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후보 >
#146
“나비로제 교관님의 호출이다. 검의 제전과 관련해서 할 말이 있으시다는 군.”
“검의 제전?”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있었다. 온 대륙의 뛰어난 검사들이 모여 벌이는 회합이자 의식이라고 했던가. 의식이 열리는 파르잔 어딘가에는 전설 속의 성검이 감춰져 있다는 말도 들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해주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비로제가 검의 제전이 머지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로난이 막 슐리펜을 따라가려는 참이었다. 아셀이 그의 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그···잠깐만.”
“엉?”
아셀은 안절부절못하며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꼭 뭐 마려운 개새끼 같았다. 로난이 슐리펜을 돌아보며 말했다.
“금방 갈게. 먼저 가 있어.”
“너무 늦지 않게 와라. 1 투기장이다.”
슐리펜이 방을 빠져나갔다. 로난은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이, 이건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
품을 뒤적이던 아셀이 새카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구원자가 집필한 금서 파괴의 바쥬라였다. 차례대로 낱장을 넘기던 그가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이건···.”
“로돌란에서 돌아온 이후에 이렇게 변했어. 아니, 정확히는 한 장이 늘어났어.”
아셀은 두렵다는 듯 몸을 움츠렸다. 꼭 얼음을 저며서 종이로 만든 것 같았다. 새롭게 생겨난 마지막 페이지는 온통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명백히 다른 재질로 구성된 낱장에서는 으슬으슬한 냉기가 새나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웬 글씨가 작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라 써 있는 거냐? 프로즌···필드?”
“내, 냉기 마법의 주문과 운용법이야. 아주 상세하게 적혀 있어. 내가 어느 정도 다 배웠다 싶으면 저절로 다음 단계로 내용이 변해···.”
“뭐라?”
“나, 나도 잘 모르겠어. 왜 이런 게 생긴 걸까.”
아셀이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는 새로운 페이지가 꼭 자신을 가르치려 하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이 괴상한 종이는 꼭 스승이라도 된 것처럼 단계적으로 냉기 마법의 지식을 전수해 주고 있었다.
개중에는 아직 학계에 밝혀지지도 않은, 굉장한 마법이나 정보도 더러 있었다. 실제로 아셀이 미숙하게나마 이토록 빠른 시간 내에 냉기를 다룰 수 있게 된 것도 저 책 덕이었다.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 나쁘군.”
유용함은 둘째치고 무생물인 책이 사람처럼 구는 것이 뭔가 불쾌했다.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로난이 얼굴을 바짝 들이댄 채 마지막 페이지를 살피던 와중이었다. 낯익은 목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반갑구나.】
“흐야아아악!!”
“이런 젠장, 뭐야?”
아셀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로난이 반사적으로 책을 집어 던졌다. 쿵! 빠르게 뒷걸음질치던 아셀은 벽에 뒤통수를 찧고 나서야 멈춰섰다. 한참이나 숨을 몰아 쉬던 그가 물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바, 바, 방금 뭐였어? 응?!”
“···틀림없는 그 년의 목소리였는데.”
틀림없었다. 겨울 마녀의 목소리였다. 로난이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찰나였다.
【아야야···그래도 집어 던지는 건 조금 너무하지 않느냐.】
다시금 마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난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쥬라가 덩그러니 널브러져 있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니가 말한 거냐?”
【그렇단다 아이야. 오랜만에 보는구나.】
“시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마녀의 목소리는 바쥬라에서, 정확히는 하얗게 변한 마지막 페이지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나지막한 웃음을 흘리던 마녀가 말을 이었다.
【극적으로 영혼을 잔류시킬 수 있었지. 아아, 정말 위험했단다.】
“영혼을 잔류시켰다고?”
【그래. 의식이 어느 정도 진행된 덕에 이 책에 영혼 일부를 남길 수 있었단다. 그 덕에 너희와도 대화하고 있는 거고. 저 아이만큼은 아니지만 이것도 굉장한 그릇이구나.】
마녀는 로돌란에서 행했던 의식 덕에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벨린과 아셀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쪼개서 바쥬라에 넣는 것도 목적 중 하나였다 덧붙였다.
너무 당당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빌어먹을 년이.”
바쥬라를 집어든 그가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혼자만 새하얀 종이에 칼끝을 겨누었다. 로난이 팔을 치켜드는 순간이었다.
【자, 잠깐! 지금 뭘 하려는 거냐? 멈추어라!】
“멈추기는 지랄. 또 개수작을 부릴 지 어떻게 알고.”
마녀가 당혹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로난은 마지막 장을 따로 도려내서 봉투에 넣은 뒤 로르혼이 있는 황혼 마탑으로 보낼 거라 설명했다. 원래 하얀 종이가 더욱 창백해졌다.
【이, 이번에는 정말로 그럴 생각이 없다! 애초에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면 너희에게 아무 말도 안 했겠지. 그렇지 않느냐?!】
“그럼 왜 수상쩍게 스승 행세를 하는 거야? 엉?”
【로르혼 그 늙은이와 마찬가지로 이 아이를 가르쳐 보고 싶을 뿐이다! 어차피 지금의 내가 할수 있는 것은···그것밖에 없고 말이다.】
“설명해.”
로난이 칼을 치웠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마녀가 말을 이었다.
【···나는 수많은 그릇을 거쳐 왔다. 족히 세 자릿수가 넘는 필멸자가 나와 함께 눈 속에서 춤을 췄지. 그녀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한다.】
“자랑이다.”
【헌데 내가 빠져나왔음에도 나의 능력을 쓸 수 있는 경우는 없었어.】
마녀는 아셀이 얼음을 다룰 수 있게 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 설명했다. 십 년이 넘게 한 사람의 몸에 머물렀던 적도 있지만, 그녀조차도 마녀가 몸을 빠져나가기 무섭게 힘을 잃었다.
당장 이벨린만 보아도 그러했다. 그녀는 얼음을 다룰 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원래 냉기 마법사인 이벨린이 다루던 얼음이지 마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 아이는 특별해. 나는 존재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를 가르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을 핑계로 힘을 키울 생각 아냐? 그 나를 닮았다는 남자를 찾아가려고.”
【아하하···그 아이는 이런 나를 만나주지도 않을 거다. 더군다나 이 상태로 힘을 키우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마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새끼손톱을 제외한 신체의 모든 부분을 로르혼에게 빼앗긴 상태라 비유했다. 로난의 말마따나 힘을 회복하고 싶어도 영혼 자체가 뜯겨나간 거라 성장할 여지가 전무하다고 했다.
【이렇게 미약한 영혼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말을 하거나 종이에 글씨를 투사하는 게 고작이지.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게다.】
애초에 수상쩍은 짓을 할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소리였다. 마지막 낱장에서 느껴지는 마나로 보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잠시 침묵하던 마녀가 입을 뗐다.
【가르치게만 해 다오. 만약 내가 약속을 어기거나 속이려 든다면 나를 마음대로 해도 좋다.】
체념한 듯한 말투에서는 진실성이 느껴졌다. 로난의 입매가 이리저리 비틀렸다. 마녀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솔직히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세상에 누가 하이란과 버금가는 최고위 정령에게 일대일로 교육을 받겠는가. 다만 이는 쉽사리 종용할 수 없는 문제였다. 침음을 흘리던 로난이 아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셀, 니가 정해.”
“으, 응···?”
“이 괴물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있어? 한 번 몸을 빼앗겨 봤으니까 알 거 아냐.”
“그, 그게···.”
아셀이 말을 더듬었다. 당시를 생각하니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얼어붙은 시간, 여인의 포옹과 제멋대로 움직이는 몸이 자행하는 파괴. 바쥬라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약화된 건 사실이야. 적어도 내게 영향을 미칠 정도의 힘은 남아 있지 않아. 그건 확실해.”
“그 말인즉?”
“······배우고 싶어.”
아셀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그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강해져야 했다. 픽 웃은 로난이 칼을 다시 집어넣었다. 마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참으로 올바른 판단이다. 어여쁜 아이야.】
****
아셀은 결국 마녀의 제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로난은 마녀와 아셀이 피의 맹세의 열화판인 마나의 맹세를 진행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심하고 방을 나섰다.
‘과감해졌어. 찌질이 주제에.’
로난은 복도를 걷는 내내 피식피식 웃었다. 배우고 싶다 읊조리던 아셀의 눈빛이 머릿속을 떠나니고 있었다. 고블린도 제대로 못 죽여서 질질 짜던 놈이 저렇게 성장할 줄이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로난은 어느새 제1 투기장에 도착했다. 이미 도착한 슐리펜과 나비로제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로난과 눈이 마주친 나비로제가 히죽 웃었다.
“겨울을 끝낸 영웅이 왔구나. 미천한 스승에게 시간을 내 줘서 고맙군.”
“젠장, 놀리지 마세요.”
나비로제가 큭큭거렸다. 다행히도 지난번과 비교하면 안색이 훨씬 나아져 있었다. 자이파에게 패배하며 생긴 마음의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된 모양이었다.
“농담이다. 급한 일이 있었나 보지?”
“네, 친구가 일생일대의 선택을 해야 했어서.”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지. 슐리펜의 옆에 서라.”
로난은 그렇게 했다. 나비로제의 표정이 한결 진지해졌다. 두 사람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제 성지 파르잔에서 연락이 왔다. 내달 중순에 검의 제전이 열린다고 하더군. 너희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일정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검사는 참가조차 할수 없는 격 높은 자리다.”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두 사람만 따로 부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슐리펜이 손을 들며 질문했다.
“원래 예정보다 앞당겨진 것 같은데, 이유가 있습니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개최 일자 같은 건 파르잔의 늙은이들이 정하는 거니까. 다만 네 말대로 이례적인 경우라는 것은 사실이다. 어지간하면 기간을 엄수하는데 말이지.”
나비로제가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표정에 의문이 서려 있는 걸로 봐서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일인 듯했다.
“나는 모든 학년을 통틀어 너희 둘 중 한 명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명이요?”
“그래. 필레온 아카데미에서 참석할 수 있는 인원은 교사 한 명에 학생 한 명이다. 너희 둘 중 더 강한 사람만이 나와 함께 파르잔으로 떠날 수 있다.”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로난과 슐리펜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 다 관심없는 듯 담담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양보할 생각은 없겠지.”
“농담도 할 줄 알았냐?”
로난이 픽 웃었다. 고즈넉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사나워졌다. 가만히 그를 노려보던 슐리펜이 낮게 읊조렸다.
“어쩔 수 없군.”
한순간이었지만 섬칫한 살기가 슐리펜의 어깨 위로 피어올랐다. 거의 2년 전에 이릴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할 때와 버금가는 진지함이었다. 아무래도 검의 제전이라는 자리에 대해 상당한 중압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 정도로 중요한 자리인가?’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솔직히 그는 검의 제전에 대해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전생에도 들은 적이 없던 정보거니와, 개최의 가장 큰 의의인 성검은 말 그대로 전설에나 등장하는 허무맹랑한 존재였으니.
다만 물러날 생각이 있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로난의 관심은 각지에서 모여드는 칼잡이들에게 향해 있었다.
자유롭게 대련이 가능하다는 말로 미루어 보아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될 터였고, 어쩌면 든든한 조력자를 구할 수도 있었다. 나비로제가 입을 열었다.
“누가 갈지는 파르잔으로 떠나기 사흘 전에 결정하겠다. 대련을 벌여 이긴 사람이 나와 함께 간다.”
로난과 슐리펜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예상한 바였다. 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나비로제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대신 조건이 있다. 남은 한달간 너희끼리의 대련을 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