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17화 (217/333)

217. 상봉

#217

“엘시아.”

로난의 입이 나지막이 벌어졌다. 은색 머리카락과 루비를 박아넣은 듯한 눈동자는 딱 한 번 봤음에도 결코 잊을 수 없는 특징이었다. 아데샨이 당혹스레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아마도요.”

“로, 로난? 어디 가?”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귀의 등불에 현혹된 정어리처럼 걸음을 옮겼다.

만났다. 드디어 만났다.

불현듯 고개를 돌린 엘시아와 로난의 눈이 마주쳤다. 제자리에 멈춰선 그가 입가에 손을 말아 외쳤다.

“엘시아!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절벽에 부딫힌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자신의 이름을 들은 엘시아가 눈썹을 치켜떴다. 그녀가 하이란을 쓰다듬던 손을 멈췄다.

-퓌요오오오!

불현듯 하이란이 날개를 펼치며 비상했다. 몸이 밀려날 정도의 강풍이 휘몰아쳤지만 아데샨을 제외한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로난은 그녀에게 다가가며 자신이 망령의 바다까지 온 목적을 설명했다.

“내 이름은 로난이에요. 저 하늘에 있는 건물···뭐더라, 그래. 드리무어에서 지도를 보고 찾아왔고요. 아버지랑 당신 중에 누가 남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괜찮은 설명이 이어졌다. 간략하고 핵심적인 정보만 담고 있어서 이야기를 처음 듣는 아데샨도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였다. 의도치 않게 세계의 비밀을 듣게 될 때마다 그녀의 어깨가 경직되듯 움츠러들었다.

“하, 하늘 위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이야···.”

허나 엘시아는 가만히 서서 눈을 깜빡이는 것 외에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몰래 밀랍인형으로 바꿔치기 한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다소 무례하더라도 오러를 써서 끌어당겨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갑자기 엘시아가 등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로난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잠깐 기다려!”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든 로난이 오러를 발동했다. 절벽을 향해 쏘아진 노을색 빛줄기는 극광과 뒤섞이며 다시 한 번 초현실적인 풍경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엘시아는 이미 절벽 너머로 자취를 감춘 뒤였다. 칼을 집어넣은 로난이 아라단의 시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마나로 강화된 그의 허벅지가 터질 듯이 부풀었다.

“젠장, 이렇게 놓칠 수는 없지.”

“로, 로난!”

쾅! 로난은 당황하는 아데샨을 뒤로 하고 제자리에서 도약했다. 왜 자기들이 불러 놓고 피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무조건 잡아야 했다.

“썅, 언제 저기까지 간 거야?”

다섯 번의 도약만으로 절벽 위에 도달한 로난이 탄식을 흘렸다. 엘시아의 뒷모습은 이미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진 발자국이 그녀가 걸어간 길을 표시해주고 있었다.

“멈추라니까!”

상식적으로 저게 가능한 속도인가 싶었지만 우직하게 쫓는 것을 제외한 선택지는 없었다. 난데없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쾅! 쾅! 로난이 지면을 박차며 뛰어오를 때마다 큼직한 얼음 파편들이 튀어 올랐다.

기묘한 추적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엘시아와의 거리는 이상하리만치 좁혀지지 않았다. 다 따라잡았나 싶다가도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아득히 멀어져 있었다.

얼음 바다의 풍경이 빠르게 시야 양옆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재도약하려던 로난이 그 자리에 멈춰섰다.

“허억···헉, 뭐야?”

엘시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눈 위에 찍혀 있어야 할 발자국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숨을 몰아쉬던 그가 앞머리를 움켜쥐었다.

“이럴 리가 헉, 없는데···.”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놓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멀쩡하던 발자국까지 사라지는 것은 더더욱.

기묘한 현상에 로난이 침음을 흘리던 와중이었다. 뒤쪽에서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잡았다아···!”

“아데샨.”

쾅! 마침내 로난의 옆에 착지한 그녀가 무릎을 짚으며 숨을 골랐다. 배낭을 앞뒤로 두 개씩 짊어지고 있어서 속도가 느렸다.

“미안해요. 워낙 중요한 일이라.”

“하아아···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왜 갑자기 멈춘 거야?”

“엘시아가 사라졌어요. 이럴 리가 없는데.”

혹시나 환영 마법인가 싶어 허공에 검을 휘둘러 보기도 했다. 하지만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들려올 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얼어붙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아데샨이 입을 열었다.

“으음, 마법으로 눈속임을 한 것 같은데 한번 칼을 휘둘러 볼래? 너는 마나를 벨 수 있으니까.”

“방금 해봤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났어요.”

“그래? 이상하네···분명 마나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게 느껴지는데.”

중얼거리는 아데샨의 말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로난의 얼굴이 한결 진지해졌다. 그녀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터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유형의 마법인가?’

한 번만 더 해볼까. 심호흡한 로난이 감각을 곤두세웠다. 서서히 넓어지고 선명해지는 시야 속에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방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마나의 잔흔이 지면 위에서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건···.’

띄엄띄엄 이어진 잔흔은 세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뭉친 채 모닥불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해주하기 전이었다면 감지조차 하질 정도로 기운이 미약했다.

해야 할 일을 알 것 같았다. 성큼성큼 다가간 로난은 지체없이 마나의 응어리 속에 검끝을 박아넣었다. 푹! 물에 검을 담그는 듯한 감촉과 함께 주변의 풍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하. 진짜네.”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얼음 벌판의 풍경이 미묘하게 달라지고, 끊어졌던 엘시아의 발자국이 다시 나타났다. 어느 시설의 입구처럼 보이는 직각 삼각형 구조물이 멀지 않은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엘시아는 그 앞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마지막으로 나타난 반투명한 거북이었다.

엘시아와 두 사람 사이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붉은 거북은 오우거 다섯 마리를 뭉쳐서 모아 놓은 것처럼 거대했다. 봉분처럼 솟아나온 등껍질은 굳어 가는 용암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길고 주름진 목 위에 얹어진 머리가 두 사람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데샨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저, 저건!”

정령학 수업을 열심히 들은 그녀는 알고 있었다. 눈앞의 거북은 고위 화염 정령 바야르도였다. 마을이나 산 따위는 하품을 하는 것만으로 불살라 버릴 수 있는 불의 화신.

하이란만큼은 아니라도 대부분의 정령사는 눈조차 마주칠 수 없을 정도로 격이 높은 존재였다. 저것도 엘시아가 부리는 정령인가? 두 사람을 멀뚱이 내려보던 바야르도가 입을 벌렸다.

“흐아아암···.”

“시발.”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암적색 불꽃이 거대한 목구멍 깊숙이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가 아데샨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제기랄, 숙여요!”

“으, 응!”

아데샨은 그렇게 했다. 동시에 바야르도의 입에서 화염이 쏟아졌다. 콰아아아! 액체처럼 걸쭉한 불은 순수한 마나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로난은 칼을 뽑아듬과 동시에 수직으로 세웠다. 콰아아아! 좌우로 갈라진 불길이 두 사람의 옆으로 지나갔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의 열기가 로난과 아데샨을 덮쳤다.

“크윽···.”

눈을 제대로 뜨기가 어려웠다. 그 순간 로난은 바르카의 비밀 군대를 태워버린 존재가 이 거북이라는사실을 깨달았다. 바야르도가 놈들을 불사르고 하이란이 진화를 비롯한 뒷처리를 한 것이었다.

“···지금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바야르도는 불을 토해내는 것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의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장난도 이쯤 했으면 도를 넘었다.

“적당히 해!”

한순간 라만차의 검신이 선홍색으로 물들었다. 앞으로 박차고 나간 로난이 정면으로 제비를 넘으며 검을 휘둘렀다. 퍼억-! 불길을 가르며 날아간 검기가 바야르도의 안면에 직격했다. 넓적한 얼굴을 반으로 가른 초승달이 뒤통수로 빠져 나왔다.

“므어어어···.”

쿵! 바야르도의 거체가 기울더니 쓰러졌다. 화염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마나로 이루어진 육신이 입자의 형태가 되어 소멸했다. 황급히 몸을 돌린 로난이 아데샨의 양어깨를 붙들며 물었다.

“아데샨, 괜찮아?!”

“으, 으응. 괜찮아.”

천만다행히도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난데없이 이름으로 불린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바야르도가 사라지자 그 뒤에 있던 엘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개 같은 년이, 지금 나랑 뭐 하자는···”

칼자루를 움켜쥔 로난이 뭐라 외치려던 차였다. 갑자기 엘시아가 고개를 숙였다. 새하얀 머리통 아래로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가워요. 로난.”

“···나를 알아?”

예상을 벗어난 반응에 로난의 눈이 커졌다. 상급자를 대하듯이 정중한 태도였다. 고개를 든 엘시아가 말을 이었다.

“네. 당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시험을 훌륭하게 통과하신 점, 축하해요.”

“시험?”

“네. 조금 전에 당신이 겪은 것은 신원을 입증하는 데 필요한 과정이었어요. 그분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라면 남들이 볼 수 없는 마나를 찾고 베어낼 수 있을 테니까요. 답을 찾아 여기까지 온 당신을 안내하는 것이 제 역할이에요.”

엘시아는 아주 오래 전부터 로난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말과 행동에 있어서 주저나 겉치레가 없는 것은 그 때문인 것 같았다.

환영 마법과 바야르도와의 싸움이 전부 시험의 일환이었다 설명했다.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것이 악의는 없어 보였다. 옅은 한숨을 내쉰 로난이 뒤에 있는 아데샨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 그런 이유면 상관없어요. 저 사람도 안 다쳤고.”

“네?”

“다행스러운 일이죠. 일이 잘못됐으면 댁은 여기서 죽었을 테니까.”

어조는 담담했으나 기세는 그렇지 않았다. 엘시아가 눈썹을 움찔거렸다. 손끝이 저릿거릴 정도의 살기가 로난에게서 배어 나오고 있었다.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는 건가. 작게 혼잣말한 그녀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로난 님의 시험에만 신경 쓰다 보니 동행자분을 신경 쓰지 못했어요.”

“이제 괜찮아요. 그나저나 여기는 뭐 하는 건물이에요?”

로난은 고개를 들어 삼각형의 구조물을 바라보았다. 재질을 알 수 없는 금속문이 지면과 수직을 이루는 면에 달려 있었다. 어째 다인하르에서 본 유적과 비슷한 인상을 풍겼다. 엘시아가 말했다.

“식물의 씨앗을 보관하던 창고에요.”

“씨앗?”

“네. 세상이 가장 찬란하던 시기에 지어진 유적 중 하나죠. 멸망을 대비하기 위해 지어졌으나 결국은 한 번도 사용되지 못했죠. 지금은 제가 개조해서···”

갑자기 엘시아가 말꼬리를 끌었다. 아픈 과거를 의도치 않게 이야기해버린 사람 같았다. 눅진한 우울함이 아름다운 얼굴에 깃들어 있었다. 결국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등을 돌렸다.

“···서론이 길었군요. 일단 따라오세요. 만나할 사람이 있어요.”

“만나야 할 사람이요?”

엘시아는 대답하는 대신 철문 옆에 붙어있는 기계장치를 조작했다. 사각형의 금속판 위에는  1부터 9까지의 숫가가 적힌 단추가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었다.

삑삑삑. 엘시아가 단추를 특정한 순서대로 누르자 입구가 개방되었다. 길고 좁은 계단이 땅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의 좌우로는 둥그런 조명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는데, 횃불보다 훨씬 밝고 눈도 편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건 마법으로 만든 조명인가요?”

“아뇨. 발광 다이오드라는 물질을 개조해서 만든 물건이에요. 이 또한 실전된 기술이죠.”

“발광···예?”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엘시아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철문을 옆에서 본 로난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감탄을 흘렸다.

“뭐 이렇게 두꺼워?”

재질을 알 수 없는 금속으로 이루어진 문짝은 드래곤이 밟아도 찌그러지지 않을 만큼 견고해 보였다. 원래 이런 것에 관심이 많은 아데샨도 옆에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우와···.”

어쨌든 세 사람은 계속해서 걸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데만 거진 20분이 소모되었다. 입구에 있던 것과 같은 철문을 세 개 정도 통과하자 이번에는 크고 넓은 복도가 나타났다. 낮처럼 환하게 밝은 것이 여기서도 아까 말했던 발광 뭐시기를 쓴 것 같았다.

“엘시아. 물어볼 게 있는데···”

“나중에요. 그분을 만나는 것이 먼저에요.”

오만 가지 궁금증이 들었지만 엘시아는 어떤 질문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모든 질문에는 어떤 사람을 만난 뒤에 이야기해 주겠다는 답변만 냉랭하게 돌아올 뿐이었다.

본론 위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좋았으나 이건 너무 급한 게 아닌가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멋대로 인사하고, 멋대로 시험하고, 멋대로 지하실로 끌고 오고.

‘에이, 나중에 설명해 주겠지.’

하지만 별다른 수는 없었기에 로난은 묵묵히 그녀를 뒤따랐다. 삼십 분 정도를 더 걸었을까. 어느 대문 앞에 멈춰선 엘시아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다 왔어요. 절대로 소란을 피우거나 물건을 건드리면 안 돼요.”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지금까지 본 문짝과는 뭔가 달랐다. 크기도 훨씬 크고 뭐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들어있다는 인상이 강하게 느껴졌다.

엘시아가 벽에 달린 단추를 조작했다. 푸쉬이익···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철문이 좌우로 벌어졌다.

성분을 알 수 없는 백색의 기체가 안개처럼 새나왔다. 내부의 풍경을 본 로난과 아데샨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이건···!”

광장처럼 드넓은 방 안에는 온갖 기계장치가 들어서 있었다. 공간을 가득 메운 푸스름한 광채, 거목의 뿌리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각양각색의 선. 푸른 빛무리는 방의 중앙에 있는 유리관에서 새나오고 있었다.

액체로 가득찬 유리관 안쪽에는 어떤 사내가 둥둥 떠 있었다. 문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뒷모습이 놀라우리만치 눈에 익었다.

‘설마.’

갑자기 소름이 확 돋았다. 로난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문을 닫은 엘시아가 입을 열었다.

“인사하세요.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이자 네뷸라 클라지에의 창시자. 그리고···.”

잠시 그녀가 말꼬리를 끌었다.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그마저도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입술에 침을 한 번 바른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로난, 당신의 아버지에요.”

0