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92화 (192/333)

192. 하늘이 얇아지는 곳(3)

#192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 보자꾸나.”

나바르도제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거대한 문짝은 수백 년간 방치되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열렸다. 내부를 본 로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왜 이렇게 평범해?’

두 사람이 지내기 딱 좋은 넓이의 방에서는 쾌적하다는 이상마저 느껴졌다. 자로딘이나 세크리트 교수의 집무실처럼 괴상망측하게 생겨먹었을 거라는 로난의 예상과는 달리 정말 필요하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물건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기다란 돌 책상이 있었고, 식사를 위한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개인용 침대가 두 개 있는 걸로 봐서는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아니면 협소함에서 기인한 밀착을 즐기는 변태들이었거나.

힐긋 쳐다본 책상에서는 먼지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백 년 동안 방치되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청결을 유지하는 마법을 걸어 뒀단다. 혹시라도 그 아이가 돌아올 수도 있으니···뭐, 그 아들이 나를 찾아왔으니 어느 정도는 목적을 달성했다 할 수 있겠구나.”

나바르도제는 그리움이 뚝뚝 묻어나는 눈빛으로 방 곳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버지라는 작자와 함께한 시간은 고작 3년. 드래곤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할 시간일 텐데 어지간히 정이 많이 든 모양이었다.

“여기는 이 요새가 지어지기 전부터 존재하던 방이다. 여기를 중심으로 퍼올린 지반 위에 드리무어가 세워졌지. ■■는 이 요새의 설계자이기도 했거든.”

“아버지가 이 요새를 설계했다고요?”

“그래. 하늘 너머에서 오는 적을 막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면서 나를 필사적으로 설득했지. 자기 말이 거짓일 경우 잡아먹으라는 배짱이 마음에 들어서 수락했는데, 보다시피 올바른 판단이었단다.”

나바르도제가 픽 웃었다. 불의 어머니에게 저딴 소리를 지껄인 걸 보면 보통 미친놈이 아닌 것 같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제 말해 보거라. 네가 엘시아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아, 그러니까요.”

한순간 로난의 말문이 막혔다. 사실대로 털어놓기가 참 복잡한 이야기였다. 현 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로 추정되는 아버지가 내게 저주를 걸었고, 저주를 풀기 위해서 심상 세계를 다녀왔는데, 거기서 네뷸라 클라지에 초대 교주의 몸에 빙의했고, 그의 오른팔이었던 여인이 엘시아라는 정신 나간 소리를 설득력 있게 전달해야 했으니.

‘아들을 구해준 사람을 뒤통수치지는 않겠지. 아까 전에는 딸래미까지 구해 줬는데.’

본인이 가지고 있는 가장 깊은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으니 더욱 신중해야 했다. 그래도 로난은 이내 마음을 굳혔다. 사실 나바르도제의 결백은 전생에서 이미 증명되어 있었으니까.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했지.’

그는 두아루와 나바르도제의 싸움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저런 죽여주는 화염 주머니를 달고 있는 사람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로난은 지금까지 벌어졌던 일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정보에 혼란을 줄 수 있는 회귀했다는 사실만 제외하고.

“저주···? 아하. 그래서 네가 ■■의 이름을 알아듣지 못하는 거구나.”

“그거 말고도 많아요. 혹시 그 작자가 저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던가요?”

“유감스럽게도 그렇단다. 얼마 전에 자식을 가졌고, 만약에 보게 된다면 잘 부탁한다는 말만 남겼지.”

나바르고제가 고개를 내저었다. 불현듯 궁금증 하나가 로난의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줄곧 당연한 듯이 넘어갔기에 좌시하고 있던 의문이었다.

“잠깐,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나바르도제 님은 그···어쩌구저쩌구를 제 아버지라 확신하는데, 혹시 생김새 말고도 근거가 있나요?”

“■■가 마지막으로 나를 찾아온 시기와 네 나이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이지. 고작 십수 년 전의 일이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단다. 설마 수명에 대해 물어보는 건 아니겠지? ■■는 너도 익히 아는 로르혼처럼···”

“아아, 그건 알아요. 자연사는 안 하잖아요.”

애초에 로브쟁이가 초월자가 아니었다면 하지 않았을 질문이었다. 이쯤 되면 알아들을 수 없는 뭐시깽이가 아버지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나바르도제가 말했다.

“엘시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그녀는 천 년 전쯤에 ■■와 함께 나를 찾아왔단다 ■■의 조수라고 자신을 지칭했었지.”

“조수라.”

“그래. 어쨌든 순식간에 사라진 ■■와 달리 엘시아는 최근까지 여기 드리무어에 있었단다. 내가 봤던 정령사 중 가장 뛰어났는데, 갑자기 떠나서 많이 아쉬웠지.”

“최근이라면 언제쯤이죠? 드래곤의 기준이라면 슬플 것 같은데.”

“오 년 쯤. 정말로 얼마 되지 않았단다.”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확실히 오 년이면 인간의 기준으로 봐도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다. 만약 엘시아라도 찾을 수 있다면 하루빨리 만나봐야 했다. 당장 물어보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다.

결국 네뷸라 클라지에는 탈퇴한 건지, 당신과 함께 찾아온 사람이 정말로 로브쟁이가 맞는지, 지금의 네뷸라 클라지에를 이끄는 사람은 누구고 왜 아버지를 도왔는지와 같은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말 그대로 키를 쥐고 있는 여인이었으니. 일말의 가능성을 발견한 로난이 눈을 빛내며 질문했다.

“혹시 엘시아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나요?”

“기억하고는 있지. 별 도움은 안 될것 같다만. 단순히 북부라고만 대답했거든.”

“북부?”

“그래. 방을 뒤져보면 뭐가 나올지도 모르겠구나.”

나바르도제는 떠나는 그녀에게 막대한 퇴직금을 주면서도 질문은 딱히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에.

방을 둘러보던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별달리 무언가를 숨길 공간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앞머리를 쓸어넘긴 그가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나바르도제 님. 한번 찾아볼게요.”

“고맙기는. 아는 걸 알려줬을 뿐이란다.”

“그, 하나만 더 물어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물론이지.”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바르도제의 얼굴이 굳었다. 정곡을 꿰뚫는 화살 같은 말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입꼬리를 어색하게 끌어올렸다.

“···눈치챘느냐?”

“네. 오늘 균열이 발생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서요.”

“아하하···눈썰미가 좋구나.”

나바르도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면목 없다는 듯이 시선을 피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길어봤자 5년···아니, 7년 정도일까.”

“역시.”

로난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브니하르도와 이라니엘의 대처가 지나치게 능숙했을 때부터 넌지시 눈치채고 있었다. 두 개의 하늘을 가로막는 방어막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바르도제가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방어막의 노화도 노화지만 그 역겨운 놈들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란다. 불과 백 년 전까지만 해도 브니하르도의 불이 태우지 못하는 괴물은 없었거든. 나중에는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개체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지.”

“방어막을 수복하거나 강화할 수는 없나요?”

“불가능해. ■■는 그걸 갑옷이라 칭했지. 우리가 살아가는 별이 탄생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방어막인데,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복구할 수가 없다는구나.”

나바르도제는 갑옷이라 불리는 초자연적인 방어막이 별 전체를 고르게 감싸고 있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 불씨가 피어오르기도 전에 존재하던 방어막은 그가 조금 전까지 베어냈던 외부의 적들로부터 별과 그 위에서 살아가는 생명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헌데 모종의 이유로 갑옷의 일부가 마모되어서 이제는 외부의 적이 침공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었다. 하늘 밖의 하늘에서 온 괴물들은 아무리 잡스러워 보이는 놈들도 터무니없이 강한 힘을 품고 있었기에, 이들의 침략을 방치한다면 제국은 물론 세상이 망해버릴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드리무어가 세워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면서 얇아진 하늘을 막아 보기 위해. 전생의 기억을 되짚으며 퍼즐을 맞춰 가던 로난이 입매를 뒤틀었다.

‘신기할 정도로 들어맞는군. 7년이라.’

앞으로 7년이면 거인들이 내려오는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다른 건 몰라도 드리무어 방어선의 붕괴가 강림 사태와 연관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 대머리들도 놈들과 같은 부류일까. 하늘 너머에서 온···.’

괴물의 실체를 보는 순간부터 품었던 의문이었다. 물론 모든 면에서 날개 달린 대머리들이 압도적으로 강했지만, 원래의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특유의 이질감은 추악한 괴물들과 굉장히 흡사하게 느껴졌다. 설명을 마친 나바르도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서 ■■는 떠났다. 모두를 구하는 법을 찾아내기 위해서.”

“모두를 구하는 방법이요?”

“그래. 애초에 ■■가 여기에 기거했던 것도 그 연구를 위해서였으니. 별의 갑옷에 버금가는 방어막을 만든다거나, 자신과 같은 힘을 다른 이들이 다룰 수 있도록 한다든가. 하여튼 굉장한 아이였지.”

별안간 나바르도제가 로난의 뺨을 어루만졌다. 여전히 따뜻한 손이었다. 로난은 그녀가 자신의 얼굴에서 아버지와의 추억을 찾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귓볼을 만지작거리던 나바르도제가 무언가 생각난 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야, 네게 줄 상이 떠올랐다.”

“네?”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나바르도제가 눈웃음쳤다.

“일단 침대에 눕거라.”

“···네?”

“어서. 언제 놈들이 다시 쳐들어올 지 모르니 서둘러 끝내자꾸나.”

나바르도제의 말투에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한결 다르게 보였다. 밀실, 침대. 그리고 미모의 귀부인. 하필이면 조명도 붉은빛을 띠어서 사고가 한결 더 편향적으로 기울었다. 로난이 당황하며 뒷걸음질쳤다.

“서, 서둘러서 하는 건 자신이 없는데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참, 웃옷도 벗어라.”

“알아서라니, 그런···!”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이것이 드래곤 유부녀인가? 이 사악한 용이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나를 지하로 유인한 건가? 로난은 불멸의 살아가는 종족의 치밀함에 감탄하면서도 상의를 훌렁 벗어 던지고 누웠다.

“누웠습니다.”

“그래. 착하지. 몸에서 힘을 빼거라.”

워낙에 흉악한 화염 주머니 탓에 누워서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아아! 이래서 모르는 사람을 함부로 따라가지 말라는 누나의 말을 들었어야 하는 건데!

거부하면 잿더미가 될 터이니 이거 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필사적으로 통탄한 표정을 짓던 와중이었다. 나바르도제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대사가 흘러나왔다.

“너를 옭아매는 저주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네? 갑자기 무슨···.”

“■■도 참 지독하더구나. 아무리 뜻이 있다고는 해도 아이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나는 ■■를 믿지만, 이건 조금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바르도제가 혀를 찼다. 로난은 고개를 쭉 빼 들고 나서야 그녀가 자신의 심장이 있는 자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보상이라는 것이 설마···저주를?”

“그래. 하지만 저주를 강제로 뜯어낼 수는 있어도 네 몸이 버티지 못하겠지. 하지만 딱 하나, 불에서 기인한 주술이 있더구나. 그거 하나 정도는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유감스럽게도 로난이 추측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아쉬움이 잊힐 정도로 그녀가 제안하는 보상은 굉장한 것이었다. 감정을 진정시킨 로난이 그녀에게 물었다.

“···제가 뭘 하면 되죠?”

“아무것도. 말했다시피 힘을 빼고 누워 있으면 된다.”

“그거 참 간단해서 좋네요.”

믿어지지가 않았다. 저주 하나를 풀 때마다 온갖 염병을 떨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해주를 하게 될 줄이야. 나바르도제가 로난의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긴장을 풀어라. 아픈 건 처음뿐이니까.”

“아까부터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거죠?”

나바르도제는 대답하는 대신 웃음을 흘렸다. 레드 드래곤 특유의 체온이 심장까지 전해져 오고 있었다. 로난의 심장을 면밀하게 살피던 나바르도제가 질린다는 듯이 실소했다.

“지금 보니 키우는 게 참 많구나. 이러기도 쉽지 않은데.”

“저라고 이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저주는 모두 여섯 개···어떻게 이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몇 개는 서로 뭉쳐서 코어화가 이루어졌고···음, 이건 뭐지? 낯이 익기는 한데 뭔지를 모르겠구나.”

나바르도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조차 모르는 무언가 심장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유력 후보가 떠오른 로난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나바르도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뭐, 별 상관은 없지만 말이지.”

“으윽?!”

찰나 그녀의 손이 확 붉어졌다. 맹렬해진 열기가 로난의 심장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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