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55화 (155/333)

< 155. 성지를 향해(2) >

#155

검의 제전이 열리는 성지 파르잔은 대륙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가는 데만 무려 닷새가 걸렸는데, 특정한 구간부터는 무조건 두 다리로 걸어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딱히 그런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파르잔을 둘러싼 자연환경이 유별나게 지랄 맞아서 걷는 것을 강요받을 뿐. 여정의 이틀 차를 맞이한 로난과 슐리펜은 그 열악함을 몸소 체감하고 있었다. 로난이 말했다.

“그런데 교관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냐.”

“굳이 이따위 길을 고른 이유가 있나요? 힘들거나 무서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 궁금해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세 사람은 좁다란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바람은 사람도 내던질 기세로 불어오는 탓에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말이나 마차는 고사하고 사람 한두 명 지나가기도 폭이 좁아 병정놀이하듯 일렬로 늘어선 채 움직여야 했다. 각자의 등에 짊어진 배낭은 어지간한 애새끼보다 무거웠다.

여기까지는 상관없었으나 문제는 이 빌어먹을 길이 깎아지른 바위산 한가운데 나 있다는 점이었다. 발밑을 내려다본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시발.”

10m 정도 아래에 하얀 안개가 바다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하늘은 눈이 아플 정도로 창창한데 왜 저 아래에만 안개가 깔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발을 한끝만 잘못 디뎌도 그대로 저승행이라는 것이었다. 안개가 아래를 가리고 있어서 정확한 고도는 알 수 없었지만, 돌멩이를 떨어뜨리고 분 단위가 지나서야 소리가 나는 걸로 보아 시체를 보전할 수 있는 높이는 아니었다. 나비로제가 대답했다.

“이게 그나마 괜찮은 길이다.”

“그렇겠죠.”

“안 믿는 눈치군. 지금이라도 북서쪽 진입로로 방향을 틀어도 좋다. 암벽을 사흘동안 기어오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니까.”

“오늘따라 한층 아름다우신 것 같다고 말했던가요?”

“이런 지형 또한 어중떠중이들을 걸러내는 요소 중 하나다. 잔말 말고 따라오도록.”

결국 로난은 다시 묵묵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그래, 길이 좀 험한 것뿐이잖아. 몬스터나 산적이 안 나오는 게 어디야. 로난이 합리화를 하던  차였다. 저 높은 곳에서 고막을 찢어발기는 듯한 괴성이 울려 퍼졌다.

“퓌요오오옷!”

익히 들어본 소리였다. 머지않아 세 사람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작은 점 네 개가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본 로난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 시발.”

황소만한 그리폰 세 마리가 날개를 접은 채 강하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로난 일행을 먹잇감으로 점찍은 모양이었다.

속도가 예사롭지 않은 것이 5초 정도면 여기까지 도달할 것 같았다. 칼자루에 손을 얹은 로난이 슐리펜을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내가 할게.”

“알았다.”

슐리펜이 주억거렸다.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마나를 머금어 붉어진 라만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폰들은 어느새 부리에 난 흉터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오크도 즉사시키는 거대한 앞발톱이 볕을 받아 번득이고 있었다.

“퓌오오오!”

“아깝네. 잡아다 팔아도 비싼 놈들인데.”

간격이 더 좁아졌다. 날갯짓의 풍압이 로난의 머리카락을 헤집는 순간이었다. 라만차가 호를 그림과 동시에 물보라 같은 검기가 부채꼴로 쏘아져 나갔다. 촤아아악! 액체처럼 방울진 검기 수백 개가 그리폰들의 몸을 꿰뚫으며 지나갔다.

“크옥···!”

피가 튀었다. 찢겨 나간 가죽 틈새로 내장이 후두둑 떨어졌다. 날개에 숭숭 뚫린 구멍 너머로 햇빛이 새어들었다. 벌집이 된 그리폰들이 안갯속으로 추락했다. 슐리펜이 흥미롭다는 투로 말했다.

“엊그제 대련 당시에도 생각했지만, 좋은 기술이군.”

“쓸만하긴 하지.”

로난이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긴 해주를 마치고 나서야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된 기술이었다.

확실히 바쥬라가 만든 가짜 코어보다는 진짜 코어에서 발현한 기술이 더 강력했다. 물론 아직은 용량이 작아 더욱 단련을 해야겠지만. 그때 저 멀리서 그리폰 한 마리가 안개를 찢으며 날아올랐다.

“크엑! 크에에엑!”

“뭐야 저거.”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움직이는 것을 보니 운 좋게 치명상을 피한 모양이었다. 간격을 어림잡던 그가 혀를 찼다.

“썅, 놓쳤네.”

검기가 닿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고 있어서 슐리펜의 폭풍검도 빗나갈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체념한 로난이 납도 하려던 차였다. 비틀거리며 날아가던 그리폰이 날갯짓을 멈췄다.

“꾸룩···?”

“어?”

날개뿐만이 아니라 팔다리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꼭 마비 화살에라도 맞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추락하던 그리폰은 다시 날개를 퍼덕이며 상승하기 시작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로난이 의아해하던 와중이었다. 별안간 앞에서 걷던 나비로제가 신경질적으로 대태도를 휘둘렀다 .쐐애액!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초승달 형상의 검기가 그리폰에게 적중했다.

“크엑!”

놀라운 사거리와 정확도였다. 반 토막이 난 시체가 안갯속으로 추락했다. 로난이 나비로제를 돌아보았다.

“교관님?”

“후···후우···.”

나비로제는 전력 질주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들썩이는 어깨를 본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언젠가 한번 이런 상태의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교관님?”

로난이 다시금 그녀를 불렀다. 나비로제가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후우···그래.”

“······!”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오싹한 소름이 로난의 전신을 휩쓸었다. 팔이 굳어버리는 탓에 하마터면 칼자루를 놓칠 뻔했다.

나비로제의 동공이 세로로 좁혀져 있었다. 꼭 뱀의 눈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당황하는 로난을 본 나비로제가 흠칫거렸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눈을 덮은 채 입을 열었다.

“···그리폰이라는 놈들은 동료를 불러오기 때문에 확실히 처리해야 한다. 한 마리라도 살려서 보내면 골치 아파지니까.”

“···괜찮아요?”

“그래. 괜찮다.”

나비로제가 눈가에서 손을 치웠다. 진녹색 눈동자는 원래대로 동그랗게 돌아가 있었다. 로난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아직 다 안 나은 거에요?”

틀림없다. 방금 나비로제는 분명 그녀의 오러인 만사를 시도하려 했었다. 눈동자가 뱀처럼 변한 것이 그 증거였다. 말없이 입술을 질겅이던 그녀가 등을 돌렸다.

“출발하지. 갈 길이 멀다.”

쿵···! 그리폰이 추락한 소리가 뒤늦게 바위산 아래에서 울려 퍼졌다. 로난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슐리펜 또한 마찬가지였다. 흐르는 안개와 바람의 곡성만이 고요 속에 팽배해 있었다.

****

“···그러니까 교관님은 거사를 치러야 하는데 과거의 나쁜 기억 때문에 세우지 못하고 있는 거지. 아마 심리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을 거야. 단순한 비유니까 교관님이 여자인 건 그냥 넘어가자고.”

“천박하군.”

슐리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기껏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줬더니만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얌마, 너한테도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야.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다 이거.”

“교관님이 올해 초에 자이파에게 패배한 뒤 오러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것은 나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설마 아직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만.”

그들은 나비로제의 상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완전히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로난이 혀를 찼다.

“충격이 컸겠지. 평생 진 적이 없는 사람인데 같은 상대에게 두 번을 내리 졌으니.”

로난은 미리 모아 놓은 나뭇가지를 모닥불 속에 던졌다.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티가 춤을 추듯 흩날렸다. 오늘은 여정의 사흘째 밤. 야영 장소는 이름 모를 숲 속이었다.

하늘에는 별무리가 흘러넘칠 기세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따끔씩 가느다란 유성이 꼬리를 끌며 지나갔다. 지상에 빛이 없어서 그런가 제도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잘 보였다.

“교관님의 상태에 관해서는 나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도울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군.”

“그러게나 말이다. 뭐 대화를 해보려고 해도 그 이야기만 나오면 귀신처럼 화제를 돌리니···.”

로난이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그 사건 이후로도 나비로제는 평소와 다름없이 두 사람을 대했다.

하지만 오러나 본인의 상태 같은 주제에는 철저한 무시로 일관하고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그 누나는 어디 갔냐? 한참 되지 않았어?”

“잠시 바람을 쐬고 온다 하시기는 했다.”

“···그래?”

로난이 연기를 내뱉었다. 나비로제의 침낭이나 짐은 그대로 놓아져 있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나도 다녀오마.”

“어디 가는 거지.”

“데려올게. 내일모레면 파르잔에 도착할 텐데 그러면 또 얘기할 시간이 없어질 거 아냐. 술을 먹여서라도 털어 놓게 해야겠으니까 잘 지키고 있어.”

로난은 그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찝찝해서라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다행히도 흙이 물러서 나비로제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숲으로 갔군.’

그는 발자국을 따라 걸어갔다. 원체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숲이 그렇게 무성하지는 않았다. 제도에서는 들은 적 없던 밤새의 노래가 듬성듬성한 잡목림 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여자가 어디까지 간 거야?’

발자국은 굉장히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따라가도 나비로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슬슬 짜증이 나려 할 무렵이었다. 이변을 느낀 로난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이 냄새는.’

로난이 코를 킁킁거렸다. 여지껏 느끼지 못한 이질적인 향이 밤 공기 속에 묻어나 있었다. 그것이 물 냄새라는 것을 눈치채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샘이라도 있나?’

비리기보다는 청명했다. 들꽃 냄새도 은은하게 섞여 있는 것이 썩 나쁘지 않은 냄새였다. 그러고 보니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로난은 물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마침 나비로제의 발자국도 그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시야가 탁 트이며 나무로 둘러싸인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풍경에 압도당한 로난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죽이는데.”

두 개의 보름달이 떠올라 있었다. 하나는 저 높이 하늘에, 하나는 잔잔하게 흔들리는 수면 위에서 빛을 흘리고 있었다. 연노랑 색으로 점멸하는 반딧불이들이 호숫가를 배회하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로난은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두 개의 달을 감상했다. 고된 여정 도중 누적된 피로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을 거야. 여기를 그냥 지나쳤을 리가 없어.’

나비로제도 여기에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낭만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때 어디선가 물장구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첨벙.

“응?”

로난이 멈춰 섰다. 물고기라기에는 소리가 컸다. 아마 야생 동물이 멱이라도 감으러 온 듯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는 무슨 동물이 살고 있으려나. 그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신이시여.”

로난이 얼어붙었다. 한 여인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몸을 씻고 있었다. 두 개의 달 사이에서 빛나고 있는 그녀의 나신은 장인이 가공한 대리석을 연상케 했다.

구릿빛 피부를 타고 흐르는 달빛이 아름다웠다. 물에 젖은 진회색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와 눌어붙어 있었다.

곡선으로 떨어지는 신체의 윤곽은 완연한 모래시계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멍청한 달이나 호수 같은 것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로난은 몸을 감추는 것도 잊은 채 그녀의 나신을 바라보았다.

‘태어나길 잘했어. 남부에서 태어났다면 더 행복했을 텐데.’

그가 한창 황홀경에 취해 있던 와중이었다. 촤아악! 별안간 수면 아래 감춰져 있던 나비로제의 오른팔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에는 대태도의 칼잡이가 꽉 쥐어져 있었다.

“어?”

왜 목욕할 때 칼을 들고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로난이 뭐라 반응하려던 찰나였다. 나비로제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태도를 휘둘렀다.

넓은 궤적이 로난이 서 있는 방향으로 그어짐과 동시에 거대한 검기가 쏘아져 나왔다. 쐐애액! 밤공기를 찢으며 날아오는 초승달의 모습에 로난의 눈이 커졌다.

“염병···!”

뒤늦게 정신을 차린 로난이 황급히 옆으로 몸을 굴렸다. 머리 위로 스치듯이 지나간 검기가 숲을 휩쓸었다.

콰아앙!! 나무 수십 그루가 동시에 토막이 나며 쓰러졌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나비로제가 눈을 부릅뜨며 으르렁거렸다.

“누구냐.”

“제, 젠장···보통은 쏘기 전에 말하지 않아요?”

엎드려서 목숨을 건진 로난이 고개를 들었다. 왼손이 비어 있었음에도 그녀는 딱히 몸을 가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로난과 눈이 마주친 나비로제가 검을 내렸다.

“···로난?”

“미안해요 교관님. 진짜 고의는 아니었어요.”

“거기서 뭘 하는 거냐.”

“그냥 물소리를 따라오다 보니···”

로난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불현듯 그의 시선이 나비로제의 배에 닿았다. 쇄골에서부터 배꼽 아래까지 기다란 흉터가 남아 있었다. 로난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음?’

물론 흉터가 있는 사실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헌데 그 형태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다섯 개의 큼직한 자상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어진 모습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날붙이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생긴지 그렇게 오래 된 것이 아니었다. 전장을 전전하면서 상처에 나름 조예가 깊은 로난은 저것이 기껏해야 몇 달 이내로 생긴 상처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상처는 뭐예요?”

“핫.”

“발톱? 설마 자이파가···.”

머릿속에서 퍼즐이 빠르게 맞춰지고 있었다. 나비로제는 그제야 수치심을 느낀 듯이 왼손을 들어 몸을 가렸다. 정확히는 상처를. 로난은 그녀가 알몸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천천히 호수 쪽으로 다가갔다.

“···들켰군.”

불현듯 나비로제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체념하듯 한숨을 그녀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거기서 기다려라. 내가 나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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