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북부의 왕(5)
#211
“반갑다. 내 모든 것을 망쳐 놓은 버러지들아.”
“바르카.”
로난이 다급하게 모퉁이를 돌았다. 바르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반짝거리는 마나, 그리고 자이파와 흡사한 기척만이 저 어둠 너머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쥐며느리 같은 새끼야, 이리 안 나와?”
“나는 바보가 아니다 로난. 네 칼솜씨와 그 기묘한 힘을 경험하고도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영리한 생각이 아니지. 네 능력은 필히 시야나 그 빛에 닿는 존재를 끌어들이는 것일 터.”
로난의 눈이 커졌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저 짝퉁 자이파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러의 능력을 단번에 간파당했다는 것이었다. 바르카가 말했다.
“강력한 능력이지만 파훼법은 간단하지. 둘 중에 어느 쪽이든지 네 앞에 서지만 않으면 되거든.”
“똥이 굵어서 좋겠군. 내 이름은 누가 알려준 거냐.”
“하, 뤼코포스를 둘이나 치워 놓고 모르기를 바란 건가? 교단의 모든 이가 너를 노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내 멍청한 형님이 편지로 언질한 것도 있고 말이지.”
“형님이면 자이파가 나에 관해서 이야기했다고? 그 작자도 니들이랑 연관되어 있냐?”
“하하하···글쎄.”
긍정하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로난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는 것으로 의심을 억눌렀다. 저것 또한 심리전일 가능성이 있었다.
‘침착해.’
아무래도 귀찮은 싸움이 될 것 같았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형 쪽이랑은 다르게 머리를 적극적으로 쓰는 놈이었다.
정신을 집중해서 놈의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려 했지만 이상하게 감지가 잘 안 되었다. 이 얼음굴 전체에 무슨 조치를 취해 놓기라도 한 건가. 일곱 개의 머리통을 힐긋 돌아본 로난이 입을 열었다.
“제이거는 네가 이렇게 만들었나?”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목을 자른 건 내가 아니지만.”
“왜 그랬지?”
“제이거는 말 그대로 구더기 같은 놈이었다. 사람을 모으는 재주 하나는 있어서 어찌어찌 써먹어 보려고 했건만,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마지막 순간에 배신하더군. 덕분에 내 계획의 대부분이 틀어졌어.”
말투를 미루어 보아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았다. 바르카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왕으로 죽었군 제이거. 혀를 한번 찬 로난이 말을 이었다.
“계획이라면 북부를 규합하는 거 말이냐?”
“거기까지는 내가 말해줄 이유가 없다. 보아하니 탈출을 위해 시간을 끄는 것 같은데, 헛수고라는 말을 먼저 해두지.”
“염병.”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실제로 그는 아데샨과 함께 살금살금 출구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놈의 아가리 속에 있어서 별로 좋을 것이 없었으니까. 시발새끼. 눈치 한번 빠르네.
‘젠장, 괜찮은 대화거리 좀 없나?’
최대한 출구 쪽으로 움직여 놓으려고 했는데 상황이 난처해졌다. 바르카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뚝 끊어졌다. 그가 악당스러운 작별인사를 하던 차였다.
“그럼 여기서 작별하도록 하지. 잘···”
“제이거를 꼭두각시로 내세워서 폭군으로 키운 뒤 죽이려고 했구나. 그러면 당신은 영웅으로 등극할 수 있으니까. 능력이 있음에도 세력을 키우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아.”
갑자기 끼어든 아데샨이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그녀는 어느새 자신의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
“선배?”
“왜냐하면 평범하게 굴어서는 자이파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거든. 아직은 자이파의 희생으로 얻어낸 평화에 만족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으니까. 북부에 무리하게 내린 저주도 언젠가는 인간과 제이거의 합작이었다고 밝힐 생각이었겠지.”
불안으로 흔들리던 눈동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주의를 끄는 데 성공했는지 상당히 긴 침묵이 이어졌다. 한층 더 사나워진 바르카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그때 있던 여자군. 정체가 뭐냐.”
“네게 모든 걸 빼앗긴 사람이야. 바르카, 하나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뭐냐.”
“왜 그렇게 북부의 규합에 집착하는 거지? 네 동포들에게 그런 짓을 해가면서까지 저지를 만할 일이야? 나중에 네 백성이나 군대가 될 사람들의 눈물을 짜내 가면서까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상당히 움직였음에도 워낙에 통로가 길고 구불구불해서 출구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으득. 어둠 속에서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튀겼다.
“···너희 인간, 특히 제국인들에게 지옥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모든 것이 별빛에 휩싸여 사라지겠지만, 그건 제국의 돼지들에게 너무 달콤하고 평안한 죽음이거든.”
“별빛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머지않아 알게 될 거다. 그리고, 그 증오스러운 자이파에게도···.”
바르카가 말꼬리를 끌었다. 로난과 아데샨의 미간이 동시에 좁혀졌다. 아까는 편지가 어쩌고 하더니만 이번에는 증오스럽다니,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하는지가 헷갈렸다.
‘이건···.’
문득 걸음을 옮기던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멀지 않은 곳에서 파도 철썩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쯤 되면 출구와 충분히 가까워진 것 같았다.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이 막 뛰쳐나가려는 차였다. 쿠궁! 난데없이 앞쪽의 얼음 천장이 무너지며 통로를 틀어막았다.
“썅, 뭐야?!”
로난이 반사적으로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급류처럼 쏟아져 나온 검기가 얼음 무더기에 적중했다.
콰아아앙! 차가운 파편이 비산하며 길이 뚫렸다. 하지만 곧바로 더 앞쪽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다시 앞을 틀어막았다.
“에라이, 시발.”
심지어 아까보다 더 잔해의 양이 많았다. 뚫고 나가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그때 그들이 지나온 뒤쪽에서도 비슷한 붕괴음이 울려 퍼졌다. 무언가를 감지한 아데샨이 다급하게 외쳤다.
“로난, 뭐가 나왔어. 이쪽으로 오는 중이야!”
“뭐라고요?”
로난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과연 그녀의 말마따나 기존에는 감지되지 않던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언가 빠르게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내장을 쥐어짜 내는 듯한 괴성이 얼음 굴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르르륵! 크아아악!”
“잡설이 길었군. 제이거에게 안부 전해라.”
찰나 바르카의 기척이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를 추격할 여력이 없었다.
통로 안쪽을 조준하던 아데샨이 쇠뇌를 격발했다. 푹! 화살촉이 살갖을 파고드는 소리와 동시에 형체를 갖춘 그림자가 바닥을 뒹굴었다.
“캐앵!”
제이거를 습격한 소년과 비슷하게 생긴 웨어폭스였다. 벌어진 입에서는 시커먼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기괴한 방향으로 돌아가 있는 관절이 눈에 띄었다.
“이건 그때 봤던···.”
작은 머리 한복판에는 아데샨이 쏜 쇠뇌가 굳건하게 박혀 있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파들거리는 걸로 보아 일격에 뇌가 파괴당한 것 같았다. 웨어폭스를 내려보던 아데샨이 눈살을 찌푸렸다.
“틀림없어. 이건 강령술로 만든 거야. 저주로 모자라서 흑마법이라니···.”
“형이랑은 전공이 많이 다르네요.”
웨어타이거 흑마법사라니 참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자 금빛 잔상이 그의 오른팔을 타고 어깻죽지까지 올라왔다. 일단 이 좆같은 냉동고를 탈출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럼 갈게요. 바짝 따라와요.”
그리 말한 로난이 출구 쪽으로 뛰쳐나갔다. 한순간 그의 손이 흐릿해지더니 직선 수십 가닥이 앞을 가로막은 잔해 위로 그어졌다. 로난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어깨로 잔해를 들이받았다. 콰아앙! 폭탄이 터진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얼음벽이 산산이 조각났다.
“세상에!”
아데샨이 감탄했다. 바렌의 오러로 강화된 신체 능력은 그런 무모한 일을 가능하게 했다. 불현듯 찢어지는 괴성이 앞쪽에서 울려 퍼졌다.
“크햐아아악!”
“그르륵, 키리릭!”
“가지가지 하는구만.”
전방의 광경을 본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뻥 뚫려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통로는 극심한 정체를 이루고 있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자욱한 시취가 훅 밀려왔다. 강령술로 되살아난 수인들이 통로를 한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게 다 어디서 나온 건지 의문을 품던 차였다. 콰장창! 저 앞쪽의 얼음벽이 파괴되며 웨어디어 한 명이 튀어나왔다.
“뮈익! 뮈이익-!”
“아하.”
아무래도 얼음덩이 군데군데 시체들을 묻어 놓았던 것 같았다. 원인 모를 기시감을 느낀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놈은 좀 익숙한데?”
“제이거의 방에 있던 수인들이야···!”
아데샨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살아 있는 시체 중에서는 분명 제이거의 방에서 봤던 놈도 포함되어 있었다. 철수한 것이 아니라 바르카에게 전멸당한 것 같았다. 갈기가 죄다 빠진 웨어라이온 하나가 갈라진 목소리로 뇌까리고 있었다.
“로난. 로난. 로난.”
“진짜 좆같은 새끼네 이거.”
바르카에 대한 혐오감이 더해지고 있었다. 사정은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는 없었다. 지면을 박차며 달려나간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넓은 반원을 그린 참격이 생기 없는 면면 위로 그어졌다. 퍼억-! 수인들의 머리가 아래턱만을 남긴 채 천장까지 솟구쳤다.
“캬아아악!”
머리 없는 몸뚱어리들이 일제히 쓰러졌다. 동시에 시체의 파도가 로난과 아데샨을 향해 들이닥쳤다. 앞쪽에서 오십, 뒤쪽에서 오십.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백 마리가 넘었다. 다시 한 번 검격을 뿌린 로난이 아데샨을 돌아보며 물었다.
“정신 장악은 안 통해요?”
“지성이 없는 시체들이라 안 돼···!”
“시발.”
무식하게 뚫고 가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았다. 로난은 몰려오는 시체들을 베고, 찌르고, 때로는 검기를 쏘아 가며 산산조각을 냈다.
이미 죽어버린 수인들은 숨을 쉬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있음에도 심장이 뛰고 숨소리를 내는 것은 단 둘뿐이라는 사실이 씁쓸하면서도 우스웠다.
기를 끌어모은 로난이 사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정확히 통로와 같은 폭의 검기가 전방으로 쏘아졌다. 붉은 초승달이 어둠 속에서 전진할 때마다 두 동강난 신체들이 팝콘처럼 튀어 올랐다.
“죽었으면 곱게 좀 가라, 좀!”
그럼에도 시체의 파도는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얼음벽이 깨지며 튀어나온 수인들이 토막 난 동료들의 몸뚱이를 짓밟으며 달려들었다. 준비를 정말로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전투가 지속될수록 상황은 불리해졌다. 두 사람의 몸은 썩은 피를 뒤집어쓰며 시커멓게 변했다. 썩은 피가 땀과 함께 증발하며 체온을 빼앗아 가고 있었다.
아데샨은 석궁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하며 분투하고 있었지만 이미 죽은 전사들은 끈질기게 들러붙었다. 퍼억! 사각에서 파고든 웨어울프의 앞발이 아데샨의 등을 후려쳤다.
“으윽!”
“뭐야, 괜찮아요?”
“괜찮아. 후우, 막았어!”
아데샨이 이를 악물었다. 다행히도 빠르게 채찍을 회전시켜서 방어한 덕에 충격을 반감시킬 수 있었다. 곧바로 날아든 로난의 찌르기에 웨어울프의 머리가 풍선처럼 폭발했다. 불현듯 의아함을 느낀 로난이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헷갈려서 그러는데, 지금 통로가 좁아지고 있는 거 맞죠?”
“응, 그런 것 같아···!”
게다가 착각이 아니라면 통로 자체가 좁아지고 있었다. 이 얼음 덩어리 전체에 무슨 마법이 걸려 있는 듯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곤란했다. 서둘러 탈출하지 않는다면 바르카를 놓치는 것은 물론이요 수인들의 시체와 함께 냉동육이 되어 버릴 터였다. 혈계침의 바늘은 천천히 북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자식 성격이면 틀림없이 우리가 죽는 걸 확인할 거야.’
아직 멀리까지 도망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함정이 작동하는 모습을 유유자적하게 감상하고 있을 것이다.
로난은 진심으로 바르카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몇 마디의 대화만으로 알 수 있었다. 그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구역질 나는 사악함으로 채워진 괴물이었다. 필사적으로 대책을 강구하던 로난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잠깐.’
혹시 몰라 챙겨온 기억이 있었다. 로난은 검을 휘두르지 않는 손으로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작은 보석 같은 것이 손가락 끝에 만져졌다. 핏물로 더럽혀진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거지.”
로난이 주머니에 있던 손을 빼냈다. 그의 손에는 태양 형상의 뱃지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2년 전 바쥬라의 마수에서 여명 마탑을 구했을 때, 화염 마법의 대가인 아운 필라에게 수여받은 1급 공로 훈장이었다.
원래는 교복에 끼워두는데, 혹시나 추운 북부에 필요할까 싶어서 들고 온 물건이었다. 아운 필라는 분명 여기에 호신용 마법 몇 가지를 각인해 놨다고 말했었다.
그 작자의 성미로 미루어 보아 틀림없이 위력이 상당한 화염 마법일 터였다. 원체 스케일이 큰 아저씨였으니까. 이걸로 다 태워 버리고 탈출하면 어찌어찌 되겠지. 로난이 분투 중인 아데샨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한테 붙어요 선배. 가급적이면 가까이.”
“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에잇, 시끄럽고 얼른 와요!”
팔을 뻗은 로난이 아데샨의 허리를 휘감아 안았다. 전례가 없는 밀착 접촉에 그녀가 헛숨을 들이켰다.
“로, 로난!”
“솜씨 한 번 봅시다. 아운 필라.”
마법이 발동하는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공격을 받으면 될 것 같았다. 로난이 수인들의 앞에 뱃지를 치켜드는 순간이었다. 아찔한 작열통이 그를 덮쳤다.
“커윽!”
“로난?! 괜찮아?”
몸이 수그러질 정도의 고통이었다. 전신의 혈관을 태우는 듯한 열기가 심장 안쪽에서 번져 나오고 있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통증에 로난의 입이 벌어졌다.
“크으으···나바르도제?”
아버지의 방에서 해주를 할 때 겪은 것과 같은 고통이었다. 팔을 타고 올라온 열기가 뱃지로 모여드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는 거지?’
자세한 건 알 수 없었다. 다만 저주를 뽑아낸 자리에 자신의 불씨를 박아 넣었다는데 그것의 부작용으로 추측될 뿐이었다.
거대한 웨어베어 한 마리가 앞발을 내리치고 있었다. 고개를 내저어 정신을 차린 로난이 다시 뱃지를 치켜들었다.
“와라.”
“크워어억!”
우악스러운 앞발에는 인간의 상반신 정도는 단번에 날려 버릴 힘이 있었다. 차갑게 굳어버린 육구가 뱃지와 접촉하는 순간이었다. 로난을 중심으로 터져 나온 섬광이 어두컴컴한 통로를 환하게 밝혔다.
****
하늘이 흐렸다. 나풀거리며 떨어진 눈송이들이 바닷물에 닿아 사라지고 있었다. 망령의 바다에서 떠밀려온 유빙이 사방을 떠다니고 있었다.
-까르르. 까르르.
유령처럼 새하얀 돌고래들이 시커먼 물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굉장히 보기 힘든 환상종의 일종이었지만 바르카는 고래 따위에게 관심이 없었다. 나무배 위에서 노를 젓던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슬슬 끝났겠군.”
그의 시선은 점점 멀어지고 있는 어느 거대한 얼음덩이에 머물러 있었다. 이쯤 시간이 지났으면 시체 전사들이 로난을 죽이지 못했더라도 얼음이 통로를 뒤덮어서 압사당했을 터였다.
바다와 땅에 걸쳐 있는 빙하는 로난을 장사 지내기 위해 만들어낸 무덤이자 함정이었다. 저거 하나 짓겠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가.
“아깝군. 직접 죽여버리고 싶었건만.”
바르카가 혀를 찼다. 모든 것을 망쳐버린 원수인 만큼 직접 간을 뽑아 버리고 싶었지만, 그 다르만을 해치운 상대인 만큼 방심할 수는 없었다.
‘아니야. 이게 옳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 바르카 터르겅의 방식이었다. 더군다나 늘 로브 안에 넣어서 데리고 다니는 최고의 살수는 지금 연구실에서 해독 치료를 받고 있었다. 제이거의 단검에 대신해서 찔린 탓이었다.
“···무지렁이가.”
아직도 제이거의 얼굴을 떠올리면 열불이 치솟았다. 설마 그 쓰레기가 저력을 발휘할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단칼에 목을 쳐 죽이는 게 아니라 시체 병사로 만들어 두고두고 써먹는 거였는데.
“그래. 다시 하면 된다.”
하지만 바르카는 이내 번민을 떨치고 평정을 되찾았다. 제국에 대한 원한을 제외한 모든 과거는 발목을 붙잡는 장애물일 뿐이었다.
또한 별의 강림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또다른 작전으로 북부를 삼키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망령의 바다에 위치한 연구실에는 북부를 통합할 수 있는 무기가 즐비해 있었다.
결의를 다진 그가 다시금 노를 저으려는 차였다. 콰아아앙!! 천지가 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로난이 가둬져 있던 빙하가 폭발을 일으켰다. 저도 모르게 일어선 바르카가 당황하며 외쳤다.
“뭐, 뭐야?!”
안쪽에서 드래곤이 브레스라도 뿜은 것 같았다. 거대한 화염 기둥이 하늘을 향해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저 높이 솟구쳤던 파편과 그을린 시체들이 비가 내리듯 바다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럴 리가. 놈들 중에 마법사는 없었는데···!”
바르카는 할 말을 잊은 채 타오르는 얼음을 쳐다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 지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 자폭이라도 한 건가? 저 정도의 폭발이면 무사하지는 못할 텐데, 시체를 확인하러 가야 하나? 그가 벙찐 채 숨을 몰아쉬던 차였다. 발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우···간신히 따라잡았네. 위험했다···.”
“뭣이?!”
“으으, 추워···씨발.”
바르카가 황급히 고개를 내렸다. 흰돌고래 한 마리가 그의 배 측면에 붙어 있엇다. 원래 아름다운 청색으로 빛나야 할 눈동자는 회색으로 탁해져 있었다. 온몸에 검은 피와 바닷물을 뒤집어쓴 청년이 고래의 목을 감은 채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로, 로난?!”
“이야···그런데 정말 비슷하게 생겼네···?”
로난이 히죽 웃었다. 후드를 쓰고 있지 않은 바르카의 얼굴은 형제와 매우 닮아 있었다. 다소 붉은기가 도는 털과 얼굴을 가로지르는 끔찍한 흉터만 아니었다면 자이파 본인이라 해도 믿길 지경이었다. 바르카가 당혹을 금치 못하고 소리쳤다.
“어, 어떻게···!”
“그건···후우, 내가 말해줄 이유가 없지.”
쾅! 돌고래를 놓은 로난이 단번에 배 위로 도약했다. 나오는 순간 몸에 묻은 바닷물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좆같으니까 빨리 끝내야겠군. 앞머리를 한 번 쓸어넘긴 로난이 입을 열었다.
“곧 죽을 놈한테 말이야.”
“이놈!”
바르카가 반사적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과연 터르겅의 핏줄인지라 상당히 빨랐지만 형님에 비하면 한참을 못 미치는 속도였다. 가볍게 어깨를 비틀어 공격을 피한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푸확! 혜성처럼 쏘아진 찌르기가 바르카의 가슴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