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불의 어머니(3)
#187
“오우, 시발.”
상자 안쪽을 본 로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단이 깔린 내부에는 까맣고 반투명한 날붙이가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다르만과 싸우면서 부러졌던 라만차의 파편이었다.
“이걸 용케도 찾았네.”
로난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솔직히 붕괴의 규모가 워낙 커서 다시는 못 찾을 줄 알았다. 아직도 노새처럼 일하고 있을 파르잔 관계자들의 모습이 안 봐도 선했다.
그는 바닥에 깔린 비단으로 조심스레 파편을 감쌌다. 내심 아쉬웠는데 잘 된 일이었다. 시타의 알껍데기는 두 번 다시 구할 수 없는 귀중한 소재니까. 틀림없이 재활용의 여지가 있을 터였다.
‘이번에는 도론 말고 다른 대장장이를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런데···.’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내용물에 비해 상자가 터무니없이 무거웠다. 원인은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라만차가 들어 있던 칸을 들어내자 그 아래 또 다른 공간이 나타났다.
“뭘 이렇게 많이 챙겼어.”
하얀 금속 파편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조각 하나하나가 제법 묵직한 것이 라만차와는 여러모로 반대되는 인상을 주었다. 역시 다르만과 싸우다 파괴되었던 이미르의 잔해였다.
‘이건 못 쓰겠네.’
파편을 살피던 로난이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 보내줘서 받기는 했지만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자신이 보기에도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무기로 복구될 여지가 있는 라만차와는 달리 아예 전부 녹여서 다른 물건을 만들거나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칼자루는 건재하다는 것이었다. 로난은 거기에 친친 감겨 있는 붕대를 풀어냈다.
금서 바쥬라를 오려서 만들어낸 소재. 자신의 두 번째 코어와 공명하는 힘은 아마도 여기서 나오는 것일 터였다. 공명이라는 단어를 곱씹던 로난이 손가락을 튕겼다.
‘꽤 유용하게 쓸 수 있을지도.’
자신의 생각대로만 된다면 제법 괜찮은 재활용이 가능할 것 같았다. 이미르가 품고 있던 힘은 결국 감각 공유의 일종이었으니까.
로난은 곧바로 그란 카파도키아에 보낼 제작 의뢰서를 작성했다. 이릴이나 루시처럼 무고하고 선한 이들을 위한 물건이었다. 언제 다시 필레온을 떠날지 모르니 서둘러 만드는 것이 능사였다.
이미르의 파편이 담긴 칸을 들어내자 바닥이 나타났다. 뭐가 적혀 있는 양피지 하나가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이건 또 뭐람. 로난이 양피지를 집어들었다.
- 성검의 주인. 44번 참가자에게.
알로긴의 편지는 담백했다. 반 장도 채우지 못한 줄글에는 자신과 파르잔을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와 근황 따위가 적혀 있었다. 미사여구 없이 본론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읽기가 편했다.
로난의 예상대로 원로들은 이번 습격 사태를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모든 대륙으로 네뷸라 클라지에와 그들의 특수 조직인 뤼코포스에 관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르만이 사용하던 검이나 단원들의 시신은 수거되어 분석 단계에 있다고 했다. 로난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분석에서 뭐가 좀 나오면 좋으련만.’
편지는 사태가 수습되면 성검을 한 번 보러 가겠다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악필에다 짤막했지만 진심이 꾹꾹 눌러담긴 글이었다. 불현듯 추신으로 덧붙인 글귀가 로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성검을 벼릴 만한 대장간을 소개해 주겠네. 약도를 함께 보내지.
그 뒤쪽으로는 자신을 비롯한 원로들이 추천장을 넣어 놨다는 말이 이어졌다. 편지 아래쪽에는 대장간의 위치가 표기된 약도가 동봉되어 있었다. 북쪽으로 해안선이 자리한 걸 보니 전술한 것처럼 대륙의 최북단인 헤이란에 세워져 있는 듯했다.
“북부라.”
로난은 흥미롭다는 듯이 턱을 매만졌다.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검객들이 이렇게까지 굴 정도면 어지간히도 대단한 대장간인 모양이었다.
전생에 징벌병으로 구르면서 북부에는 제법 체류했지만 헤이란까지 올라간 적은 없었다. 아데샨의 고향. 그리고 한때 자이파가 이끌던 수인 연합이 점거하는 땅. 어쩐지 다음으로 떠날 목적지가 벌써 정해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가죽옷을 한 벌 마련해야겠군.’
지도까지 빼내자 상자는 텅 비어 버렸다. 로난은 빠르게 알로긴에게 보낼 답장을 작성한 뒤 외출할 준비를 했다. 시간이 좀 남아 있었지만 슬슬 출발해야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럼, 가 보실까.”
채비를 마친 로난이 발걸음을 옮겼다. 기숙사를 나서는 순간 금빛 서광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날은 따스했지만 바람은 서늘했다. 마치 그가 입학했던 날처럼.
****
필레온 780기의 입학식은 늘 그랬듯이 대광장에서 진행되었다. 크라티르가 마법으로 만들어낸 관중석과 연단이 이미 설치되어 있었다.
특급 모험 동아리의 부원들은 이미 관중석의 가장 앞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로난을 발견한 아셀이 손을 흔들었다.
“로, 로난! 여기야!”
“빨리도 왔네.”
로난은 아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원래대로라면 신입생을 제외하고는 바로 윗 기수인 2학년만 참석하는 것이 의례였지만 수업이 없다면 자유롭게 입학식을 관람할 수 있었다.
마르야는 긴장감이 역력한 표정으로 엄지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로난과 대련할 당시 자리에 없던 슐리펜도 정보를 전해 들었는지 조용히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자고 있었을 오필리아도 꾸벅꾸벅 졸면서 앉아 있는 걸 보면 나바르도제를 보고 싶기는 한 모양이었다. 마르야가 로난을 돌아보며 말했다.
“로난. 정말로 그···용이 오는 게 맞아?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나도다. 졸업반이 입학식에 참석하는 것 자체를 이상하게 보더군.”
브라움 또한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나바르도제가 오는 것을 알고 있는 건 그들 뿐인듯 했다.
서서히 개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관중석에 들어서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한산한 풍경을 본 로난이 휘파람을 불었다.
“머리를 제법 쓰셨군. 크라티르.”
발 디딜 틈도 없을 거라는 추측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설마 학생들에게까지 정보를 통제할 줄이야. 하긴 괜히 알렸다가 난리가 나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질 테니 이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관중석을 둘러보던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맨 앞자리. 자신과 고작해야 다섯 칸 정도 떨어진 곳에 웬 코트를 입은 신사 한 명이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멋들어진 중절모가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로난은 단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하, 시발.”
로난은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저건 숨길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신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슐리펜이 로난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어디 가나.”
“잠깐만 다녀올게. 좀 있으면 나는 신경도 안 쓰일 테니까 집중이나 해.”
로난은 아무렇지도 않게 노신사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한순간 어디라 할 것 없이 모든 방향에서 매서운 살기가 전해져 왔다.
주변을 둘러보자 저마다 다른 행색을 한 사람들이 로난을 노려보고 있었다. 인자하게 생긴 학부모, 청소하는 메이드, 심지어는 일부 학생까지. 노신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날씨가 좋지?”
“그러네요.”
“표정이 미묘한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질문을 들은 로난이 코웃음을 쳤다. 이 아저씨가 진짜 뭐 하자는 건지. 이렇게 된 이상 본인이 만족할 때까지는 어울려줘야 할 것 같았다.
“그냥 3년 전이 생각나서요. 그때는 우리 누나가 여기에 앉아서 제가 입학하는 걸 봤었죠.”
“허허, 그거 감회가 새롭겠군. 꽤 나이가 있어 보이는데 여긴 어쩌다가 왔나.”
“친구가 입학한대서 보러 왔어요. 어머니가 좀 잘나가시는 분인데, 기어코 학부모 참관을 하겠다 하셔서 고민이 많더라구요.”
“그런가···나와 비슷하구만.”
신사가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로난도 이 상황이 우스워 피식피식 웃었다. 앞머리를 쓸어넘긴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이렇게 뵈니까 또 참신하네요. 폐하.”
“도저히 안 올 수는 없어서 말이지.”
노신사로 변장한 황제가 신문 한 장을 넘겼다. 그 순간 로난을 콕콕 찌르던 살기가 누그러졌다. 그를 째려보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저마다가 맡은 배역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 꼴···아니, 모습은 뭐에요?”
“어울리지 않나? 이런 걸 꼭 해보고 싶었다네.”
“제국은 어쩌고요?”
“불의 어머니를 뵙는 것이 나랏일이 아니고 뭐겠나. 짐···아니, 나는 상당히 중요한 안건이라 생각하네만.”
“그건 그렇네요.”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할 수가 없는 정론이었다.
발론44세는 변장을 해서 입학식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나바르도제는 뵈야 하지만 소란을 피우고 싶지는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열댓 명의 금군이 위장한 채 호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몸은 다 나은 것 같아 다행이군. 걱정했다네.”
“그냥 조금 무리했던 것 같아요. 황송하옵니다···음, 이렇게 하는 거 맞나요?”
“보통 다리를 꼬고 하지는 않지. 주머니에서 손도 빼야 하고.”
“아하.”
“물론 지금의 나는 상인 길드 소속 드니펜 로스터 경이니 상관 없다만은.”
황제가 끌끌 웃었다. 어지간히도 역할극에 심취한 듯했다. 바로 뒤에 자리를 잡은 경호원 몇 명만 로난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보고서는 잘 읽었다네. 첫 임무부터 대단한 공을 세워 주었더군.”
“별말씀을요.”
“그대의 노고를 치하해야겠지. 뭐든 필요한 걸 말해 보게.”
“딱히 필요한 건 없는데···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바르도제도 그렇고 요즘따라 뭘 주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삼십 분 정도가 지나자 관중석이 가득 찼다.
신입생들을 깜짝 환영해 줄 2학년들이 대광장의 한편에 도열했다. 크라티르가 그들을 투명한 장막으로 뒤덮은 지 머지않아 파릇파릇한 신입생들이 대광장에 들어섰다.
“오오, 저기 왔군.”
개중에는 아직 제도가 겨울에 삼켜져 있을 때 본 면면도 있었다. 이타르간드는 적당히 인파의 중간에 섞여서 평범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별일이야 있겠어.’
내일이면 죽을지도 모르는 징벌 부대의 신참을 받는 것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연단에 올라선 크라티르가 신입생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반갑습니다. 필레온 아카데미의 현 교장 크라바 크라티르입니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표정이 한결 나아진 걸 보니 어찌어찌 해결한 모양이었다. 나바르도제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소식을 전해들었는지 구토하고 싶을 정도로 긴장한 교직원 일동이 그의 뒤편에 늘어서 있었다.
“먼저, 입학식을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분께 소개해 드릴 분이 있습니다. 아주 먼 곳에서 오신 분이니 큰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손님?”
“뭐야, 누구지?”
지금까지는 없던 절차에 관중석이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크라티르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나름대로 기획한 연출이 있는 듯했다.
갑자기 몸을 돌린 그가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옆 공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분명 배경이던 공간이 살얼음처럼 바스라지며 옥좌를 연상케 하는 으리으리한 의자가 나타났다. 십호흡한 크라티르가 입을 열었다.
“자, 모시겠습니다. 태초의 화염이자 신의 날개, 나바르···음?”
“뭐야?”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말을 잇던 크라티르의 얼굴이 굳어졌다. 의자는 모습을 드러냈지만 앉아 있어야 할 나바르도제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가, 갑자기 어디를···.”
교직원들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일이 틀어지고 있었다. 그가 벙쪄 있는 신입생들을 향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파아아아-! 별안간 대광장의 하늘에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동시에 불어닥친 마나의 폭풍이 대광장을 휩쓸었다.
“꺄아아아아악!”
“가, 갑자기 뭐야?!”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깜짝 환영을 위해 크라티르가 설치해 놓은 투명 장벽도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정체가 탄로 난 2학년들이 혼란에 빠졌다.
“자, 장막이?!”
“내 동아리 홍보 현수막 날아간다!”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선배들의 모습에 신입생들이 놀랄 만도 했지만 불행히도 지금은 경악이라는 감정을 할애할 만할 곳이 너무 많았다.
시야를 전부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마법진은 선 하나하나가 용암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곧이어 마법진의 중심이 벌어지며 거대한 드래곤의 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만으로 어지간한 건물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크기에, 결국은 크라티르마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허어어억!”
“···엄마.”
하늘에 시선을 둔 이타르간드가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이제는 기절하는 사람마저 속출하고 있었다.
그때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던 드래곤의 몸에서 강렬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한순간이지만 대광장에 있던 모두가 눈을 감았다.
머지않아 눈을 뜬 사람들은 비어 있던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붉은 드레스, 그리고 우아하게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조금 전에 본 드래곤의 비늘과 같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크라티르를 도도하게 내려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잠시 일이 생겨서 급히 처리하고 왔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크라티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무래도 합의한 것과는 상당히 다른 연출인 듯했다.
“아···아아···.”
이미 다 망한 것 같았지만 그는 어른이었기에 상황에 책임을 질 의무가 있었다. 크라티르가 어색한 웃음을 머금은 채 신입생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환영해 주십시오. 나바르도제 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