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85화 (185/333)

185 불의 어머니(1)

#185

대련이 끝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더는 덤벼오는 부원이 없는 것을 확인한 로난이 흡족스레 미소 지었다.

“다들 고생했어. 이제 어지간한 전쟁터에 던져도 살아남겠네.”

진심어린 칭찬이었다. 못보던 2년 동안 부원들의 실력은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어 있었다. 재능과 노력, 훌륭한 지도가 맞물려서 탄생한 황금 같은 결과였다. 물론 로난은 한 번도 사망 판정을 당하지 않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었기에 따지고 들 생각은 없었다.

“니들 진짜 많이 늘었어.”

그 한 마디를 덧붙인 로난이 납도했다. 찰칵. 검집과 검이 맞물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린과 결합한 라만차는 짤막하게나마 폼멜이 생겨서 검을 더 안정적으로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허억···말도 안 돼···헉, 이번에야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오오···브람스에 이어 하인드까지···.”

“우엑! 우에에에!”

대련을 마친 부원들은 하나같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마르야와 브라움은 대자로 팔을 벌린 채 뻗어 있었고, 마나를 거의 고갈당한 아셀은 벽을 짚고 구토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추해지기 전에 기권한 오필리아는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본인이 와인이라 주장하는 액체를 마시고 있었다.

“지금의 너는···발자크랑 싸워도 지지 않을 것 같아.”

“그래야지. 내가 어떤 고생을 했는데.”

로난이 낄낄거렸다. 발자크도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오필리아를 사모하는 그림자 대공의 동생. 선혈의 정수를 빼앗아서 자로딘에게 줬었는데, 두 사람 다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했다.

“너무 좌절하지는 마. 니들이 한 짓을 봐라.”

로난은 턱 끝을 들어 엉망이 된 훈련장을 가리켰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야수가 만취한 상태로 난동을 부린 것 같았다.

마르야의 대검이 작렬했던 자리는 하나같이 거대한 균열을 동반하고 있었다. 로난과 슐리펜이 남겼던 검흔과 비교해 봐도 절대 꿇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브라움 또한 엄청난 분전을 보여 주었다. 비록 하인드라는 이름의 임시 대방패마저 명을 달리하기는 했지만, 만약 이곳이 전쟁터고 적이 로난이 아니라 다른 불특정 다수의 적군이었다면 그는 부원 전원의 목숨을 구했을 터였다.

“우으으으···너, 너무해. 아무리 오러라고 해도 저런 게 어딨어어···.”

【괜찮단다 아이야. 네가 약한 게 아니라 저 악마가 이상한 거란다.】

아셀이 입가를 닦으며 울먹거렸다. 그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바쥬라로부터 겨울 마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열이 뻗친 로난이 칼을 뽑아들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파아아···! 검신에서 발현된 주홍색 빛무리가 아셀의 몸을 휘감았다. 둘 사이의 간격이 좁혀졌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닥쳐온 로난의 모습에 아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흐야악! 사, 살려줘!”

“너한테만큼은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인마. 너무한 건 저런 게 너무하다고 하는 거야.”

로난은 양손으로 아셀의 머리를 잡아 훈련장 쪽으로 돌렸다. 어지간한 건물보다 큰 얼음 가시들이 군데군데 자라나 있었다.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냉기가 훈련장 전체의 기온을 낮추고 있었다. 겨울의 마녀가 다루던 것과 같은 얼음이었다.

“저런 걸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열댓 개씩 갈긴 주제에 뭐? 너무해? 나랑 다른 마법사들한테 사과해 인마. 천재로 태어나서 죄송하다고.”

【굳이 따지자면 표정은 변했다.】

“아줌씨는 조용히 하쇼. 요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로난은 겨울 마녀를 무시한 채 아셀의 뺨을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말랑말랑한 볼살이 쭉 늘어났다.

“하, 하디마! 내가 잘모태써!”

“니가 고블린 팬티나 훔치던 시절부터 사용하던 염력이랑 내 오러랑 다른 게 뭔데. 엉? 심지어 나는 당길 수만 있다고.”

아셀이 바동거렸지만 로난은 그를 쉽사리 놓아 주지 않았다. 꼬집은 볼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리자 아셀의 비명이 한층 더 커졌다.

“으아아앙! 놔 줘!”

“괘씸한 놈. 이대로 확 뜯어버릴까.”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로난의 입꼬리는 귀에 걸릴 듯이 올라가 있었다. 과연 로르혼에게 영입 제안을 받은 인재였다. 이 자식은 별의 가호만 뚫을 수 있다면 당장 거인들과 싸우게 해도 될 것 같았다. 별안간 전생에서 사라져간 강자들의 얼굴을 떠올린 로난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게 가장 관건이긴 하다만.’

어떻게든 파훼법을 알아내야 했다. 아니면 내가 그 모든 거인을 찢어 죽일 정도로 강해지던가. 아셀의 볼에서 손을 뗀 로난이 등을 돌렸다. 검의 제전에 참가한 동안 놓쳤던 진도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미리 예습해놔야 할 것 같았다.

“노력한 너희들에게 좋은 소식을 하나 알려주지. 교장님이랑 나밖에 모르는 건데 특별히 말해 주는 거야.”

“좋은···소식?”

“그래. 엿새 뒤에 열리는 입학식에 나바르도제가 참가할 거야. 학부모 참관이지. 만약에 아들에게 못된 물을 들였다고 나를 태워 죽이면 뼛가루는 우리 누나에게 전해 줘.”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제 뭘 먹었는지 말해주는 것처럼 평탄한 말투라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쨍그랑! 오필리아의 손에서 와인잔이 떨어졌다. 간신히 평정을 되찾은 마르야가 입을 열었다.

“···뭐가 온다고?”

“레드 드래곤 나바르도제. 어차피 알아봤자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그냥 알고만 있으라고. 나는 간다.”

로난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동아리 구역을 벗어났다. 계단을 거의 다 올라갔을 즈음에 등 뒤에서 비명 비스무리한 소리가 들려왔다. 적어도 신이 나서 지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네메아 소령에서 편지가 늦어지는 덕에 로난은 오랜만에 아카데미 생활에 집중할 수 있었다.

간만에 수업을 들으며 그가 느낀 것은 역시 공부보다 쉬운 일도 없다는 것이었다. 시타를 쓰다듬으며 약초학 교재를 읽던 로난이 중얼거렸다.

“그냥 계속 이러고 살고 싶네···.”

좆같은 거인들만 아니었다면 실제로 그렇게 했을 터였다. 적당히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적당한 직장에 취직하고, 적당히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적당히 가정을 꾸리고 살았을 것이다.  서로를 닮은 아이도 두 명쯤 키우면서.

그로서는 이런 평온함이 싫다고 삐뚤어지는 놈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거친 삶에 동경을 품고 있다면 저기 내전이 한창인 남부의 격전지에 삼 일만 견학을 보내 놓으면 알아서 정신을 차릴 텐데. 문득 그의 시선이 달력에 닿았다.

‘드디어 내일이군.’

13이라는 숫자 위로 불을 형상화한 그림이 거칠게 그려져 있었다. 입학식. 그리고 나바르도제가 오는 날이었다.

로르혼과 상의한 크라티르는 결국 황제에게 나바르도제의 방문을 알리기로 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용무로 오는 것이었기에 최대한 시민에게는 함구하는 쪽으로 합의를 봤다고 했다.

‘그런다고 숨겨질는지 모르겠지만.’

물론 그건 나바르도제가 폴리모프를 해서 왔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드래곤을 통틀어서 가장 거대하다고 알려진 용이었으니 본모습으로 행차한다면 답이 없었다. 로난이 노트를 정리하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전신의 털이 한번에 곤두섰다.

“무슨···!”

“뺘하아아악!”

본능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자다가 깬 시타가 창문을 바라보며 하악질을 했다. 그때 어떤 반투명하고 얇은 파장 같은 것이 창밖으로부터 빠르게 밀려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로난은 반사적이라 해도 좋을 동작으로 검을 뽑아서 휘둘렀다. 스각! 자신을 덮치려던 파장이 찢어지며 등 너머로 지나갔다.

“젠장, 뭐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검에 베이는 걸로 보아 마법의 일종 같았다. 불현듯 로난은 시타의 하악질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고개를 내린 그가 당황하며 외쳤다.

“시타? 얌마, 정신 차려!”

시타는 하악질하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호흡도 하지 않는 것이 꼭 돌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아주아주 느리게 뛰는 심장 소리와 사라지지 않은 온기만이 시타가 죽지 않은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문득 로난은 기숙사 내부와 외부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모두 멎은 것을 눈치챘다.

“말도 안 돼.”

로난은 황급히 창문을 열고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교정을 돌아다니던 학생들이 모두 시타처럼 굳어 있었다. 더는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 대로에는 가로수마저 흔들리던 모양 그대로 멈춰 있었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저 멀리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가늘게 좁히고 집중해 보니 누군가 대광장 한복판에 걸어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저 새끼군.’

로난은 본능적으로 저것이 이 마법을 시전한 술자임을 눈치챘다. 필레온 전역에 이런 마법을 걸 정도면 크라티르와 버금가거나 그보다 더 강력한 마법사겠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기다려라.”

로난은 그대로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신발 밑창이 돌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적막 속에 울려 퍼졌다. 마나로 강화된 허벅지가 부풀어 올랐다. 대광장을 목표 지점으로 잡은 그가 한걸음에 10m씩 거리를 좁혀 가며 뛰어가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세상이 시커멓게 변했다.

“뭐?”

전신의 털이 다시한번 곤두섰다. 길을 밝히던 달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급히 멈춰선 로난이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의 천체가 빛나야 할 자리에는 완연한 암흑만이 드리워 있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어둠이 깔려 있었다. 체조를 하듯 고개를 돌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저것이 괴한이 시전한 새로운 마법인 줄 안 로난이 검기를 발사하려던 차였다. 갑자기 어둠이 걷히며 정체되어 있던 달빛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동시에 어둠의 가장자리를 본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저건···!”

그것은 날개의 윤곽이었다. 박쥐를 닮은 날개는 한 쪽만으로 필레온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었다. 날개를 따라 시선을 오른쪽으로 옮기자 이번에는 꼬리가 보였다. 아직도 밤하늘의 뒤편에서 끌려오고 있는 꼬리는 신적인 존재를 징벌하기 위한 채찍처럼 보였다. 그가 벙찐 채 그림자의 윤곽을 바라보던 와중이었다. 팟! 한순간 어둠의 형체가 사라지며 광활한 밤하늘이 나타났다.

“뭐야 시발.”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 봐도 방금 전에 하늘을 날던 무언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꿈이군. 분명해.'

로난은 그 무언가가 사라진 뒤에도 제자리에 서 있었다. 한번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 탓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향하던 대광장 쪽에서 웬 남녀의 대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입학식은 내일인데 왜 굳이 오늘 오셨어요?”

“필멸자들이 나를 어떻게 대할지 알면서 그걸 물어보니? 부담스러워서 물도 제대로 못 마실 게 뻔한데, 그 전에 아들하고 이야기 좀 해야지.”

주위가 조용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들을 수 있었다.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인의 목소리는 생소했으나 남자 쪽은 익숙했다.

그는 최대한 기척을 감추고 발걸음을 옮겼다.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이타르간드와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팔을 들어올린 여인이 이타르간드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나저나 참 대단하다 우리 이르. 어쩌면 인간에게 배울 생각을 다 했니?”

“그게···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 오만한 이타르간드가 쩔쩔매고 있었다. 달빛이 비춘 여인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후드 아래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은 타오르는 홍염의 색을 띠고 있었다. 까치발을 들고 이타르간드의 머리를 쓰다듬던 여인이 입술을 들이밀었다.

“기특하기도 하지. 이리 오렴.”

“어, 어머니, 필멸자들 앞에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전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데 뭐 어떠니. 자, 어서.”

동작으로 미루어 봐서는 볼에 키스를 해 주려 하는 것 같았다. 이타르간드는 필사적으로 팔을 휘적이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찰나 여인의 얼굴이 충격을 받은 듯 굳어졌다.

“이르. 너···.”

“그, 어머니···그게 아니고···.”

이타르간드가 아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달랬다. 하지만 여인은 이미 충분히 상처를 받았다는 듯이 고개를 훽 돌렸다. 침을 눈가에 찍어 바른 그녀가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너무하구나. 레어에서 독립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 엄마를 구박하는 거니? 흑···흐윽···.”

“소,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울지 마세요. 네?”

로난은 숨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인의 정체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타르간드가 어머니라고 부를 사람이 달리 있겠는가.

다만 이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인 것이 믿어지지 않을 뿐이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심호흡한 로난이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얌전히 돌아가자.’

그냥 아무것도 못 본 걸로 할 생각이었다. 대화로 미루어 보아 시간을 멈춘 듯한 마법도 악의가 있어서 사용한 것은 아니었으니 금방 풀어 줄 것 같았다. 그래, 이대로 돌아가서 잠이나 자야지. 그가 막 뒷걸음질치던 도중이었다.

“흑, 정말이지 서럽구나.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고개를 돌린 채 훌쩍이던 그녀와 로난의 눈이 우연히 마주쳤다. 한순간 로난의 심장이 배꼽까지 내려앉았다. 초인적인 속도로 판단을 내린 그가 동작을 멈췄다. 누가 보면 박제나 석상으로 착각할 수준의 명연기가 펼쳐졌지만, 여인은 이미 로난이 움직이는 것을 본 뒤였다.

“···너. 마법에 걸리지 않았느냐?”

“예?! 어머니, 그게 무슨···!”

여인의 말을 들은 이타르간드가 경악했다. 로난은 그때까지 나는 석상이라며 필사적인 자기암시를 걸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온 여인이 로난의 앞에 멈춰 섰다. 벌어진 그녀의 입 사이로 지금까지와는 느낌이 전혀 다른 목소리가 새나왔다.

【여봐라.】

“······안녕하세요. 나바르도제 님.”

로난이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마법이 통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나바르도제의 얼굴이 사납게 굳어졌다. 이타르간드의 경악 어린 외침이 적막 속에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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