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86화 (186/333)

186 불의 어머니(2)

#186

“······안녕하세요. 나바르도제 님.”

“로, 로난?!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이타르간드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뱉었다. 눈을 살짝 뜨자 여전히 굳어 있는 나바르도제의 얼굴이 보였다. 적색으로 이글거리는 동공에서는 당장에라도 불길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너.】

“어, 저기···그러니까···할 일 마저 하세요. 보기 좋네요.”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좆같은 일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혀 마땅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왜, 저는 부모님이 안 계서서 두 분 같은 관계를 내심 동경했거든요···어, 누나가 있기는 한데 하하···역시 엄마가 있는 편이 더 낫기는 하죠?”

로난은 필사적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헛소리를 주절거렸다.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위아래로 뜯어보던 나바르도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거지?】

“그게···제가 체질이 좀 특이한지라.”

【체질이라.】

로난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이걸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마법을 자를 줄 안다고 섣부르게 말했다가 위험 분자로 분류되어 재가 되어 버린다면 그만큼 비극적인 일도 없을 터였다. 불현듯 나바르도제의 눈이 옅게 반짝였다.

【내가 누구인 줄 모르느냐?】

“커억!”

보이지 않는 무언가 로난의 목을 졸랐다. 그의 몸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아셀의 염력은 애들 장난으로 보이게 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나바···르도제···!”

【말장난 따위를 하고자 네게 물어본 것이 아니다.】

이건 정말 재미 없었다. 나바르도제의 어깨 위로 피어나는 기운이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대광장 전체가 아지랑이로 뒤덮인 것 같았다.

‘제기랄···!’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지금에라도 오른손을 뻗으면 칼자루를 쥘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염력을 베어 탈출하거나 한 방 먹일 수도 있을 터였다. 허나 그랬다가는 확실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다시 묻겠다. 어떻게 내 마법에서 벗어난 거지?】

나바르도제가 말을 이었다. 조여드는 힘이 더 강해졌다. 머리로 가는 피가 부족해지기 전에 서둘러 결단을 내려야 했다. 로난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충격을 받아 벙쪄 있던 이타르간드가 기겁하며 외쳤다.

“고, 고정하세요 어머니! 이 자가 제가 말했던 그 인간입니다!”

【그 인간? 설마···.】

“네. 저를 구해주고 필레온에 다니라고 권유한 인간이요. 이 자가 로난입니다!”

【헉···!】

나바르도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로난을 옥죄고 있던 힘이 사라졌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그가 마른기침을 토내했다.

“커억···! 켁! 빌어먹을···!”

“미, 미안하다. 괜찮으냐? 내가 아들을 구해준 은인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나바르도제가 발을 동동 굴렀다. 대광장을 뒤덮고 있던 살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목을 매만지던 로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네, 괜찮아요.”

“다,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영혼을 짓누르듯 위압적이던 목소리도 원래의 사근사근한 음성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가 아들의 팔뚝을 탁탁 치며 말했다.

“이르, 진작 말했어야지. 정말 큰일 날 뻔했잖니.”

“어, 어머니께서 워낙 갑자기 행동하시는 바람에···죄송합니다.”

“···후우우, 아니야. 내가 성급하게 굴기는 했지. 괜히 탓을 해서 미안하구나.”

나바르도제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이르라는 호칭은 아들의 별명인 듯했다. 평정을 되찾은 나바르도제가 로난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기소개는 필요 없겠지. 원하는 이름으로 부르거라. 다시 한 번 미안하구나.”

“로난이에요. 진짜 괜찮으니까 안 그래도 돼요.”

“그래, 반갑다. 로난.”

나바르도제가 웃었다. 이렇게 보니 그냥 예쁘장하게 생긴 사모님이었다. 문득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본 필멸자가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의문이 들었다.

‘진짜 뒤질 뻔했네.’

물론 일단락된것과는 별개로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로난은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만큼은 나대면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로난은 그녀가 등을 긁는 정도의 수고만으로 자신의 뼈와 살을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멈춰 있는 학생들을 둘러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저기, 이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된 거죠?”

“걱정하지 말거라. 잠시 범위 내의 시간을 느리게 한 것뿐이니까. 마법이 풀리면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일을 이어나갈 거란다.”

나바르도제는 그들의 건강에는 어떤 지장도 없을 것이라는 설명과 더불어 지금 필레온에서 움직이는 인간은 로난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다시 한번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8서클 마법사인 크라티르도 이 말도 안 되는 마법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나바르도제가 말을 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겠구나. 이르는 내 마지막 자식이다. 타락한 서리 정령에게 당할 뻔했다고 들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지. 뭐라고 감사를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별 거 아니었어요.”

“좀 더 자긍심을 가져도 좋단다. 네가 아니었다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을 테니까. 글라시아의 왕국을 멸망시키지 않아도 되어 얼마나 다행이인지.”

로난이 굵직한 침을 삼켰다. 담담한 말투에 허언이나 과장 따위는 섞여 있지 않았다. 글라시아는 서리 정령왕의 이름이었다. 계약을 맺은 이는 역사를 통틀어 세 손가락에 꼽고, 그녀를 신으로 삼아 숭배하는 신자도 상당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였다.

나바르도제는 그런 글라시아를 누르면 들어가는 똑딱이 단추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왜 구원자가 그녀에게 굳이 사과를 전하러 갔는지 알 수 있었다.

“이르가 네 이야기를 정말 많이 했단다. 세상의 넓이를 알게 되었다고 말이지. 나는 아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만큼이나 이런 깨달음을 준 것에 감사하고 싶구나. 내가 드래곤으로서의 오만함을 떨쳐내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거든.”

“별말씀을요.”

“후후, 겸손하구나. 그것 또한 우리는 끝내 갖추지 못할 미덕이지.”

나바르도제가 웃었다. 그녀는 아들의 가치관이 바뀐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로난은 솔직히 이타르간드가 겨울의 마녀에게 패배하고 돌아갔을 때 숙청당해서 벽난로 위에 걸릴 줄 예상하고 있었다. 왜 그런 거 흔하게 있지 않은가. 너처럼 무능한 놈은 우리 일족이 아니다! 같은 전개.

나바르도제가 한창 로난을 치하하던 와중이었다. 별안간 그녀의 후드 안쪽에서 붉은 빛이 새어 나왔다. 흠칫거린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오늘은 슬슬 돌아가봐야 할 것 같구나. 어찌 된 것이 갈수록 공세가 심해지는군.”

“공세요?”

“그래. 귀찮은 놈들이지. 내가 이래서 아드렌에도 잘 가지 못한다니까···.”

영문 모를 소리를 한 나바르도제가 후드를 벗었다. 적색 머리카락과 더불어 한 쌍의 뿔이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히 로브를 쓰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는데, 환각 마법의 일종 같았다. 하늘을 향해 멋지게 구부러진 뿔은 독버섯을 연상케 하는 불길한 적색으로 천천히 점멸하고 있었다.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내쉰 그녀가 로난을 마주 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원하는 걸 말해 보거라.”

“갑자기요?”

“그래. 내 아들을 구한 상은 줘야지.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느냐?”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이 또한 그녀의 성격처럼 예상외의 일이었다. 살려주는 것이 보상일 줄 알았는데 따로 하나를 챙겨준다 할 줄이야. 잠시 고민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럼···나중에 한 번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을까요? 하루 정도.”

“시간이라? 안 될건 없다만···그걸로 되겠느냐?”

“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무언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나바르도제의 호의를 사는 것 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어마어마한 보상이었다.

“···흥미로운 선택이구나. 대부분의 필멸자는 만질 수 있는 것을 원하던데. 역시 너는 뭔가 다르구나.”

“드려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래. 내가 조만간 내어 보도록 하마. 으음, 그나저나···.”

별안간 나바르도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로난의 얼굴을 뚫어져라 살피며 침음을 흘렸다. 당황한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왜 그러세요?”

“너, 어디서 나를 본 적이 있지 않느냐?”

“···제가 나바르도제 님을요?”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정말로 알아듣지 못할 소리였다. 우연히 폴리모프를 하고 돌아다니던 것을 마주친 적이 있나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나바르도제의 기운은 결코 헷갈릴 만한 것이 아니니까. 그녀가 먼저 손사래를 쳤다.

“아니다. 다음번에 이야기하자꾸나. 오늘 일은 아무쪼록 비밀로 해다오.”

“혀가 뽑혀도 안 말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고맙구나. 이르, 내일 보자.”

나바르도제가 까치발을 들었다. 피부가 가볍게 닿는 소리와 함께 이타르간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 어머니···!”

“유년기의 미숙함을 즐기거라. 아들아."

기어코 아들의 볼에 키스한 나바르도제가 등을 돌렸다. 본모습으로 변해서 돌아갈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공간 마법을 사용하여 자리를 떴다.

스아아···나바르도제 주위의 공간이 흐릿해지더니 그녀의 형체가 사라졌다. 머지않아 대기 중에 팽배하던 마나가 사라지며 정체되어 있던 시간이 원래의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아하하, 같이 가!”

“음? 달 위치가 좀 바뀌지 않았어?”

서늘한 밤바람이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멈춰 있던 학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행동을 이어 나갔다. 나바르도제의 말마따나 자기들이 마법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그때 어둠을 가르며 날아온 그림자 하나가 로난의 어깨에 착지했다. 시타였다.

“뺘하아앗!”

시타는 네 장의 날개를 펼친 채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바르도제의 기척이 사라져서 의아함을 느끼는 듯했다. 그 모습이 처음으로 경계 임무를 맡는 신병 같아 웃음이 나왔다.

“괜찮아. 이제 다 끝났어.”

“뺘우우···?”

로난이 시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시타는 그제야 가늘었던 눈매를 바로 뜨며 로난의 손등에 얼굴을 비볐다. 그가 이타르간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슬슬 돌아갈까. 이르.”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라.”

“좀 봐 줘. 이타르간드는 솔직히 너무 길잖아.”

“부르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오늘 본 것을 타인에게 발설한다면···너를 태워 죽일 테다.”

“무섭다 이르. 불은 뿜어도 좋으니까 키스만 하지 말아줘.”

“이놈!!”

참다 못한 이타르간드가 노호를 터뜨렸다. 인간의 성대를 통해 나오는 외침이라 해도 역시 드래곤은 드래곤이었다. 창문이 흔들릴 정도의 크기에 학생들의 이목이 쏠렸다.

“꺄아아악!”

“뭐, 뭐야?!”

귀가 시뻘게진 것이 어지간히도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한번 웃어젖힌 로난은 이타르간드와 티격태격 대며 대광장을 떠났다. 보름달에서 흘러나온 빛무리가 교정을 포근하게 뒤덮고 있었다.

****

입학식 날 아침이 밝았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서광이 진했다. 어젯밤에 워낙 많은 일이 벌어져서 그런지 평소보다 늦잠을 자고 말았다.

“흐아아암···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군···.”

로난이 기지개를 켜면서 중얼거렸다. 불의 어머니가 쩔쩔매며 사과하거나 사근사근하게 미소 짓던 모습은 꿈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도 굉장히 현실성이 없는 꿈.

‘오늘은 뭘 입고 오려나.’

아마 지금쯤이면 나바르도제가 필레온에 방문한다는 공지가 내려왔을 터였다. 여러모로 역대급 입학식이 되겠군. 그리 중얼거린 로난이 몸을 일으키던 와중이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난 님. 저에요.”

“아, 루시···들어와요.”

“문 좀 열어 주세요. 손을 쓸 수가 없어서···으으, 꽤 무겁네요.”

“음?”

로난이 문을 열었다. 메이드복을 차려입은 루시의 손에는 웬 고급스러운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상자를 건네받은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묵직하네. 이게 뭐예요?”

“후우···살았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파르잔이라는 곳에서 왔던데요?”

“파르잔?”

“네. 저는 대광장을 청소해야 해서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루시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송장에는 알로긴의 이름이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자이파보다 훨씬 상태가 심각했었다고 들었는데, 어찌어찌 살아난 모양이었다.

“늙은이가 명줄도 질기군.”

로난이 피식 웃었다.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헌데 그것과는 별개로 뭐가 들어 있을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뭘 보냈길래 이렇게 꽁꽁 싸놨담.”

상자의 표면에는 황제의 칙서에 걸려 있던 것과 같은 봉인 마법이 인챈트 되어 있었다. 로난은 어리둥절하면서 상자를 개봉했다. 내용물을 본 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오.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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