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73화 (173/333)

173. 검의 제전(16)

#173

“···시험 종료.”

알로긴이 읊조렸다. 나비로제는 그제야 대태도를 검집에 집어넣었다. 승자가 정해졌음에도 투기장은 여전히 적막에 빠져 있었다. 남아 있는 연기가 벽과 천장의 환기구를 통해 빠져나가고 있었다.

-짝짝짝.

그때 어디선가 박수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손바닥과 손바닥이 맞닿으며 나는 소리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머지않아 투기장 전체가 소란스러워졌다. 뒤늦게 말문이 트인 사람들이 머금고 있던 말을 쏟아냈다.

“대, 대단해. 정말 대단해···!”

“오러를 쓰지 않아도 저 정도라니···솔직히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퇴보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나저나 저거 정말 폭류검이었소? 어떻게 들어온 거지?”

몇몇 참가자들은 몸까지 일으켜 가며 손뼉을 쳤다. 나비로제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덤덤하게 환호에 응했다.

더할 나위 없이 영예로운 광경이었으나 몇몇 사람들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슐리펜을 비롯하여 아직 고결함을 간직하고 있는 참가자들이었다.

폭발에 휘말린 탓에 의복의 상당 부분을 손실한 그녀는 의도치 않게 자신의 신체적 우월함을 뽐내고 있었다. 막상 본인은 별 관심도 없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보다 못한 로난이 자신의 외투를 벗어 던지며 외쳤다.

“젠장, 좀 가려요. 다 큰 여자가 뭐 하는 거야?”

“호들갑은.”

옷을 받아든 나비로제가 픽 웃었다. 그녀가 외투를 걸치는 순간 곳곳에서 작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의 체격 차이가 크게 나서 외투만으로 허벅지 아래까지를 가릴 수 있었다.

쓰러진 노드렉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배 아래로 드리운 검붉은 웅덩이가 서서히 넓어지고 있었다. 들것을 든 진행 위원들이 노드렉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로긴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에야 확신했소. 설마 정말로 폭류검이었을 줄이야.”

“저런 쓰레기가 40년 동안 검성으로 군림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군. 기대했건만.”

“누누이 말하지만 당신과 전대 검성이 이상하리만치 강한 거요. 그나저나 끝끝내 만사를 꺼내지 않고 제압하다니. 감탄스럽군.”

“지당한 결과다.”

“헌데···겉모습만 변했을 뿐이라면, 어떻게 우리의 감시망을 뚫었던 걸까.”

알로긴의 주름이 한층 깊어졌다. 위장한 폭류검이 어떻게 마지막 시험까지 들어올 수 있었는지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비싼 값을 치르고 심문용 마도구를 대량으로 구비한 것이거늘.

적어도 자신이 원로로 있는 동안은 파르잔의 감시망을 걸러낸 참가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턱을 매만지던 와중이었다. 뒤쪽에서 웬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기억 봉인술일 거야.”

자이파와 알로긴이 동시에 몸을 돌렸다. 웬 아담한 소녀 한 명이 자이파의 발치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풍성한 백발을 본 알로긴은 그녀가 참가자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너는 분명 부전승을 한···.”

“안녕. 호랑이도 안녕.”

린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인사했다. 그녀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자이파의 꼬리를 붙잡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자이파가 꼬리를 그녀의 정수리 위에 얹으며 말했다.

“기억 봉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야. 목적만 남긴 채 자신이 누군지에 대한 기억을 일시적으로 잠궈 두는 거지. 그러면 자신에 대한 답변을 실제와 다르게 말하더라도 거짓말이 아니게 되기 때문에 어지간한 심리 감정 마법은 통과할 수 있어. 아마도 우리 공주님을 보는 순간 봉인이 풀리도록 마법을 설계해 놨겠지.”

“···공주님?”

자이파와 알로긴이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의 시선은 동시에 얼굴에 피를 뒤집어쓴 나비로제를 향했다.

린은 폭류검이 정체를 감춘 채 여기까지 올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야만성과 특유의 성미를 봉인한 뒤 교활하고 이성적인 면모만 남겼기에 폭류검은 노드렉이라는 참가자를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설마 폭류검 본인일 리는 없다는 선입견 또한 그의 침투를 원활하게 했다. 알로긴이 납득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나비로제 님을 만난 뒤부터 사람이 변했었지. 너는 그런 걸 어떻게 안 게냐.”

“그냥 잡지식이야. 오래 살다 보면 자연스레 익히는 그런 거. 아주 옛날에 그렇게 해서 참가한 놈이 또 있었거든.”

“아주 옛날?”

오래 살았다는 말을 들은 알로긴이 갸웃거렸다. 눈앞의 소녀는 기껏해야 십대 초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끝내 자이파의 꼬리를 잡아낸 린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까웠지. 너희도.”

“음···?”

자이파의 귀가 쫑긋거렸다. 매우 작은 크기라 속삭임을 들은 것은 그뿐이었으나 자이파는 굳이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캐묻지 않았다. 자이파의 꼬리를 실컷 만지던 린은 등을 돌려 로난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알로긴이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기묘한 소녀군···그래, 조사하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슬슬 다음 시험을···”

“잠깐.”

“왜 그러시오?”

알로긴이 물었다. 자이파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직감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만신창이가 된 노드렉이 들것에 실려서 퇴장하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주둥이 사이로 그의 송곳니가 드러났다.

“역겨운 풋내가 나는군.”

“그게 무슨···.”

알로긴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불현듯 누워 있던 노드렉이 상체를 일으켰다. 끈적한 선혈이 벌어진 상처 속에서 터져 나왔다. 그를 호송하던 진행위원들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세상에, 깨어났어···!”

“어, 어서 다시 누우시오. 상처가 심각하오!”

노드렉은 대답하지 않았다. 몸이 얼음물에 담갔다가 뺀 것처럼 차가웠다. 손발 끝의 감각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눈치챈 그가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어서 누우라니까. 일단은 살아야 할 것···”

의료진이 그를 눕히려던 차였다. 한순간 노드렉의 손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그를 호송하던 위원들의 머리가 동시에 폭발했다. 퍼벅!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저, 저기 봐! 의료진들이!”

“뭐야, 살아 있었어?”

한발 늦게 시선을 돌린 나비로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새 검을 뽑아든 노드렉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머리 없는 시체들을 본 나비로제가 노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 쓰레기가.”

심문을 위해 몸을 완전히 토막내지 않은 탓이었다. 나비로제는 곧바로 땅을 박차며 노드렉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노드렉의 어깨 위로 폭발하듯 솟구쳣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용오름치는 마나 속에서는 새하얀 섬광이 빠른 간격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상징인 반짝임이었다.

“드디어.”

자이파와 시선을 교환한 로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비로제는 순식간에 노드렉의 목전에 도달했다. 칼을 뽑아든 그녀의 몸이 크게 회전했다. 마나로 된 꼬리가 검로를 따라 늘어졌다. 진녹색으로 달아오른 대태도는 산맥이나 빙하조차 통째로 베어 버릴 것 같았다. 검신이 노드렉에게 닿으려는 찰나였다. 카아아앙! 무언가에 가로막힌 대태도가 튕겨 나가며 고막을 찢어발길 듯한 금속음이 작렬했다.

“이건···!”

“인정하지···커윽, 내 불찰이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진작에, 썼어야 했는데···.”

노드렉이 피를 토하며 중얼거렸다. 대태도 우루사가 허공에 정지해 있었다. 기름띠처럼 일렁이는 기괴한 장막이 노드렉의 몸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황급히 자세를 다잡은 나비로제가 재차 검격을 날렸지만 정체불명의 방어막에는 실금조차 가지 않았다. 거인의 권능 중 하나인 별의 가호였다. 관중석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방어막? 마법인가?”

“아냐, 달라. 친척이 여명 부대라서 들었어. 저건 분명 네뷸라 클라지에라는 놈들의···.”

문득 나비로제는 그의 상처에서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내장까지 헤집어 놓았던 자상은 어느새 얕은 생채기로 변해 있었다. 보다 하얘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노드렉이 말을 이었다.

“가급적이면 온전한 내 힘만으로 만 상대하려 했건만. 어쩔 수 없지.”

“폭류검.”

“다 같이 죽어라.”

창백하던 혈색도 완전히 돌아와 있었다. 양손으로 칼자루를 움켜쥔 노드렉이 검으로 바닥을 찍었다. 파아아···! 새하얀 빛무리가 지면에 난 균열 사이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위기를 직감한 나비로제가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당한다. 나뿐만이 아닌 모두가.’

나비로제가 헛숨을 들이켰다. 막거나 흘려 보낼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대폭발을 예고하는 섬광에서는 눈앞의 방어막과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이번 폭발은 틀림없이 투기장 전역을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릴 터였다. 과부하에 걸린 머리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여 보기 위해 돌진하려던 차였다. 익숙한 청년 하나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착지했다.

“멈춰라. 이 개새끼야.”

“너···!”

나비로제의 눈이 커졌다. 기골이 장대한 청년의 손에는 칼자루부터 검신까지 온통 새카만 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로난이 노드렉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셨군. 이 정도면 모두가 봤겠지.”

“뭐 하는 짓이냐! 당장 비키지 못해!”

나비로제의 목에 핏줄이 솟았다.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노드렉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섬광이 투기장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지금껏 보아온 것과는 격이 다른 폭발이 그를 중심으로 작렬하려 하고 있었다. 나비로제가 외쳤다.

“로난!!”

“제자를 좀 믿어 봐요.”

로난이 칼자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농후한 진홍빛이 라만차를 물들였다. 그는 한 바퀴를 넓게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간만에 시도하는 나비로제의 회전검이었다. 시야를 뒤덮던 백색의 한복판에 검은 선이 생겼다. 한 바퀴를 회전한 로난이 멈추는 순간이었다. 촤아아악! 터질 듯이 맥동하던 마나가 형체를 잃고 흩어졌다. 진원지에 있던 노드렉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돼는···!”

“안 되긴 뭐가 안 돼.”

로난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오러의 본질도 결국은 마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곧바로 한 바퀴를 더 회전하며 검기를 발현했다. 직선으로 날아간 붉은 초승달이 별의 가호 위에 직격했다. 콰장창! 기괴한 방어막이 유리라도 된 것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나비로제가 경악했다.

“로난, 너···!”

“끝내주죠.”

로난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별의 가호마저 잃어버린 노드렉이 당황하며 주춤거렸다. 그때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단상 위에서 뛰어올랐다. 소리 없이 노드렉의 앞에 착지한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여명 부대의 선봉대장 자이파 터르겅이다.”

“네놈은···!”

“물어볼 게 있다. 노드렉. 아니, 폭류검 크로겐.”

“뭐라?”

노드렉이 눈썹을 치켜떴다. 머리가 한참이나 위에 있어서 고개를 높이 들어야 했다. 수박도 사과처럼 집을 수 있는 손에는 기둥을 연상케 하는 언월도가 쥐어져 있었다. 나비로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고양이가 갑자기 왜···”

“교관님 잠깐만. 지금은 저 사람 차례에요.”

“그게 무슨 소리지?”

나비로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노드렉을 내려보던 자이파가 말을 이었다.

“저번 달 열하룻날에 벌어진 일이다. 네가 내 부하들을 죽였나.”

“내가 알 게 뭐냐. 썩 꺼져라, 애송아!”

노드렉은 자이파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팔이 흐릿하게 사라짐과 동시에 자이파의 가슴 위로 붉은 선이 그어졌다. 촤악! 붉은 선혈이 검흔 위로 튀어 올랐다. 로난과 나비로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자이파?!”

“젠장, 저 무식한 호랑이가.”

로난이 질색했다. 새로운 상처는 나비로제가 남긴 흉터와 정확히 교차하며 그어졌다. 척 보기에도 깊은 상처였지만 자이파는 고통스럽다는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되려 참격을 날린 노드렉이 당황에 빠졌다.

“무슨 몸이···!”

살이라기보다는 암석을 베는 것 같았다. 당혹한 노드렉이 재차 검을 휘둘렀다. 캉! 자이파는 언월도를 들어 올리며 가볍게 공격을 막았다. 노드렉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한 번의 합만으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임을 있었다. 굳어서 움직일 수 없는 그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오냐, 괜히 검성이 된 건 아니구나. 제법 재밌어 보이니 특별히 네놈 먼저 상대해 주마. 내가 거기서 어떤 힘을 받았는지 알면 네놈들 따위늙."

나불거리던 노드렉이 오러를 끌어모으는 순간이었다. 불현듯 팔을 치켜든 자이파가 언월도를 내리쳤다. 노드렉은 황급히 검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으나 언월도는 그대로 검을 두 동강내며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검게 물든 칼날이 그의 정수리를 파고들었다.

“걱.”

단말마는 없었다. 정수리부터 고간까지 갈라진 시체가 양옆으로 벌어졌다. 철퍽. 두 동강이 난 노드렉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릇을 잃은 내장이 주르륵 쏟아져 나왔다.

“······!”

부산스럽던 투기장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자이파는 가슴의 상처를 손바닥으로 한번 문질렀다가 뗐다. 새카만 육구 위로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뭐라 중얼거리던 자이파가 다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천천히 몸을 돌린 그가 로난과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다. 범인이 확실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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