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98화 (198/333)

198. 북부로(4)

#198

카라벨 상단과 동행하는 것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괜찮은 판단이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크게 성장한 상단은 용병들에게 어지간한 여관보다 훌륭한 침구와 식사를 제공했다.

룬달리안까지. 그러니까 제도에서 연결한 길이 이어지는 동안은 안전이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관광을 왔다 해도 될 정도로 편안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여정이 시작된 지 아흐레 되는 날의 오후였다. 슬슬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공기가 서늘해지고 있었다. 모닥불 앞에서 익어가는 고기 꼬치의 모습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얌마, 뭔 놈의 고기를 이렇게 크게 썰어놨어. 내가 사자냐?”

“맛만 있으면 됐지 뭐 어때. 그리고 썬 게 아니라 손으로 찢어서 뭉친 거야.”

“하여튼 힘만 더럽게 좋아서는···.”

로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른 주먹만 한 고기 경단은 인간보다는 바렌이나 자이파 같은 수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요리 같았다.

마르야가 식사 당번을 하면 늘 이런 요리가 나왔다. 근육질인 멧돼지 고기를 맨손으로 찰흙처럼 다루는 것은 이 중에서 그녀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르야는 꼬치 하나를 집어 들고는 로난에게 내밀었다.

“시끄럽고 입이나 벌려봐. 아~”

“하여튼.”

로난은 투덜거리면서도 결국에는 입을 벌려 고기를 물었다. 한입에 넣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기에 사과처럼 조금씩 베어 물어야 했다. 조용히 우물거리던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

“이히, 그렇지?”

예상외로 부드러운 데다 양념도 일품이었다. 히죽 웃은 마르야가 로난의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다. 이미 사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가만히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데샨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우으으···.”

아데샨은 근 아흐레 동안 에리가 설명했던 소꿉친구의 전략적 우위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심리적인 거리가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가끔은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문득 그녀와 눈이 마주친 마르야가 입을 열었다.

“맞아, 언니도 먹어요.”

“나, 나는 괜찮아. 지금은 배가 별로 안 고파서.”

아데샨이 손사래쳤다. 속이 쓰려서 그런지 음식 생각이 별로 나지 않았다. 그때 로난이 자신의 앞에 있던 꼬치 하나를 뽑아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러지 말고 먹어 봐요. 은근 맛있어요 이거.”

“로, 로난?”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사과만 한 고깃덩이는 자신의 눈앞에 머물러 있었다. 의미하는 바가 자명한 행동이었다.

“그, 그럼···한 입만.”

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고기를 베어 물었다. 로난은 그녀가 입을 뗄 때까지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훌륭한 맛에 아데샨이 입을 가리며 감탄했다. 아이 같은 반응을 본 로난이 낄낄거렸다.

“맛있죠?”

“응. 맛있어.”

아데샨이 배시시 웃었다. 9일간 누적된 고통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가끔 이런 이벤트가 발생하기에 신경쇠약에 걸리거나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 문득 그녀의 눈에 번들거리는 로난의 입가가 들어왔다.

“아, 기름이 묻었네. 잠깐만 있어 봐.”

“어엇.”

갑자기 다가온 아데샨이 손수건으로 그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확 가까워진 얼굴에 로난이 잠시 멈칫거렸다. 짙은 속눈썹 사이로 드리운 눈동자는 아름다운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아 씨. 내가 왜 이러지.’

기분이 묘해진 로난이 시선을 피했다. 최근 들어 생긴 증상이었다. 아데샨은 기름기를 꼼꼼하게 닦아낸 뒤에야 얼굴을 뗐다.

챙겨 주는 일에 익숙해진 그녀는 이것이 입에 음식을 넣어 주는 것만큼이나 과감한 행동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마르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호라···.”

어찌 됐건 여정은 이어졌다. 마차 바퀴가 북쪽으로 구를 때마다 점점 주변의 풍경은 삭막하게 변해갔다. 로난과 아데샨은 서로 마주 보며 앉은 채 천천히 움직이는 바깥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팔을 뻗은 로난이 저 멀리 솟아 있는 설산을 가리켰다.

“저기를 넘어가면 투칸 고원이에요. 좆같은 야생 웨어 울프들의 본산과 매우 매우 가까운 곳이죠. 사람이건 짐승이건 가리지 않고 찢어 먹으니까 조심해야 해요.”

상단의 목적지인 룬달리안이 자리한 곳이기도 했다. 아데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응. 고마워.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

“저기서 일 년 가까이 구른 적이 있었거든요. 선배랑 꼭 닮은 사람의 명령으로.”

“···응?”

“농담이에요.”

전생을 반추한 로난이 실소했다. 당시에는 대령이던 아데샨의 명령을 처음으로 받아서 간 곳도, 아르말렌 백작이던 마르야를 처음 만난 곳도 저 투칸 고원이었다.

임무는 광산 개발과 제국령 확장을 위한 돌이켜 보면 참 거지 같은 경험이었다. 웨어울프의 피로 칠갑을 하고 왔는데 씻을 물이 없어서 눈밭에서 뒹굴고는 했었지. 징벌병 동기들도 정말 많이 죽은 장소였다.

‘이번에는 좀 무탈히 넘어가면 좋으련만.’

그때만큼 빡세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금이 한참 과거 시점이었으니 그 털북숭이들의 세력도 예전처럼 강대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로부터 사흘이 더 지난 날의 밤, 카라벨 상단은 겨울의 시작점인 아스탄을 넘었다. 아직 눈이 녹지 않은 대지가 그들을 맞이했다. 달이 뜨는 밤마다 들려오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그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

해가 저물었다. 구름이 가득 낀 밤하늘에서는 별과 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선두에서의 종소리와 함께 상단의 행렬이 멈춰섰다. 두온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겠습니다!”

눈으로 뒤덮인 평야가 사위를 향해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서는 룬달리안의 불빛이 지상에 뜬 별처럼 아롱이고 있었다. 아스탄을 떠난 지 닷새 만에 진입한 투칸 고원이었다.

마부들은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고삐를 잡아당겼다. 열두 대의 마차는 원 모양의 대형을 이루며 야영할 준비를 했다.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서자 상인과 용병들이 기지개를 켜며 마차에서 내렸다.

“으하아아암···내일이면 도착하는 건가?”

“갑자기 아이스 드래곤이 와서 상단을 모조리 얼려 버리지만 않으면 말이지. 딱 지금처럼만 가면 좋겠군.”

“젠장, 룬달리안에도 맥주 정도는 팔겠지? 털북숭이들도 술은 마실 거 아냐.”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아무리 할 일이 없고 복지가 좋다 하더라도 상단 호위는 여러모로 고된 일이었다. 돌아가면서 불침번도 서야 했거니와 상대하게 될 적이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몹시 높았다.

“엇차.”

마지막까지 주변을 경계하던 로난이 마차 지붕에서 뛰어 내렸다. 숨을 깊게 들이쉬자 눈싸라기가 낀 찬바람이 폐부를 휩쓸었다. 그가 아데샨을 돌아보며 말했다.

“드디어 내일이네요.”

“응···고생 많았어.”

짙은 눈그늘이 두 사람의 얼굴에 드리워 있었다. 그들은 인간에게 적의를 품은 수인들이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닷새간 벌어진 가장 큰일이라고는 대머리 용병의 머리를 바위로 착각한 검독수리가 그 위로 토끼 한 마리를 떨어뜨린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로난과 아데샨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눈가를 닦아낸 마르야가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을 데려오길 잘했어. 너무너무 고마웠어.”

“놔라. 숨 막힌다.”

“아하하···우리가 오히려 신세를 졌는걸.”

저항에도 불구하고 마르야는 그들을 놓아 주지 않았다. 이 정도까지 열심히 해 줄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다소 물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은혜는 꼭 갚을게. 카라벨 상단의 차기 단장으로서의 약속이야. 그래, 이번에 가는 대장간에서 드는 비용은 모두 내가 지불할게.”

“뭔 은혜를 갚냐. 서로 좋자고 한 일인데.”

“시끄럽고 그냥 주면 받기나 해.”

마르야가 오른팔에 살짝 힘을 주었다. 목이 졸린 로난이 켁켁거렸다. 내일 낮이면 카라벨 상단은 룬달리안에 도착할 터였다. 각자의 길로 향하게 되는 분기점이었다. 마르야가 말했다.

“두 사람은 이제 좀 자. 오늘 우리 마차 불침번은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설 테니까.”

“안 그래도 돼 마르야. 얼마든지 깨워.”

“본인이 고생하겠다는데 내버려 둬요. 그래, 나도 꿀 좀 빨아 보자.”

로난은 낄낄거리며 마차 안으로 향했다. 머뭇거리던 아데샨도 그를 뒤따랐다. 돌이켜 보면 객지에 나온 이후부터는 제대로 잠을 청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벽에 기대앉았다. 엉덩이가 바닥에 닿는 순간 피곤함이 확 몰려왔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다.

“고생했어요. 선배.”

“로난···너도.”

아데샨은 졸음을 못 이기고 꾸벅대고 있었다. 반쯤 풀린 눈이 제법 귀여웠다. 아니지, 귀엽다니. 나도 어지간히 졸린 모양이군. 앞머리를 쓸어넘긴 로난이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헤이란으로 갈 텐데 괜찮아요? 지금처럼 편하게 못 지낼 거에요.”

“그야 물론이지···애초에 그렇게···듣고 왔는걸.”

“그럼 다행이구요. 또 같이 잘 해봐요.”

“헤헤···그래. 나는 지금도 즐겁지만, 그 편이 더···.”

끝내 말을 맺지 못한 아데샨이 고개를 떨구었다. 머지않아 고롱거리는 숨소리가 마차 안에 번지기 시작했다. 점점 무거워지던 로난의 눈꺼풀이 마침내 닫혔다.

“······.”

적막이 내려앉았다. 달빛조차 없는 밤이라 짐마차 안쪽은 완벽한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무로 된 벽 너머에서는 바람이 우짖는 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띄엄띄엄 눈앞에 펼쳐지는 꿈의 세계 속에서, 로난은 그림자로 얼굴이 뒤덮인 아버지와 자신의 입가를 닦아 주는 아데샨의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주먹을 꽂았고, 아데샨에게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간이 모래처럼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불현듯 눈을 뜬 로난이 입을 열었다.

“선배.”

“응. 마흔 세 명이야.”

아데샨은 이미 깨어 있었다. 그녀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구체적인 숫자에 로난이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빌어먹을···많이도 몰려왔네.”

“뭐야, 아직도 안 자고 있었어?”

말소리를 들은 마르야가 마차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두 사람과 달리 그녀는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난은 묵묵히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습격이야. 그것도 제법 솜씨가 있는 놈들. 기척을 이렇게 죽이기도 쉽지 않은데. 마법사라도 있는 건가.”

“···뭐?”

마르야의 얼굴이 굳어졌다. 불현듯 로난이 짐마차의 천장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푹! 검끝이 나무를 부드럽게 꿰뚫음과 동시에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크허어어엉!”

인간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곧바로 뽑아낸 라만차는 진득한 적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검붉은 선혈이 콸콸 쏟아졌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펼쳐진 유혈 사태에 마르야가 뒷걸음질쳤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기습이다! 다들 일어나!!”

로난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큰 소리로 외쳤다. 머지않아 상단 전체가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쾅! 문짝을 걷어차서 부순 그가 지붕 위로 도약했다. 가죽옷을 입은 웨어울프 한 마리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져 있었다.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버둥거리는 걸 보니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웨어울프가 핏발 선 눈으로 로난을 노려보았다.

“크르르륵! 인간···!”

“에이, 시발.”

어쩐지 일이 잘 풀리나 싶었다. 로난은 말없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서걱! 깔끔한 호선이 그려짐과 동시에 웨어울프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됐다. 데굴데굴 구르던 머리통은 자연스레 마차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칼을 한 바퀴 돌려 잡은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다른 웨어울프는 보이지 않았다.

‘척후병이었나 보군. 아무리 가장 날랜 놈을 뽑는다지만···.’

믿을 수 없는 은신 실력이었다. 로난은 머지않아 고원의 서편에서 자신이 찾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수십 쌍의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얼추 세어 보니 아데샨의 말마따나 정말 마흔 마리 정도 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뒤따라서 지붕에 올라온 마르야가 기겁하며 물었다.

“저, 저게 다 뭐야?”

“도적떼지 뭐.”

마흔 쌍의 안광은 긴 꼬리를 끌며 상단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뎅-! 뎅-! 뎅-! 뒤늦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에서 깬 용병들이 우왕좌왕하며 뛰쳐나왔다.

철컥. 아데샨이 쇠뇌를 장전하는 소리가 지붕 아래에서 들려왔다. 어둠 한복판을 응시하던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화르륵! 선연한 주홍색이 검신을 물들였다. 한 점의 빛도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 평원에서 라만차의 빛무리는 등대처럼 돋보였다. 사위가 밝아짐과 동시에 뼈와 가죽으로 만든 옷을 걸친 수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아아아!”

“크헝!”

불빛에 노출된 그들은 흡혈귀라도 된 것처럼 질색하며 으르렁거렸다. 대부분은 웨어울프였고, 웨어폭스나 웨어베어도 한두 마리씩 끼어 있었다. 복장에 새겨진 문양을 보아하니 전생에서는 만난 적 없던 부족 같았다. 로난이 말했다.

“오랜만이네.”

“크르륵!”

수인들의 이목이 로난에게 집중되었다. 빛을 받은 이빨들이 섬뜩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아마도 말을 할 줄 알 터였지만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번에도 역시 대화로 풀 여지는 없어 보였다.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잘 됐어. 칼을 벼리기 전에 피를 좀 먹여 놔야지.”

“커허어엉-!!”

살의로 점철된 포효가 밤하늘 아래 울려 퍼졌다. 마흔 마리의 야수가 노도처럼 달려들었다. 차분히 간격을 재던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