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검의 제전(17)
#174
“···네 말대로다. 범인이 확실하군.”
자이파가 말했다. 반 토막 난 노드렉의 시신이 그의 발치에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가슴팍의 자상을 본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시발, 꼭 그딴 식으로 확인해야 했어? 빨리 가서 치료해.”
“이 정도는 괜찮다.”
자이파가 고개를 내저었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검증이었다. 물론 검흔이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만한 방법도 없을 터였지만 좀 심했다. 시커먼 털 위로 붉은 피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말을 이었다.
“···일격이었다.”
“엉?”
“나는 이 벌레를 일격에 두 동강 냈다. 걸린 시간을 따지자면 넉넉잡아 일 초 정도 되겠군.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 것 같나.”
눅진한 슬픔이 붉은 눈동자 저편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별안간 안주머니를 뒤적이던 자이파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길고 가느다란 가죽끈에 금속으로 만들어진 납작한 표찰 수십 개가 꿰어져 있었다. 로난과 나비로제의 눈이 커졌다. 제국군에게 지급되는 인식표였다.
“내가 일 초만 부하들의 곁에 있었어도, 그따위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란 소리다.”
절그럭거리는 쇳소리가 구슬펐다. 로난은 뭐라 한 마디를 하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음에도 참격을 허용한 것은 그 나름대로의 추모이자 속죄였다. 아랫입술을 짓씹던 로난이 괜스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공범이 있었지. 두 명이 더 있던가.”
“그래. 이 새끼보다 칼을 더 잘 쓰는 놈들이야.”
“여름이 오기 전에 전부 잡아야겠군. 협조할 생각이 있다면 나를 찾아와라.”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저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하루빨리 잡아 족칠 예정이었다. 인식표를 집어넣은 자이파가 나비로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더 예리해졌더군. 오러는 여전히 발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네놈이 어떻게 그걸···!”
“그 정도는 척 보면 안다. 경의를 표하는 것을 대신해서 조언 하나 하지.”
나비로제는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자이파가 한층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삶이란 폭풍을 헤치며 걷는 일이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무수히 많은 상처를 입게 되고, 그중에서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흉터로 남는 것도 있지. 연달아서 나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이 네게 그런 흉터가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흉터를 없앨 수는 없다. 그건 말 그대로 흉터니까. 다만 그것을 어떻게 대할지 정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별안간 자이파가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너덜너덜한 옷 너머로 기다란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나비로제가 남긴 칼자국이었다. 언월도를 허공에 휘둘러 피를 털어낸 그가 나비로제에게 악수를 건넸다.
“나는 한 번도, 이 흉터가 수치스러웠던 적이 없다.”
“···너.”
고개를 들어올린 나비로제가 자이파를 노려보았다. 저 호랑이가 워낙에 멋진 말을 해서 그런가, 평소에는 언제나 어른으로 보이던 그녀가 할아버지의 앞에 선 손녀처럼 보였다. 잠시 주저하던 나비로제가 자이파의 손을 맞잡았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가벼운 악수를 마친 자이파가 등을 돌렸다.
“그럼 세 번째 도전을 기다리고 있겠다. 전대 검성.”
자이파는 그 말을 남기고 훌쩍 뛰어올랐다. 착지할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그는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원래 서 있던 단상에 도달했다. 로난은 알로긴과 대화를 나누는 자이파에게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교관님이 말한 것처럼 위험해 보이지는 않는데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기는 했군. 결국 모든 증오는 시간 앞에 사그라드는 건가.”
“증오라···도대체 자이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로난이 물었다. 전부터 궁금하던 차였다. 도대체 과거에 자이파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리도 경고했던 걸까. 그가 직접 만난 자이파는 적어도 송곳니의 밤을 일으킬 전범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로난을 빤히 바라보던 나비로제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네가 직접 물어봐라. 둘이 술을 마실 정도로 친하지 않느냐. 생각해 보니 나랑도 둘이 마신 적은 없었지.”
“아, 또 왜 어른이 그런 걸로 삐지고 그래요. 유치하게.”
“삐지지 않았다.”
그녀는 로난을 뒤로 한 채 성큼성큼 투기장에서 퇴장했다. 그제야 눈치를 보던 진행 위원들이 달려와 노드렉의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대칭으로 예쁘게 쪼개진 시체는 오래 볼 만할 것이 못 됐다. 로난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그들이 내장을 빗자루로 쓸어 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감독관을 맡은 알로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자네는 안 나가나?”
“어차피 제 차례잖아요. 저, 우선 지명권 있어요.”
“그렇기는 하다만···자네도 몸을 좀 추스르지 그런가. 큰일을 겪었는데.”
“됐어요. 후딱 끝내고 쉬는 게 낫지. 지명할게요.”
아란 파르잔의 참가자들을 돌아본 로난이 손가락을 뻗었다. 물론 고른다기보다는 그냥 아무나 가리킨 것이었다. 우연히 그의 검지와 직선상의 경로에 있던 사내가 헛숨을 들이켰다. 전신 갑옷을 입은, 나름대로 강해 보이는 기사였다. 로난이 귀찮다는 듯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내려오쇼.”
“으음! 이 무뢰배가 감히···!”
기사가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투기장으로 내려갔다. 그가 아이처럼 비명을 지르며 항복을 선언하기까지는 정확히 3분하고도 12초가 소모되었다.
“흐어어억! 내, 내가 잘못했네! 부디 자비를!”
“거 무뢰배라 죄송하게 됐수다. 아무리 잘 배워도 근본은 안 바뀌나 봐.”
사내는 주 무기인 장창까지 내던져 가며 달아났다. 알로긴의 승자 선언을 들은 로난이 칼을 집어넣었다. 이후로도 마지막 시험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반은 떨어졌고, 반은 붙었다. 반으로 쪼개진 노드렉을 제외하고는 죽은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승리를 거두기까지 정확히 44초를 소모한 슐리펜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후후···아깝군, 로난.”
“돌겠네. 원래 잘난 사람들은 다 그렇게 유치하냐?”
로난이 질린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시작하자마자 폭풍검을 발현하는 게 이상했는데 이걸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그랑시아의 미래가 심히 걱정되었다.
지금까지의 점수를 합산한 결과 로난과 슐리펜 두 사람이 공동 1등이었다. 로난은 자이파에게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슐리펜에게 양도했다. 어차피 본인은 엊그제 동굴 안에서 실컷 싸웠기 때문에. 그와 몇 합을 겨룬 자이파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흐음, 내가 본 것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오러군. 나를 뛰어넘을 잠재력이 보여.”
“감사합니다. 검성.”
“딱히 조언할 건 없으니 계속 정진해라. 너희 두 사람 중 누가 차기 검성이 될 지 궁금하군.”
로난과 슐리펜을 번갈아 쳐다보던 자이파가 만족스레 미소 지었다. 드러난 송곳니가 새하얗게 반짝였다. 한창 우울할 와중에도 저러는 걸 보니 정말로 기쁜 모양이었다.
“그럼 이것으로 최종 시험을 종료하겠네.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일세. 파르잔은 그대들이 바친 피와 철을 영원히 잊지 않을 거라네.”
시험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단상에서 내려온 알로긴이 한명 한명과 악수를 나누었다.
합격자들은 거점으로 돌아가고 탈락자들은 산 아래로 내려갔다. 투기장을 벗어나자 하늘의 끝에서 끝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은하수가 보였다. 로난은 이 길었던 여정이 끝나간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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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난은 식사를 마친 뒤 숙소로 돌아왔다. 먼저 돌아온 슐리펜이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지독한 놈. 표정 하나 한 변한 거 봐라.’
막상 칼을 휘두른 시간은 짧았지만 많은 일이 벌어져서 그런지 정신적인 피로가 상당했다. 곧바로 침대에 드러누운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드디어 내일이구만. 필레온에 있는 놈들은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별일 없을 거다. 다만 이릴 양이 걱정되는군.”
“호위를 그렇게 붙여 놓고도 유난은. 그냥 보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해 인마.”
슐리펜은 대답하지 않았다. 붉게 달아오른 귀가 퍽 우스웠다. 사실 로난도 황제에게 호위를 약속받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안심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는 식당에서 알로긴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노드렉의 부검을 마친 결과 그가 정말로 폭류검 크로덴이라는 사실이 확정되었다. 생각이 복잡해진 로난이 침음을 흘렸다.
‘다 죽어가는 놈을 살린 이유는 써먹기 위해서라 쳐. 그런데 기억 봉인술까지 써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뭐였을까. 머리카락이랑 눈은 또 왜 그렇게 된 거고?’
급한 불은 껐으나 아직 많은 것이 의문스러웠다. 노드렉은 지금까지 보아온 네뷸라 클라지에와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좆 같은 새끼인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기분 나쁘게 좆 같다고 해야 하나. 본질적인 면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역시 닮았어. 느낌이.’
아마도 그 이질감이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색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신자 놈과도 얽혀 있는 것은 분명할 터인데, 그게 뭔지 명확하지가 않았다. 상체를 일으킨 로난이 슐리펜에게 질문했다.
“폭류검 그 새끼. 왜 여기 온 것 같냐.”
“나비로제 교관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아냐. 그건 겸사겸사 한다는 느낌이 강했어. 이 새끼들은 꼴에 대의가 있어서 더 좆 같단 말이지···에잇, 제기랄.”
로난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늘은 도저히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것이 잠을 좀 자야 할 것 같았다. 침대 아래를 뒤적이던 그가 술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병에 붙은 상표를 알아본 슐리펜이 눈썹을 으쓱였다.
“만년설화 담금주군. 제법 귀한 물건인데, 어디서 구한 거냐.”
“자이파랑 술 마실때 몰래 하나 챙겨 왔어.”
“···뭐라?”
슐리펜이 미간을 좁혔다. 로난은 말없이 코르크를 뽑았다. 컵 따위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액체가 달큰했다. 몇 모금을 마신 로난이 슐리펜에게 병을 건넸다.
“마실래?”
“그러지. 고맙다.”
“그래. 이 샌님아. 그럴 줄 알았···엥?”
로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답변이었다. 병을 받아든 슐리펜은 과감하게 고개까지 꺾어 가며 담금주를 들이켰다. 껄떡이는 목울대를 본 로난이 기겁하며 말했다.
“얌마, 그거 꽤 독해.”
“후···좀 낫군.”
“힘든 일이라도 있냐? 혹시 여기 오기 전에 돌아오면 청혼한다든가 하는 개소리를 누나한테 지껄였다던가···.”
“아니. 아까부터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다···끅, 검성에게 칭찬을 들었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니까.”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자이파에게 칭찬을 들어서 붕 뜬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마신다는 소리였다. 괴로운 일을 잊기 위해 마시는 놈은 많이 봤는데, 이건 또 참신한 사유였다. 술병을 도로 낚아챈 로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친놈. 살다살다 그따위 이유로 술을 마시는 놈은 너 밖에 없을 거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끅,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지 약자들을···끅, 지킬 수 있으니까.”
“알겠으니까 적당히 마셔. 이 새끼 딸꾹질하는 톤이 어째 에르제베트랑 비슷한데.”
불현듯 여명 마탑으로 가는 비공정에서 주정을 부리던 에르제베트가 떠올랐다. 목조선 안에서 화염 마법을 사용하려는 그녀를 말리기 위해 어떤 고생을 했던가. 로난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가만히 딸꾹질하던 슐리펜이 입을 열었다.
“······로난.”
“엉?”
“이릴 양이 보고 싶다.”
“시발.”
로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슐리펜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릴을 칭송하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휘가 풍부한 것이 책을 한 편 내도 될 것 같았다.
이런 주정뱅이랑 같이 있을 수는 없지. 그가 정신을 잃기 위해 술을 단번에 들이켜려던 차였다.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안내인 옷을 입은 여인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44번 참가자님? 아,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엉? 무슨 일이에요?”
“받으세요. 이걸 전해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여인은 조심스레 편지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봉투에는 수신자가 아닌 사람이 개봉하려 하면 불이 붙는 마법이 각인되어 있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보낸 거죠?”
“오늘 새벽에 폭류검에게 살해당한 러셀 님입니다. 숙소를 정리하다 발견했는데, 수신자가 로난 님으로 되어 있더군요. ”
“···러셀이?”
고개를 끄덕인 여인이 방을 나섰다. 폭류검이 벌인 일 때문인지 상당히 바빠 보였다. 머리를 긁적이던 로난이 편지봉투를 뜯었다. 봉투와는 달리 속지는 평범한 양피지였다. 작은 글자가 한쪽 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뭘 적어놨길래 이렇게 공을 들였어?”
로난은 천천히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도입부와 중반부는 익히 예상했던 내용이었다. 무례를 저질러서 미안하다. 그럼에도 도와 줘서 고맙다. 나는 자네를 정말로 믿지만, 그럼에도 확실하게 일을 마치고 싶다···.
거기에는 아란 파르잔의 참가자들과 모의하여 폭류검을 해치울 계획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처참한 실패로 끝이 나서 모두가 토막난 시체가 되어 버린 그 계획이. 편지를 읽던 로난이 혀를 찼다.
“···빌어먹을.”
가만히 있었다면 다들 죽지 않아도 됐을 터였다. 술맛이 확 떨어졌다. 거기까지 읽었음에도 내용은 아직 절반 정도가 남아 있었다. 중후반부를 읽던 로난의 눈이 커졌다. 폭류검을 만났던 유적의 위치와 내부의 구조, 자신이 폭류검을 추적하며 알아낸 정보들이 죽 적혀 있었다.
“이 멍청한 아저씨가···.”
로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개중에는 네뷸라 클라지에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장소들의 위치도 적혀 있었다. 가치가 어마어마한 정보였다. 여기에 제국군을 투입하는 것이 아마 여명으로서의 첫 임무가 될 것 같았다.
절벽에서 그를 겁박하던 순간이 눈앞을 스쳤다. 자신과 마주앉아 술을 마시던 라일리라는 여기사도. 편지를 곱게 접어 챙긴 로난이 술병을 들며 중얼거렸다.
“푹 쉬쇼.”
로난이 담금주를 들이켰다. 알싸한 술기운과 함께 만년설화의 향기가 입 안 가득 번져 나갔다. 여정의 끝이 목전까지 다가와 있었다. 내일은 드디어 성지를 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