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검의 제전(10)
#167
아침이 밝았다. 주최 측에서 미리 공지한 바와 같이 세 번째 시험은 동이 터 오를 무렵부터 시행되었다. 막 잠에서 깬 참가자들이 눈을 부비며 집결 지점에 모였다. 그들이 숨을 쉬거나 말을 할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허공에서 바스라지고 있었다.
“으으, 추워. 성지는 도대체 얼마나 추운 거야?”
“여기는 완전히 겨울이네.”
두 번째 거점은 산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계절이라는 개념은 서서히 희미해졌다. 그를 반증하듯 안내인들의 복장이 두터운 가죽옷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무언가를 열심히 나르고 있었다. 대부분은 거대한 상자였는데, 고기나 야채 등의 식재료가 엄청나게 들어 있었다.
“오늘 저녁인가?”
“그렇다기에는 양이 너무 많은데.”
이질적인 광경을 본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각종 장비까지 동원해서 옮기는 것이 식당이라도 새로 차릴 기세였다. 그때 남들보다 조금 더 좋은 외투를 걸친 여인이 군중 앞으로 나섰다. 이번 시험의 안내를 총괄하는 사람인 듯했다. 짝! 손뼉을 쳐서 주의를 끈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다들 좋은 아침입니다. 벌써 세 번째 시험이군요. 오늘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참가자에게는 최종 시험에서 사용할 수 있는 우선 지명권이 주어질 예정입니다.”
“우선 지명권?”
“네. 다들 아시다시피 최종 시험은 그란 파르잔에서 올라온 참가자들과의 대련입니다. 원래는 무작위로 상대가 배정되지만, 우선 지명권이 있다면 상대를 선택하여 대련할 수 있습니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이건 예상치 못한 소득이었다. 아무래도 첫 번째 시험에서 남는 검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처럼 의욕을 증진하기 위한 수단인 모양이었다. 그와 러셀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거리가 떨어져 있었기에 그들은 입 모양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
- 자네···이건···!
- 운이 좋네. 기습 같은 헛짓거리는 안 해도 되겠는데.
- 자, 자신 있는 건가?
- 일단은 해 봐야지.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어떻게 맞붙어야 할지가 고민이었는데 잘 된 일이었다. 다만 다른 참가자들의 눈 속에서 불길이 일렁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명권을 노리는 것은 그뿐만이 아닌 듯했다.
“사실상 성지행 티켓이군.”
“크헤헤, 이거 좋은데.”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자신보다 적당히 약해 보이는 사람을 지명한다면 편하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니까. 재차 손뼉을 쳐서 군중을 조용히 시킨 안내인이 덧붙이듯 말했다.
“또한 이번 시험에서는 조나 진영을 나누지 않을 예정입니다. 참가자들끼리 검을 맞대는 일도 없을 거고요. 생소한 시련이 되겠지만, 부디 건투를 빕니다.”
다시금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앞서 시행했던 두 시험과는 영 판이했다. 안내인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참가자들은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쨌든 잘 된 거 아냐? 우리끼리 나름 정도 들었는데.”
“맞아 맞아. 그렇지.”
대다수의 참가자는 새로운 시험의 방향성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경쟁자라 하더라도 며칠씩 부대끼며 생사의 갈림길을 넘기다 보면 정이 들기 마련이었다. 종국에는 진짜 중요한 것은 아란 파르잔과 겨루는 최종 시험이고, 세 번째 시험은 사실 명목 뿐인 허수아비 시험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돌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받아라!”
“취엑!”
전신 갑옷을 입은 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브로드 소드가 호선을 그림과 동시에 오크의 머리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절단면이 그의 칼솜씨를 반증했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오크들이 당황하며 물러섰다.
“취이익! 취익!”
그가 상대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개체보다 크고 흉폭한 블랙 오크들이라는 점도 명예를 드높여 주었다. 머지않아 두려움을 떨쳐낸 오크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기사는 방패와 검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멋지게 받아쳤다. 관중석을 메운 참가자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힘내라! 폭스 나이트!”
“수인의 저력을 보여 줘!”
투기장의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바닥에는 이미 블랙 오크 네 마리와 자이언트 울프 한 마리가 피를 흘리며 널브러져 있었다. 몬스터들의 수로 보아 지금까지 나온 참가자 중 최고 성적이었다. 그때 돌부리에 발이 걸린 기사가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어엇!”
“취에엣!”
그는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았으나 오크들은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사각에서 날아온 글레이브가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깡! 둔탁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찌그러진 투구가 튕겨 나가듯이 벗겨졌다.
“크윽!”
붉은 여우의 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폭스 나이트라는 이명에 걸맞는 잘 생긴 웨어폭스였다. 재빠르게 균형을 잡은 폭스 나이트가 검을 내질렀다. 푹! 예리한 칼끝이 자신을 공격했던 오크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심장을 관통당한 오크가 즉사했다. 그때 둘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관중 하나가 기겁하며 외쳤다.
“폭스 나이트! 조심해!”
폭스 나이트가 고개를 들었다. 머리가 두 개 달린 오우거가 그의 앞에서 벽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눈을 끔뻑이던 오우거가 팔을 치켜들었다. 바윗덩이 같은 손에는 아름드리 참나무를 그대로 뽑아서 만든 몽둥이가 쥐어져 있었다.
“크워어어억!”
“젠장, 검이···!”
폭스 나이트는 곧장 몸을 빼려 했으나 오크에게 박힌 검이 뽑히지 않았다. 그의 머리 위로 몽둥이가 떨어졌다. 늦었음을 자각한 폭스 나이트가 황급히 방패를 들어 올렸다. 마나로 강화된 방패가 환한 빛을 내뿜었다.
“와라! 이 괴무···”
폭스 나이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콰직! 그대로 방패를 짓누른 몽둥이가 바닥을 강타했다. 금속과 뼈, 살이 뭉그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트윈 헤드 오우거가 몽둥이를 들어올렸을 때, 폭스 나이트와 오크는 붉고 끈적한 얼룩이 되어 바닥에 눌어붙어 있었다.
“크워어어어어!!”
두 개의 머리가 승리의 함성을 터트렸다. 신이 난 오우거가 몽둥이를 돌릴 때마다 곤죽이 된 웨어폭스의 일부가 진눈깨비처럼 뿌려졌다. 육편 세례를 당한 참가자들이 기겁했다. 머리에 붙은 창자 조각을 떼어낸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우웩. 저대로 들고 가서 카페트로 써도 되겠는데.”
“무모한 판단이었다.”
슐리펜도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두 사람 모두 안쓰러움을 표하기는 했지만 동정심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본인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자의 말로였다.
“저 실력이라면 오우거나 오크 둘 중 하나만 상대했어야 했다. 욕심이 과했어.”
“오우거를 골라도 머리 두 개 달린 놈을 고르면 안 됐지. 그나저나 저걸 다 어디서 잡아온 거야?”
몬스터들을 지켜 보던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세 번째 시험은 산 내부를 깎아 만든 투기장에서 진행되었다. 첫 번째나 두 번째 시험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규모가 거대했다.
시험 내용은 대륙 각지에서 공수해온 몬스터를 잡는 것이었다. 가장 약한 고블린부터 만티코어나 오우거처럼 강력한 몬스터도 준비되어 있었다.
참가자들은 한 명씩 나와서 상대할 몬스터의 수와 종류를 지명해야 했다. 한 마리부터 최대 백 마리까지 고를 수 있었고, 처치한 수나 개체의 난이도에 따라 점수가 정해졌다. 상위 20명만 합격할 수 있었으니 위험한 몬스터를 많이 잡을수록 합격할 확률이 높아졌다.
“그러고 보니 자기들끼리는 안 잡아먹나? 오우거가 가만히 있네.”
“아마 마법이 걸려 있겠지. 여러모로 굉장한 정성이 들어간 시험이군.”
슐리펜이 기가 막힌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온갖 사치를 누리고 자란 그랑시아의 소공작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말은 다 한 셈이었다. 폭스 나이트를 묵사발 낸 몬스터들은 알아서 우리로 들어갔다.
그 많은 식량을 어디에 썼는지도 알 것 같았다. 우리의 문이 닫히자 진행위원들이 나와 시체를 수습했다. 피와 내장으로 구성된 진창에서 뼛조각을 박박 긁어내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뒤처리가 끝난 것을 확인한 감독관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또 한 명의 전사가 피를 바쳤군요. 실제로 해당 시험은 아주 많은 사망자를 내는 시험입니다. 부디 자신의 기량을 잘 파악하셔서 올바른 선택을 했으면 좋겠군요.”
감독관이 짧게 묵례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시험에 응한 여섯 명 중 셋이 목숨을 잃었다. 대기자들을 둘러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음 순서는···44번입니다.”
“나네.”
로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행 중에서는 첫 번째였다. 나비로제가 덤덤하게 말했다.
“무모한 짓만 하지 마라.”
“설마 제가 그러겠어요.”
로난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투기장으로 내려갔다. 직접 서 보니 정말로 넓었다. 특급 모험 동아리의 훈련장의 두 배는 족히 넘을 것 같았다. 불현듯 로난의 앞에 반투명한 환영이 떠올랐다. 감독관이 말했다.
“그럼, 지명할 몬스터와 수를 정해 주십시오.”
눈앞에서 몬스터들의 모습이 차례대로 지나갔다. 백 마리라니, 동물원을 차려도 될 것 같았다. 로난은 볼 것도 다는 듯이 고개를 휘저었다. 그가 감독관을 올려보며 말했다.
“전부.”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백 마리 다 지명한다고요. 가장 위험한 놈부터 순서대로.”
로난의 목소리는 또랑또랑하게 울려 퍼졌다. 나비로제의 미간이 급격하게 구겨졌다. 관중석이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너.”
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매사에 태연하던 그녀도 당혹을 금치 못했다. 일행을 슬쩍 돌아본 로난이 브이 자를 들어 보였다. 벙쪄 있던 감독관이 당혹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진심입니까?”
“네.”
로난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이 시작되자마자 염두해두고 있었다. 비단 우선 지명권을 확실히 얻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도 어지간한 잡놈인가 봐.’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러셀에게 악마에 대한 정보를 들은 뒤부터 계속 이 모양이었다. 강자와의 싸움이 예상될 때마다 발병하는 로난의 고질병이었다. 심호흡한 로난이 칼자루를 매만졌다. 이러면 조금이나마 상태가 나아졌다. 문득 자신과 꼭 닮은 배신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역시 나는 그 자식의 핏줄인가?’
어쩌면 유전적인 질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의 삶을 살아왔음에도 이 감정에 붙여야 할 이름을 아직 찾지 못했다. 투쟁심? 기대감? 아니면 극도의 긴장으로 인한 전율? 사실 뭐가 됐든 상관 없었다. 어차피 불을 끄는 방법은 하나뿐이었으니까.
“하아···알겠습니다. 백 마리, 준비해 주세요.”
한숨을 푹 내쉰 감독관이 손짓을 보냈다. 위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인 지 머지않아 우리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도르래가 움직이며 울려 퍼지는 소리는 마치 태고의 야수가 그르렁거리는 것처럼 비장하게 느껴졌다. 수백 개의 안광이 저 어둠 속에서 번득이고 있었다.
“돌아 버린 거 아냐?”
“로난! 우리 기사단에 오기로 했잖나! 멍청한 짓 그만 둬!”
“잘 됐어. 저 재수 없는 새끼, 꼴도 보기 싫었는데.”
관중석은 여전히 부산스러웠다. 경악과 조롱, 만용 끝에 사그라들 목숨을 위한 추모사가 귓가를 간질였다. 정체 모를 흥분은 여전히 심장을 불사르고 있었다. 피가 필요했다. 불을 끌 피가.
“그럼, 44번 참가자의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감독관의 말과 함께 우리의 문이 완전히 열렸다. 이중으로 문을 가로막던 방어막이 사라졌다. 백 마리의 몬스터가 해일과 같은 기세로 쏟아져 나왔다. 입꼬리를 한 번 끌어 올린 로난이 몬스터들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너희가 좀 식혀 줘야겠다.”
백 개의 포효가 관중석에서 들려오던 잡음을 집어삼켰다.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