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일상을 되짚다
#184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로난은 몇 초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나바르도제의 학부모 참관이라니. 열 번 정도 삶을 다시 살더라도 자의로는 떠올리지 못할 것 같은 단어였다.
“···입학식이 정확히 언제죠?”
“일주일 뒤라네.”
“좆됐네···황제께서는 알아요?”
“아마도 아직 모르실 걸세. 후···편지가 이런 식으로 와서 이걸 폐하께 말씀드려야 할지 아닌지도 판단이 서질 않는군.”
크라티르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내장이라도 꺼내서 보여 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바르도제의 편지를 로난에게 내밀었다. 진홍색 종이의 한복판에는 단촐한 글귀 한 줄이 필기체로 적혀 있었다.
[간다. 엿새 뒤.]
“시발.”
로난이 다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십년지기 친구에게 쓰는 장난 편지도 이딴 식은 아닐 것 같았다. 문제는 그녀의 일방적인 통보에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바르도제의 행차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가끔씩 제국을 방문하면 그 날은 이유를 불문하고 임시적인 공휴일이 되었다. 상인들은 점포의 문을 닫고, 시민들은 잠시 집 안에 대기하며 불의 어머니에 대한 예를 표했다.
‘아마 신에 가장 가까운 생물이겠지. 신이라는게 존재한다면.’
그런 거물이 고작 아들의 입학식을 본다는 이유만으로 필레온에 행차한다니, 크라티르의 곤혹스러운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문득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로난이 아랫입술을 질겅였다.
나바르도제를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세간에 전해져 오는 그녀의 위상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 거인 중 하나였던 두아루를 태워 죽일 당시 그녀가 내뿜었던 불꽃은 수천 킬로미터씩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
‘아침이 된 줄 알고 일어났었지. 한참 잘 자고 있었는데 말야.’
하늘을 찢으며 솟구치는 불기둥은 잠시나마 세계에서 밤이라는 개념을 말소시켰다. 용의 도시로 파견된 제국의 전령들은 새카만 숯이 되어 죽은 거인과 탈진해서 쓰러진 나바르도제, 그리고 무수히 많은 용의 시체를 보게 되었다.
허나 불행히도 거인은 한 명이 아니었다. 아직 니르바나와 아하유테가 남아 있었고, 힘을 소진한 나바르도제는 다음 싸움에 참전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인류는 로르혼이라는 대마법사를 잃는 것으로 모자라 대륙의 삼 할 정도가 갈려 나가는 피해를 입어야 했다. 결국은 멸망해 버렸고. 신음하던 크라티르가 입을 열었다.
“후···일단 이 건은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네. 고민만 해봐야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스승님께 자문을 구해야 할 것 같군.”
“스승이면···로르혼 님한테요?”
“그래. 함부로 결정할 일이 아닐세.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연통이 왔는데 자네들의 안부를 묻더군. 특히 아셀 군에게 관심이 많으셨네.”
크라티르의 얼굴은 아까보다 한결 나아져 있었다.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은 것 같았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접대용 원탁 위의 공간이 뒤집히며 찻잔과 간식거리가 나타났다.
“늦어서 미안하네. 그럼 밀린 이야기를 나눠 보세나.”
“제 이야기도 마냥 유쾌하지는 않는데. 괜찮겠어요?”
“다음주면 불의 어머니께서 내방하는 마당에 뭐가 더 심각하겠나. 괜찮으니 말해 보게.”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생각해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담담한 어투로 파르잔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크리티르와의 접견에는 한 시간 정도가 소모되었다. 일부러 세상의 멸망과 관련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기에 그가 찻잔을 집어던지며 비명을 지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딱히 늙은이의 정신 건강을 걱정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지금보다 더 좋은 타이밍에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로난은 곧바로 동아리 구역으로 향했다. 구름 없는 하늘이 아름다웠다. 나바르도제의 방문에 대해 생각하던 로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은 기회야.’
그녀의 방문에 대해 생각하던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질색했지만 오히려 기회로 삼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시간이 다하기 전에 한번 찾아가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본인이 찾아온다니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이참에 언질해 놔야겠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애초에 나바르도제를 설득하는 것은 회귀한 로난의 목표 중 하나였다. 거인을 태워 죽인 전적이 있는 용의 가치는 이루 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쩌면 별의 가호를 파괴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녀와 대화를 나눌 방법이 통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고고한 드래곤이 자신과 말을 섞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입학식 도중에 오줌이라도 갈겨서 주의를 끌어야 하나? 성격이 더럽다고 들었는데 개소리를 지껄인다고 불을 뿜으면 어쩌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로난은 어느새 동아리와 이어진 창고에 도착했다. 느닷없이 요란한 환성이 쏟아져 나왔다.
“퇴원 축하해!”
“아씨, 깜짝이야.”
지하가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소리였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아셀과 마르야를 비롯한 특급 모험 동아리의 부원들이 여전히 광활한 훈련장을 배경으로 모여 있었다.
“너희들···.”
“로, 로난. 이제 몸은 다 나았어?”
아셀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더 길어진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앞머리 한구석에는 겨울의 마녀가 깃들며 생겨난 브릿지가 여전히 하얀 빛을 뿌리고 있었다.
한 달만의 재회였다. 생글생글 웃는 것이 다들 건강해 보였다. 훌쩍 뛰어오른 마르야가 로난의 목에 매달렸다.
“커억!”
“진짜 괜찮아? 너 엄청나게 오래 잤어. 정말 엄청나게.”
“괜찮았는데 이제 아파지려고 그래.”
여전히 굉장한 완력이었다. 목이 졸린 로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눈치챈 그녀가 손을 뗐다.
“미, 미안. 요즘 힘 조절이 잘 안되네. 아하하···.”
“괜찮아. 그나저나 니들 동아리 활동 간 거 아니었어? 그리폰이 어쩌고 하는걸 분명히 들은 것 같은데.”
“그게,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 우리 귀염둥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마르야가 아셀을 뒤에서 확 끌어안았다. 아셀의 얼굴이 머리카락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색으로 물들었다. 쪼다같은 반응을 보아하니 아직도 연애 관계에는 별로 진전이 없는 듯했다. 그들의 뒤에 서 있던 브라움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와하하! 고작 한 달인데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검의 제전은 어땠나?”
“뭐, 나름대로 괜찮았지. 자세한 이야기를 하면 분위기가 숙연해질게 분명하니까 다음에 해 줄게. 방패는 이제 좀 잘 다루냐?”
“하하, 말해서 뭐하나. 여지껏 졸업반의 누구도 나의 브람스를 뚫지 못했다!”
브라움은 자신의 등에 메어져 있는 대방패를 텅텅 두드렸다. 로난이 그란 카파도키아에서 맞춰 준 방패였다.
이름까지 지어준 걸 보니 어지간히도 아끼는 듯했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로난의 한쪽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그래?”
“잠깐···!”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헛숨을 들이킨 브라움의 손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카아아앙! 허공에서 불씨가 튀기며 쇳소리가 작렬했다.
“오.”
“와, 와하하하···! 봤느냐, 내가 막았다!”
로난이 입을 둥그렇게 말며 감탄했다. 하얀 칼날은 방패에 맞닿은 채 멈춰 있었다. 정말 가볍게 휘두른 거였지만 그래도 막아낼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제법이네, 브라움.”
“여전히 무시무시한 쾌검이군. 살다 보니 내가 그 로난의 검을 막는 날이 올 줄이야, 기쁘다!”
브라움은 허리까지 젖혀 가며 웃어젖혔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 만큼이나 비보를 전해야 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무안하게 머리를 긁적이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 미안하다.”
“와하하하···음? 뭐가 말이지?”
“다음에는 다른 대장장이 말고 도론에게 직접 문의해 봐. 그 정도 실력이면 만들어 줄 거야.”
영문 모를 소리에 브라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대방패 위로 하얀 선이 수직으로 그어졌다. 땡그랑! 깔끔하게 좌우로 나뉘어진 방패가 바닥에 떨어졌다.
“따으억! 브람스!”
“생각보다 더 날카롭네···주의해야겠어.”
로난이 라만차의 칼날을 보며 중얼거렸다. 원래도 뛰어난 절삭력을 자랑했지만 성검화가 진행된 이후 훨씬 더 성능이 흉악해져 있었다.
“우오오오! 나, 나의 동반자가 어찌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건가. 나는, 나는···!”
브라움의 절규가 훈련장을 가득 메웠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조각난 방패를 끌어안고 있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 누가 보면 연인이라도 죽은 줄 오해할 모습이었다.
별안간 그의 발밑에 드리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현상이었다. 머지않아 웬 은발의 소녀 하나가 그림자를 찢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브라움···시끄러워.”
“허억! 미, 미안하오. 깨셨소?”
“응. 너 때문에.”
필레온 유일의 뱀파이어인 오필리아였다. 어째 안 보이나 싶었는데 동아리 건물 안쪽에서 잠을 청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브라움의 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새하얀 손가락이 경동맥이 지나가는 자리 주변을 빙글빙글 멤돌았다.
주접을 떠는 것을 멈춘 브라움이 뱀 앞의 쥐처럼 굳어 버렸다. 로난에게 고개를 돌린 오필리아가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안녕 로난···그새 더 강해졌네. 비결이 뭐야?”
“좆같은 일을 많이 겪으면 돼. 그런데 너, 그 돌은···.”
로난이 검지를 뻗어 오필리아를 가리켰다. 하얗고 맨질맨질한 돌멩이 하나가 그녀의 옆구리에 끼어 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많이 본 돌이었다. 마르야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외쳤다.
“아앗! 어디 갔나 했더니!”
뒤이어 고개를 돌린 아셀의 얼굴도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로난을 포함하여 세 사람만이 정체를 알고 있는 돌이었다. 오필리아가 돌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요즘···베개로 쓰는 돌이야. 예쁘고···마력이 느껴져서 좋아.”
“···베개?”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오필리아는 저 돌이 원래는 엘프 노인이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모르고 있을 터였다.
악몽에 시달릴 만도 한데 아직까지는 그런 일이 없던 것 같았다. 헌데 저걸 단순히 천벌 받을 일로 봐야 할까?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던 로난이 바위를 돌려받으려는 마르야를 제지했다.
“왜 막아? 저건···”
“나도 알아. 그런데 미소녀의 베개가 된다면 행복한 거 아닐까? 생각해 보면 둘이 나이도 비슷할 거 같은데.”
“···미친놈.”
마르야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그럼에도 로난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바위가 된 사란테 나름대로의 해피엔딩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도마뱀 새끼는 어디 갔냐?”
“도마뱀? 아, 이타르간드는 입학 준비 때문에 아드렌으로 돌아갔어. 입학식 전날이나 당일에 돌아온다고 하더라.”
“그러냐···.”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무난한 반응을 보아하니 뭐가 같이 오는지는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다들 반가웠다. 불현듯 로난은 자신이 눈앞의 소년소녀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징벌병 시절에도 느꼈던 건데, 역시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생물인 듯했다. 로난이 말했다.
“어쨌든 잘 지냈다면 됐다. 오랜만이라 그런데 아카데미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나 좀 알려줘.”
“물론이지. 그런데 그 전에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몸은 이제 완전히 괜찮아진거 맞지?”
마르야가 물었다. 뜻 모를 질문에 로난이 어깨를 으쓱였다.
“할 일? 뭐, 그렇기는 한데···.”
“그럼 우리랑 대련해. 진지하게.”
“엉?”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언제나 제안은 자신 쪽에서 했지, 먼저 권유를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어?”
“생각해 보니 네가 저주를 풀고 난 뒤로는 대련한 적이 없더라고. 우리도 나름 열심히 했거든.”
마르야의 말투가 진지했다. 로난은 다른 부원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결의에 찬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색이 다른 눈동자에서는 다양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긴장감, 두려움, 반드시 이기고자 하는 호승심 등···피식 웃은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원한다면야.”
부원 하나는 잘 뽑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난이 칼자루를 톡톡 두드렸다. 검집의 틈새로 노을색 빛무리가 회답하듯 새어 나왔다. 안 그래도 정신이 피폐해져 있었는데,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