육체가 없는 마녀는 마법적 재능이 뛰어난 여인들의 몸에 빙의해 그를 유혹하려 들었으나 빈번히 실패했다고 말했다. 초월적인 존재인 정령을 꼬신 걸 보아하니 여간 매력적인 인물이 아닌 듯했다. 로난이 말했다.
“맞아, 혹시 이 여자가 누굴 좋아하는지 알고 있어요?”
“아뇨. 이진느도 그것만큼은 이야기해주지 않아요. 하얀 머리와 주홍색 눈동자가 근사하다는 말을 가끔 남기는 것 외에는···그러고 보니 그쪽도 눈이 주홍색이군요?”
로르혼이 눈썹을 으쓱였다.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로르혼이 설명한 것과 인상착의가 같은 사람을 딱 두 명 알고 있었다. 한 명은 이릴이었고, 다른 한 명은 구원자를 뒤에서 찌른 빌어먹을 배신자 놈이었다.
‘역시 그 새끼인가?’
잠시 마녀의 사랑이 그 새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헌데 그렇게 되면 또 하나의 의문점이 발생했다.
마녀는 분명 이벨린을 얼음 속에 가둔 작자들더러 ‘낯선 괴한들’이라 지칭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이 그 로브쟁이라면 네뷸라 클라지에에 관해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어렵군.’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더군다나 로브쟁이가 얼음에 검흔을 새기는 장면도 분명히 보았을 터였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로르혼이 무언가를 감지한 듯이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음, 슬슬 가봐야 할 것 같네요.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어요.”
아무래도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저쯤 되는 위치라면 하루가 72시간이라도 여유를 갖기 힘들 터였다. 로난과 아셀, 에르제베트를 번갈아서 쳐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전부 필레온 아카데미의 학생들이군요. 크라티르 그 아이는 잘 지내나요?”
“눈코뜰새도 없이 바쁘던데요. 이제부터는 좀 나아지겠지만.”
“수명이 다하기 전에 시간을 만질 수 있게 되어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로르혼이 쓰게 웃었다. 그는 자신의 제자 중 살아 있는 것은 크라티르 뿐이라고 말했다. 로르혼은 한 명 한 명과 악수를 하며 덕담을 건넸다. 그가 아셀의 작은 손을 맞잡는 순간이었다.
“아셀. 혹시 저와 함께 진리를 탐구해볼 생각은 없나요?”
“···네?”
“세상은 아직도 많은 비밀을 감추고 있어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장님에 귀머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생각이 있다면 졸업한 뒤에 황혼 마탑으로 찾아오세요.”
말을 마친 로르혼이 미소지었다. 무언가 굉장한 제안이 쉬리릭 지나간 것 같았다. 아셀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지만 끝내 할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 그게 무슨···로르혼 님?”
“필레온에서의 배움도 소홀히 하지 마시고요. 배움의 터로서는 그만한 곳이 없으니까.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
짝! 로르혼이 손뼉을 쳤다. 후우우웅! 느닷없이 불어온 강풍이 주변을 휩쓸었다. 그의 몸은 안개가 흩어지듯 바람에 날아가며 사라져 버렸다.
“퇴장까지 화려하시군.”
로난이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은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로르혼이라는 존재 자체가 환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유하고 있는 로돌란이 그들이 서 있는 장소가 꿈 속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었다. 가만히 지평선을 바라보던 로난이 이벨린을 들쳐 업었다. 마녀도 잡고 아셀도 되찾았으니 해야 할 일은 딱히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우리도 슬슬 돌아가 볼까.”
일행은 별도의 인사를 하지 않고 필레온으로 복귀했다. 이타르간드가 그들을 태워 주었다. 제정신으로 이타르간드의 본체를 처음 본 아셀이 입을 쩍 벌리며 경악했다.
“크, 크다아···!”
“고작 이 정도로 놀라다니. 나바르도제를 직접 보면 기절하겠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로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역시 살고 볼 일이었다. 그 레드 드래곤의 등 위에 타게 될 줄이야. 전생의 자신에게 말해 주었다면 절대로 믿지 않을 일이었다. 이타르간드가 말했다.
“도착하면 약속을 지켜라 로난. 강해지는 법을 알려 주는 거다.”
“알았으니까 출발이나 하셔.”
비행은 두 시간가량 이어졌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볕이 따스했다. 줄곧 하늘을 뒤덮던 먹구름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로난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봄이구만.”
저 멀리 제도가 보였다. 봄을 되찾은 대지 곳곳에서 파릇한 연두색이 물감처럼 번지고 있었다. 눈이 녹으며 드러난 땅의 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