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82화 (182/333)

182. 석양

#182

일곱 토막이 난 몸뚱어리가 무너져 내렸다. 폭발하듯 쏟아져 나온 푸른 피가 로난을 덮쳤다.

데굴데굴 굴러 온 다르만의 머리가 발치에 닿았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그의 입에서 쥐어짜 내는듯한 목소리가 새나왔다.

【네···놈이.】

“근성은 쓸만하네.”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목이 잘렸는데 말을 하는 근성만큼은 원본보다 나은 것 같았다. 눈가를 파르르 떨면서 로난을 노려보던 다르만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졌군.”

웅장하던 목소리는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백지처럼 새하얗던 피부도 다시금 살구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하늘처럼 푸르던 피가 서서히 붉어지는 모습은 꼭 다르만에게 깃들어 있던 무언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영혼이나 생명 뭐 그런 거. 납도한 로난이 그의 목에 한쪽 발을 얹었다.

“얼마나 남았냐?”

“길어야 삼 분이다.”

“그럼 가기 전에 이거나 말해주고 가라. 갑자기 형제가 아니라는 게 무슨 소리야?”

물어보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가장 궁금한 것은 역시 출생의 비밀이었다. 사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죽어가는 다르만이 로난의 질문에 대답해 줘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별다른 내색 없이 입을 열었다.

“설명이 필요한가···말 그대로다.”

“그럼 니 새끼랑 나는 왜 비슷하게 생겨먹은 거야?”

“글쎄···그러고 보니 정말 궁금하군. 틀림없이 너도 나처럼 교주님의 직계 자식인 줄 알고 있었는데 말이지···.”

다르만이 말꼬리를 끌었다. 그의 눈빛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확실한 건 너는 교주님의 자식이 아니라는 거다···나는 너 같은 동생을 둔 적이 없어.”

“그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군. 거짓말은 아니겠지.”

“안심해라. 내가 비록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지만···마지막만큼은 진실로 마무리하고 싶으니까···."

다르만이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죽을 테니 정말로 다 말해 줄 기세였다. 로난이 발끝으로 그의 목울대를 꾹꾹 눌렀다.

“말 잘하네. 그럼 내친 김에 여기 왜 왔는지도 불고 가라. 너희 본거지도.”

“어려울 것···없지.”

오. 정말로 말해주는 건가? 로난이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리던 와중이었다. 시야 한구석에서 섬칫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잘린 채 바닥을 뒹굴던 다르만의 손에 빛의 입자가 모여들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개새···”

“찰나에 불과한 여생을 즐겨라.”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다르만의 손아귀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콰아아앙! 폭발이 작렬함과 동시에 빛의 기둥이 하늘로 솟구쳤다.

로난은 폭발을 베어가름과 동시에 자리에서 도약했다. 아까보다는 훨씬 규모가 작았지만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암반을 붕괴시키기에는 충분한 위력이었다. 그가 제비를 넘으며 착지하는 순간이었다. 로난과 다르만이 있던 자리의 균열이 점차 넓어지더니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빛이 가라앉자 바람이 연기를 날려 보냈다. 분화구의 가장자리로 걸어간 로난이 시선을 내렸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겨나간 다르만의 육편은 그대로 바윗덩이들과 함께 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좆같은 새끼.”

잠시 정신을 차렸나 생각했는데 역시나였다. 이 씹새끼들을 하루빨리 축출하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다시금 인지할 수 있었다. 더는 주변에서 반짝이는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일이 끝나자 몸이 급격하게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별안간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난! 괜찮나?”

“후···다들 살아 있죠?”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나비로제와 슐리펜을 비롯한 생존자들이 모여 자신을 올려보고 있었다. 바위에 나란히 기대앉아 있는 자이파와 알로긴을 제외하면 모두 건강해 보였다. 로난이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둘은 어떻게 된 거예요?”

“둘 다 살아 있다. 죽은 참가자의 품에서 포션을 찾았어. 서둘러 병동으로 옮기면 괜찮을 거다.”

과연 자이파의 어깨가 조금씩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로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슐리펜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오러를 개화했나. 놀라운 성취군.”

“야 이 새끼야···지금 그런 게 중요하냐?”

로난이 픽 웃었다. 피투성이가 된 슐리펜의 눈동자는 언제나 한결 같은 암청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부상자 중에서는 그의 제복을 찢어 만든 붕대를 감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괘씸하고 기특해서 한 방 먹여주고 싶었지만 발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문득 오뚜기가 된 채 쓰러진 아지에가 눈에 들어왔다. 상처를 불로 지졌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깔끔한 절단면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고 있었다. 로난이 그녀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저건 살아 있어요?”

“그래. 얼마 못 버틸 것 같기는 하다만.”

“최대한 살려 봐요. 뽑아먹을 정보가 많으니까···.”

“그러지. 아까부터 안색이 영 좋지 않다만, 괜찮은 거냐?”

나비로제가 걱정스레 물었다. 로난은 엄지를 들어 보이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물론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안도하듯 머리를 쓸어넘긴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다행이군. 방금 그건 도대체 뭐였지?”

“무덤에 오줌을 갈겨 마땅할 개새끼들이죠···맞아, 다들 봤겠구나.”

로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 벙찐 채 서 있었다. 거인처럼 변한 다르만을 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하.”

로난이 웃었다. 이제 미래의 진실을 말해도 미치광이 소리를 듣지 않을 명분이 생겼다. 앞으로 많은 것이 변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발론 아저씨가 좋아하겠군. 아니, 거품을 물고 쓰러지려나.’

황제의 반응을 예상해본 로난이 낄낄거렸다. 얼떨결에 여명으로서의 첫 임무를 완수해 버렸다. 첫 임무의 결과치고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러셀에게서 받은 지도도 있었고. 나비로제가 그에게 손짓했다.

“그런데 언제까지 거기 있을 생각이냐. 슬슬 내려와라.”

“잠깐만요···경치가 참 예쁘네···.”

로난은 내려가는 대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실상 여기가 파르잔의 정상이었다. 성지를 비롯한 파르잔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서늘한 바람이 앞머리를 헤집어 대고 있었다.

절정에 치달은 석양이 아름다웠다. 해는 이미 서녘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있었다. 보라색을 띠는 빛무리가 붉게 젖은 구름과 뒤섞이며 하늘에 녹아들고 있었다.

수만 자루의 병장기가 빛을 뿌리고 있었다. 바람이 날붙이 사이를 오가며 들려오는 소리는 이번 제전에서 스러진 이들을 위한 진혼가처럼 들렸다. 짧게나마 인연을 가졌던 이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러셀, 라일리, 폭스 나이트, 마담 올가. 그리고···.

별안간 시선을 내린 로난이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흑백의 검신은 다른 검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색을 담고 있었다. 칼날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석양에 비춰 보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고생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는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석양에 시선을 둔 로난이 히죽 웃었다. 털썩. 천천히 기울던 몸이 뒤로 쓰러졌다.

“···난!”

“차려···라!”

눈꺼풀이 빠르게 내려앉았다.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어둠 속에서 나비로제와 슐리펜이 뭐라 뭐라 외쳐 대고 있었다. 잘 안 들리니까 조금 가까이 오라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으으음···.”

로난이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새하얀 천장이었다. 어쩐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백색 마감은 분명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여긴···.”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죽 늘어선 침대들과 각종 의료기기가 눈에 들어왔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새어드는 바람에 상아색을 띠는 커튼이 흔들리고 있었다. 분명 필레온의 갈레리온 관에 위치한 양호실이었다.

“시발. 내가 얼마나 잔 거야?”

로난의 눈이 커졌다. 편도로만 일주일이 걸리는데 얼마나 퍼질러 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콧잔등을 간질이는 바람에서는 아카시아 냄새가 났다. 파르잔에서는 느낄 수 없던 온기가 공기 중에 감돌고 있었다.

“음···?"

불현듯 허벅지 부근이 무거운 것을 느낀 로난이 고개를 내렸다. 하얀 이불과 대비되는 새카만 머리카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낯익은 여인이 팔을 베개 삼아 엎드려 있었다.

“선배?”

“우으으···잠깐만···.”

아데샨이었다. 로난이 검지로 뺨을 살짝 찌르자 그녀가 눈을 부비면서 일어났다.

막 일어난  아데샨의 얼굴은 초췌하기 짝이 없었다. 피부는 창백하고 눈그늘이 짙은 것이 며칠은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 같았다. 말없이 손을 뻗은 로난이 그녀의 입가에 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떼어 주었다. 잠이 덜 깬 채 깜빡이던 아데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로난.”

“밤이라도 샜어요?”

“드, 드디어 깨어났구나! 좀 괜찮아? 외상도 없었는데 눈을 못 떠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데샨은 허둥거리며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오늘은 의식을 잃은 로난이 파르잔에서 돌아온 지 정확히 9일이 되는 날이었다. 자신과 에르제베트, 특급 모험 동아리의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병문안을 왔고, 그를 반증하듯 침대 옆의 협탁에는 편지나 몸에 좋아 보이는 먹거리 같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아흐레라. 젠장, 오래도 누워 있었네요.”

“그래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마, 맞아. 너 방금전에 뭘···.”

별안간 하던 말을 멈춘 아데샨이 자신의 입가를 만졌다. 입꼬리 쪽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자신이 본 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눈을 치켜떴다.

“나, 난 몰라! 그러니까 이건···.”

새하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는 온갖 손짓을 해가며 자신의 입에서 액체가 흘러나온 현상을 필사적으로 해명하려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난이 픽 웃었다. 천천히 팔을 뻗은 그가 말없이 아데샨을 끌어안았다.

“···로, 로난?”

아데샨이 헛숨을 들이켰다. 양호실에는 둘밖에 없었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한층 커진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로난이 말했다.

“고마워요.”

“고, 고맙다니 뭐가···? 이, 일단 이거부터 좀···.”

“여러가지로요. 덕분에 오러도 개화했거든요.”

당황한 아데샨이 버둥거렸으나 로난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로난은 그 자세 그대로 파르잔의 정상에서 오러를 개화한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빛을 받아도 흑색을 유지하는 아데샨의 머리카락에서는 눈과 들꽃의 향기가 났다. 어느 순간부터 저항을 멈춘 그녀가 로난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잘 됐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천을 타고 넘어오는 체온이 따스했다.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진 로난이 다시금 꾸벅꾸벅 졸던 찰나였다. 어디선가 낮고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일어난 건가.”

“끼약!”

익숙한 목소리였다. 화들짝 놀란 아데샨이 빠르게 몸을 떼어냈다. 로난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웬 시커먼 거한이 양호실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자이파?”

“보기 좋군 그래. 아내가 살아 있던 시절이 생각나는군.”

틀림없는 자이파였다. 로난이 깨어난 것을 확인한 그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시커먼 가슴팍에는 코끼리도 지혈할 수 있을 것처럼 두꺼운 붕대가 친친 감겨 있었다. 멜론을 사과라도 되는 것처럼 우적우적 씹어먹고 있는 모습을 본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살아 있었수?”

“그래. 굉장히 수치스럽지만 말이지. 그 뱀의 심정이 처음으로 이해가 되더군.”

자이파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병동에 이송된 지 하루 만에 완전히 회복했다고 설명했다. 심장을 반으로 잘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은 피를 흘린 걸로 기억하는데, 하여튼 대단한 작자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하여튼 너도 무사해서 다행이군.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으니.”

“그치.”

“방금 일어난 사람을 괴롭히는 건 조금 그러니 나중에 다시 오지. 그래도 이 손님하고는 간단하게나마 이야기를 좀 해 봐라.”

“손님?”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없이 벽에서 등을 뗀 자이파가 반쯤 열린 문 틈새로 손짓했다. 끼이익- 문이 완전히 열리며 또 다른 거한 하나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크림색으로 빛나는 모피가 아름다운 웨어라이온 여인이었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당신은···!”

“오랜만입니다.”

웨어라이온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여명 부대의 학살이 벌어진 날 유일한 생존자인 네메아 소령이었다. 자이파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내 부관이 할 말이 있다는군. 그날 있었던 일과 관련해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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