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65화 (165/333)

165. 검의 제전(8)

#165

“나는 애초에 놈을 쫓아 파르잔에 왔다네. 이대로 가다가는 모든 참가자가 위험해.”

러셀의 표정은 진지했다. 로난은 벙찐 채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생소한 정보가 연속해서 쏟아지는 탓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로난을 위아래로 훑은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네는 합격이야.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네. 자네 같은 인재가 몇 명만 더 있다면 놈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합격?”

“그래. 아까 보아하니 제국의 샛별과 나비로제 님도 계시던데, 친분이 있다면 부디 설득해 주시게. 사람들을 구해야 하지 않겠나.”

상관이라도 된 것 같은 태도였다. 제멋대로 사람을 끌고 나와서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던 걸로는 모자란 모양이었다.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안 되겠네. 이 새끼.’

거의 모든 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가장 열 받는 점은 자꾸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이었다. 정보의 진위성과 무관하게 버릇을 먼저 고쳐 놔야 할 것 같았다. 퉷, 바닥에 침을 뱉은 로난이 러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내 씨발, 어이가 없으려니까.”

“음? 자네?”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그는 러셀에게 검 끝을 겨냥한 채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당황한 러셀이 덩달아 칼을 뽑으려는 찰나, 로난이 낮게 쏘아붙였다.

“뒈지고 싶으면 뽑아 봐. 그 자리에서 머리를 떨어뜨려 줄 테니까.”

“가, 갑자기 이게 무슨···.”

“닥쳐.”

결국 기세에 압도당한 러셀이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로난이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러셀은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서야 했다. 결국 그들은 절벽의 끄트머리에 이르게 되었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게 된 러셀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도,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

“듣자 듣자 하니까 믿도 끝도 없네. 악마? 참가자들이 위험해? 그래, 전부 그렇다고 쳐.”

“커억!”

순식간이었다. 로난이 팔을 뻗어 러셀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가 팔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러셀의 다리가 지면에서 떨어졌다. 로난은 그 상태로 두 걸음을 더 전진했다. 발밑이 텅 빈 것을 느낀 러셀이 기겁하며 외쳤다.

“허어억! 자, 잠깐만···!”

“그런데 그딴 짓을 해놓고 사람들을 구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세우는 건 좀 너무하지 않냐? 이 개새끼야, 니가 투기장에서 한 짓 때문에 몇 명이 좆될 뻔 한지 알아? ”

“나, 나는···.”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어딜 어영부영 넘어가려 하고 있어.”

로난이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으르렁거렸다. 러셀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 쳐도 그의 행동은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로난이 조금만 실수했더라도 스물 네 명 중에서 상당수는 죽거나 병신이 됐을 터였다.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새끼가 고작 실력을 보겠다는 이유만으로 그따위 짓거리를 하다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었다.

“내, 내가 다 설명하겠네! 일단 이걸 좀···!”

러셀은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쳤으나 로난의 억센 팔뚝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꼭 강철로 만들어진 비단뱀이 목을 조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들은 로난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아, 그래. 놔 달라고?”

“헉···!”

로난이 손에서 힘을 풀었다. 러셀의 몸이 아래로 훅 내려갔다. 로난의 모습이 빠르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한순간 죽음이라는 두 글자가 그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끄아아아아악!”

바람이 귓가에서 포효했다. 러셀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단말마의 비명을 터트렸다. 순간, 무언가 몸을 휘감는 느낌과 함께 추락이 멈췄다.

“이, 이건···?”

천천히 눈을 뜬 러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반짝이는 나무뿌리 같은 것이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벽면을 타고 자라난 뿌리는 로난이 있는 절벽 위까지 이어져 있었다. 딱. 로난이 손가락을 튕기자 뿌리는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러셀을 절벽 위로 올려 놓았다. 로난의 발치에 나동그라진 러셀이 경기를 일으켰다.

“흐어···흐어어어···!”

“이제 정신을 좀 차리셨나?”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 온 러셀의 얼굴은 백지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로난이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석양을 받은 로난의 얼굴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러셀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두 번째 기회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미. 미안하네. 정말 미안해. 내가 실수했네. 복수심에 눈이 멀어서 그만···.”

“그렇지. 그런 제대로 된 동기가 나와야지.”

“···사적인 목적으로 그대를 이용하려 했었다는 걸 숨기지 않겠네. 제대로 실력을 보고 싶어서 많은 이를 위험에 빠트린 것도 나의 실책일세···내 반드시 그들에게 책임을 지겠네.”

러셀은 절을 하듯 땅에 머리를 처박은 채 자신의 죄를 실토하기 시작했다. 역시 공포는 최고의 자백제였다. 끅끅거리며 어깨를 들썩이던 그가 불현듯 고개를 쳐들었다.

“다만 자네에게 고한 것은 모두 진실이야! 악마가 참가자 모두에게 위협이 될 거라는 말도!”

“아, 씨. 깜짝이야.”

울먹이는 목소리에서는 진심만이 느껴졌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도 그를 방증했다. 슬슬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칼을 거둔 로난이 입을 열었다.

“이제 차근차근 말해봐 아저씨. 그 악마라는 놈은 누구고, 댁은 왜 그렇게 그 자식을 증오하는데?”

“···직접 보는 게 빠르겠지. 이걸 보게.”

별안간 러셀이 두건을 풀었다. 로난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왜 그가 피범벅이 된 상황에서조차 두건을 벗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러셀이 미안함이 묻어나는 투로 말했다.

“흉해도 조금만 참아 주게. 어차피 상처가 도져서 오랫동안 벗고 있지도 못하거든.”

“이건···.”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끔찍한 상처였다. 머리의 한쪽 모퉁이가 비스듬이 깎여나가 있었다. 검붉게 죽어가는 두피 아래로는 새하얀 두개골이 드러나 있었다.

로난은 두건의 안쪽에 웬 문자들이 적혀 있는 것을 눈치챘다. 아셀이 종종 읽는 마법서에서 몇 번인가 본 기억이 있었다. 아마도 두건을 쓰고 있는 동안 상처가 악화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인 듯했다. 그때 상처를 살피던 로난의 눈이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이건···?’

칼날이 지나간 단면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벌어진 러셀의 입에서 씁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악마에게 당한 상처라네. 벌써 삼 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남아서 나를 괴롭히고 있지. 이 상처를 입은 그 날, 나는 가족과도 같은 내 용병단을 잃었다네.”

“용병단? 당신 용병 출신이었어?”

“그래. 푸른 아치 용병단이라고···다란 왕국과 그 인근에서는 제법 이름을 날렸었지. 이미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러셀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가 이끄는 푸른 아치는 아직 미답의 유적이나 던전 탐사를 전문으로 하는 용병단이었다. 그들이 악마에게 전멸당한 것 역시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어느 유적이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네. 하얀 숲이었어. 풀과 나무는 물론 흙마저 창백한 백색을 띠었지. 그 저주받을 유적은 숲의 한복판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네.”

“거기서 놈을 마주친 건가?”

“그렇다네. 유적으로 진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지. 우리는 매끈한 금속으로 뒤덮인 복도를 걷고 있었어. 단원 모두 그런 양식은 본 적이 없는 터라 다들 감탄하고 있었다네.”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금속으로 뒤덮인 복도라니, 꼭 사막에 있던 다인하르의 심장부를 연상케 했다. 심호흡한 러셀이 말을 이었다.

“불현듯 복도 저 멀리서 웬 청년 한 명이 다가오더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는데 그 몰골이 끔찍했어. 얼굴을 포함한 전신의 피부가 뜯겨나가다시피 했고, 절뚝거리던 걸로 봐서 한쪽 다리도 불편했던 것 같았다네. 그 와중에 검 한 자루를 들고 있더군. 우리는 괜찮냐고 물어보기 위해 청년에게 달려갔고···그게 마지막이었다네.”

러셀은 짧막하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청년의 모습이 한순간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동료들의 팔다리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비명을 내지를 틈새조차 없었다. 널브러진 시체들의 모습을 묘사하던 러셀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건 싸움이 아니었어. 일방적인 학살이었지. 용병단이 전멸하는 데는 3분도 걸리지 않았어. 나를 제외한 모두가 죽었다네.”

“그렇다면 댁은 어떻게 거기서 살아 나온 거지?”

“그건···아아.”

별안간 러셀이 괴로운 듯 머리를 쥐어쌌다. 아마도 당시의 악몽에서 가장 어두운 부분인 듯했다.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이던 그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놈은 동료들을 전부 죽이지는 않았어. 무슨 이유인지 절반 정도는 숨을 붙여 놓더군. 나는 그들에게 내 오러를 사용했다네. 이성을 잃은 벗들이 시간을 끄는 동안 유적을 벗어났지.”

“씨발.”

로난의 미간이 좁혀졌다. 생각보다 더 끔찍한 이야기였다. 악마라는 놈을 죽이는 데 맹목적으로 집착하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나는 그날 이후 놈을 추격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네. 다시 발견한 것은 1년 전쯤이었는데, 놀랍게도 피부와 다리가 멀쩡해져 있더군.”

“다리까지?”

“그래. 도저히 나을 상태가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 이후로 러셀은 악마라는 사내가 저지른 패악에 대해 나열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끔찍한 것들뿐이었다. 나그네인 척 외진 마을에 방문해서 다음날 해가 뜨기 전에 주민을 죄다 참살하는 건 취미에 가까웠다. 이야기를 듣던 로난이 침음을 흘렸다. 살인을 습관처럼 저지르다니, 개새끼들 중에서도 상당히 위험한 유형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건 파르잔으로 향하는 길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는 모습이었다네. 마운틴 오우거를 단칼에 베어 버리더군. 놈은 나를 지옥에 빠뜨렸을 때보다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강해졌어.”

“···놈을 어떻게 잡으려고 했지?”

“최종 시험이 치러지기 전날 밤에 기습하려 했다네. 성지로 가는 마지막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아란 파르잔에서 온 합격자들과 합류해야 하니까. 자네 같은 강자가 시험에서 떨어질 리는 없고, 나 역시 거기까지 올라갈 자신은 있거든.”

러셀은 검의 제전의 마지막 시험은 고정되어 있다고 말했다. 산의 북쪽과 남쪽에 세워진 두 개의 마을, 그란 파르잔과 아란 파르잔의 합격자들이 서로 대련을 벌이는 것이었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때가 적합한 시기였다.

“어쨌든···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라네. 여러모로 폐를 끼쳐서 미안하군.”

이야기를 마친 러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법이 각인된 두건을 다시 꼼꼼하게 머리에 감았다. 불현듯 로난이 그를 멈춰 세웠다.

“잠깐만.”

“음? 왜 그러나?”

“두건 다시 벗어봐. 그리고 다른 상처 없어?”

“으음···?”

“놈에게 당한 거 말이야. 머리에 그거뿐이야?”

러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난의 시선은 여전히 그의 머리에 머물러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분명 본 적이 있는 검흔이었다.

“있기는 하다만···.”

“보여줘.”

로난의 목소리가 확고했다. 러셀은 영문도 모른 채 상의를 훌렁 벗었다. 잘 단련된 몸은 수십 개의 흉터로 뒤덮여 있었다. 오랜 용병 생활의 풍파가 새긴 흔적들이었다.

“자, 여기 보면 등 쪽에···”

“말 안 해도 아니까 기다려봐.”

로난은 악마에게 당한 상처를 알려 주려던 러셀을 저지했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검흔은 보기 드물었다. 머지않아 로난은 왼쪽 날개뼈에서 허리까지 이어진 자상을 확인했다. 흉터를 검지로 쓸어 만진 그가 입매를 뒤틀었다.

“역시···.”

“왜, 왜 그러나?”

러셀이 당황 섞인 목소리로 물었으나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검흔을 어디서 봤는지 떠오르고야 만 것이다. 부슬비가 내리던 숲. 빗물과 뒤섞여 흐르는 피. 구덩이 속에 숨어든 채 몸을 떨고 있던 웨어라이온 한 마리.

얼마 전에 참살당한 여명 부대원들의 시체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틀림없이 세 종류의 검흔 중 하나였다. 겁에 질린 소령이 했던 말을 떠올린 로난이 입을 열었다.

“어이, 아저씨.”

“으응?”

“그 악마라는 놈 인상착의가 어떻게 돼?”

“인상착의라···? 흐으음···그러니까 얼굴은 평범한 편이고···.”

러셀이 침음을 흘렸다. 이걸 어떻게 요약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불현듯 놈의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오기 전부터 건재했던 특징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의 입이 벌어졌다.

“···머리가 희고, 눈은 불그스름한 황색을 띠었다네. 흔치 않은 색 조합이라 기억하고 있었지. 그러고 보니 눈 색은 자네와 비슷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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